소설리스트

3화 (3/4)

"웃지마."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오달리스크가 칸의 말에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갈무리 했다.

"그래도... 호호... 정말 재미있군. 천하의 칸이...호호호... 쩔쩔... 매다니."

"그게 그렇게 웃긴 일이야?"

"그럼.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도도하고 오만하신 우리의 칸. 그가 사랑에 빠지니 닭살이 돋을 만한 이야기를 태연하게 할 줄이야. 이야... 이거 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아얏! 아프잖아. 그 부분은 조심스럽게 해!"

"응. 그래 알았어. 그런데 소문이라니?"

용매에 젖은 솜을 핀셋으로 집어 그림의 표면에 뭍은 얼룩을 닦아 나면서 칸이 반문했다.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생긋 미소 짓던 오달리스크가 말해줄까 말까... 라는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거기. 응. 거기는 세게 문질러도 괜찮아. 아, 시원하다."

대답을 재촉하는 칸의 손놀림에 오달리스크는 나른한 한숨을 뱉어내며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근 60대 노인처럼 흥얼거렸다. 

순간 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기다. 이건 사기야. 이렇게 우아한 여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술탄의 여인이!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알지만! 분명 나이가 있다는 것도 안다. 못해도 200 살은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동이 겉모습을 따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사내로서의 당연한 욕심이지 않을까?

배와 가슴에 어린 새끼와 같은 솜털로 덮여있는 오달리스크는 헤럴이 울면서 부탁했던 그림이다. 복원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마지막 마무리 작업을 하던, 복원가의 조수가 실수로 테레빈 용제를 쏟은 것이 일의 시초였다. 쏟은 것이야 늘 상 있는 실수지만, 그 위치가 오달리스크의 위였고, 복원가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놀란 조수가 급히 주변의 휴지를 떼어다가 그림에 흘린 용제를 닦았지만, 그는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테레빈이 마르면 끈적하게 변한다는 것을 말이다. 오래된 돌에 이끼가 끼듯 덕지덕지 붙은 오달리스크의 아름다운 몸은 싸구려 양탄자에 일어난 보풀같이 변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복원가가 조수를 해고 하고, 현미경으로 그림을 살피면서 휴지찌꺼기를 제거했지만, 시간이 빠듯했다. 결국 울면서 헤럴에게 SOS를 청했고, 헤럴 역시 울면서 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엔 밝히진 않았지만 이 일은 매우 쉬운 측에 들어갔다. 그림 속의 그녀가 몸을 한번 털어주는 것만으로도 흰색의 작은 털 같은 휴지조각은 쉽게 떨어질 것이다. 다음으로 테레빈 얼룩이 남은 것은 그녀가 아프다고 소리치지 않는 이상, 자일렌 (xylene)과 에탄올 (EtOH)을 1대 1 비율로 섞은 용매를 이용해 살살 문질러 닦으면 된다. 자일렌이 유독물질이어서 마스크를 이중으로 착용을 해야 하고, 환기를 위해서 간이 환풍기를 설치해야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귀찮은 일 일뿐이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칸은 자신했다. 반나절이면 충분하다고.

확대경을 오달리스크의 아름다운 몸 위에 올리고서 얼룩을 확인하며, 칸은 다시금 그녀에게 소문에 관해서 물었다.

"흐음. 어떻게 할까? 말해줘? 정말 궁금해?"

문밖을 흘끔 쳐다보며 오달리스크가 약을 올리듯 칸에게 물었다. 

"응. 궁금해. 애타게 만들지 말고 말해."

열심히 일을 하라며, 자신은 자리를 비켜주겠다고 상냥하게 말한 하이드가 작업실을 나선지 2시간이 흘렀을까? 밖이 소란스러웠다. 방을 나서려는 칸을 하이드가 문밖에서 만류하며 '별일 아니에요. 곧 끝날 테니, 칸은 어서 빨리 일을 끝마쳐요. 알았죠? 오늘 저녁 전까지 모두 끝내야 해요.' 어딘가 흥분한 듯한 그의 말에 칸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궁금하다. 심히 궁금해서 미칠 것 같지만, 하이드가 양보했다. 이번에 받은 일에 대해선 함구하겠다며, 당분간은 자신과 있어달라고 명확하게 의사를 표명했다. 그의 말에 따라야지. 칸은 자리로 돌아와서 밖의 소란을 애써 무시하며 작업에 몰두했다. 얼마나 소란을 떨었는지 모르겠지만, 쥐 죽은 듯 조용해진 밖의 상황이 또다시 호기심을 자극했다. 칸은 밖으로 나가려는 발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 오달리스크에게 말을 걸었고, 그렇지 않아도 심심했던 그녀는 칸과의 놀이에 즐겁게 동참했다. 

"머리에 해바라기 화관을 쓴 미친년 있잖아. 걔가 그러더라."

"해바라기 화관의 미친....년? 아... 클뤼티에 (Clytie)! 그녀를 말하는 거야?" 

"몰라, 그런 요상한 이름은. 하여튼 걔가 칸이 사랑에 빠졌다면서 소문을 내잖아. 그것도 단단히 빠져서 삼도천 (三途川) 주인의 프러포즈를 거절했다고 하더군. 진짜야? 예전부터 삼도천의 주인이 자기를 노렸잖아. 진짜 거절했어?"

..... 자기..라니. 왜 갑자기 친한 척? 칸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콧등을 찡그렸다. 현기증을 일게 하는 지독한 자일렌의 냄새에 코가 마비된 듯 했지만, 일이 끝난 이상 상관없다. 창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며 칸이 담배를 빼어 물었다. 콧등을 찡그리며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자, 오달리스크가 상체만을 캔버스에서 쑥 빠져나와 다시 칸에게 물었다. 어지간히도 궁금한가 보다. 

"응. 거절했어."

"호호호. 정말이구나. 그것도 아까 그 남자 때문에 그랬다며?"

"응."

그때는 급했다. 하이드가 그녀에게 붙잡혔을 때니까. 그때 낸 상처가 욱씬거리는 듯해서, 칸은 상흔이 남은 팔을 쓸었다. 어쩌면 그녀 덕분에 자신은 하이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는지 모른다. 

"깔깔깔. 고소해라. 그렇게 도도한 척 잘난 척, 온갖 척이란 척은 다하더니, 샘통이네. 그럼 아까 그 남자가 너의 연인이라는 것이 진짜야? 이야... 온갖 미녀들의 러브 콜을 그렇게 거절하더니... 눈이 높아도 너무 높은 것 아니야? 난 눈만 마주쳐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혼났는데... 하여간, 칸. 능력도 좋아."

"훗. 비꼬는 거야?"

느긋하게 창에 몸을 기대며 칸이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말쑥한 모습에서 느껴지는 사내의 향기는 강한 수컷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향기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유혹하고 매혹시키며, 먹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매력. 이곳과 저곳을 모두 볼 수 있으면서 어느 쪽에도 기울이지 않고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사내. 그것이 칸의 매력이었다. 오달리스크는 혀를 입술로 축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비꼬기는... 그냥 뭐... 조금 그렇다는 것이지. 내가 그렇게 유혹하고 꼬드기고, 울어도 본체만체 하던 것이 어제 같은데... 하긴, 그때만 해도 칸은 무서웠지. 지금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지만."

"어제라니. 벌써 20년도 전의 일을 들먹이기는. 너도 늙었나 보군. 그리고 미성년자를 꼬시다니...  보통 그 나이 때의 소년에게 옷을 벗고 달려드는 누님은 반갑지 않아. 오히려 무서울 정도지. 그때 내게 했던 말은 아직도 기억해. '꼬마야, 누나랑 좋은 것 하자.' 좋은 것은 무슨......"

낮게 혀를 차던 칸이 시원스레 웃음을 지었다. 그때가 아마도 미국에 오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아버지께서 친하신 친구분이 멋진 그림을 소유하고 있다며 자신과 둘째 형 제운, 그리고 큰형인 도운을 데리고 오래된 저택에 갔던 적이 있었다. 어둡고 무서운 그림자에 놀라 훌쩍거리며 울던 자신을 업고 달래던 할아버지가 칸에게 보여준 것이 바로 오달리스크였다. 당시엔 할아버지 나름대로 어린 손자지만 그대도 사내자식이기에 여자에 관심을 보이면 눈물이 그칠 것이라는 판단이었지만, 오히려 칸은 오달리스크를 보고 겁에 질려 목놓아 울어버렸다. 쩔쩔매던 할아버지와 당황한 듯 자신을 달래던 큰형, 오달리스크의 남다른 매력에 자신 따윈 신경도 쓰지 않던 무심한 둘째 형. 

그러고 보니, 둘째 형 제운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리움에 콧등이 시큰거리자, 칸은 눈가를 꾹꾹 눌렀다.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제운 형은 사막에 던져놓아도 모래를 팔면서 떵떵거리며 살 사람이야. 애써 울적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칸은 담배를 빨아 들였다. 기분을 바꾸기 위해 칸은 일부러 크고 쾌활하게 오달리스크에게 물었다.

"엇차. 어때 다 마른 것 같아?"

캔버스에 다가가며 칸이 묻자 오달리스크가 약간은 물기가 어린 배를 쓸었다.

"거의 다 마른 것 같아. 이건 노동력 착취야. 자연 건조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억지로 말리라고 하다니. 참으로 심술 굳은 사내야, 자기는."

칸이 담배를 비벼 끄며 오달리스크의 삐죽이는 입술을 눌렀다.

"그래. 심술 굳은 사내지. 헤럴에게는 나중에 전화를 넣어야겠어. 그리고. 괜한 소문 퍼트리지마."

"어머? 무슨 소문? 네가 사랑에 빠져서 비굴하게 매달린 거? 아니면 당신이라면 절 마음대로 굴려도 좋아요, 아흥 아흥. 이렇게 말한 것?"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왜곡하지마. 나중에 보복 당하기 싫으면."

칸의 으름장에 오달리스크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아아. 알겠어. 원하신다면. 그런데, 칸. 그것 알고 있어?"

"응? 뭘?"

완전히 말랐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캔버스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던 칸이 무심하게 오달리스크에게 물었다. 

"그 아름다운 남자 말이야. 삼도천의 주인보다 무서운 사람일지도 몰라."

"설마..."

오달리스크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칸은 마른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시약병을 정리했다. 그런 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달리스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칸에게는 아이처럼 순진하고 온순하게 웃던 그 남자가 자신을 볼 때는 얼마나 살기 어린 눈빛을 보냈는지 오달리스크는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뭐, 남의 연애사정이야 상관없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좋으려나? 괜히 알아서 칸의 머리카락을 자신의 것인 양 떠들어대는 대머리 할망구에게 칸이 가면 곤란하지. 그럼, 곤란하고 말고.' 

노을이 지는 서쪽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달리스크가 긴 하품을 뱉어내며 캔버스로 몸을 눕혔다. 

"하이드?"

거실은 조용했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느껴지는 않는 고요한 실내엔 바람의 이동조차 멈춘 듯 시간이 정지한 듯 보였다. 칸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페르시아 산 카페에 길게 자국이 남은 것으로 보아서, 무엇인가 끌었던 것 같아. 의자의 배치라도 바꿨나? 그러나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배가 고픈 것 같아서, 식당으로 들어가자, 테이블엔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나는 저녁과 편지가 놓여있었다.

'식사하고, 샤워하고, 충분히 쉰 다음에 침실로 와요. 알았죠? 꼭 밥은 먹어야 해요. 사랑해요, 칸.'

무슨 일이라도 꾸미는 것인가? 순간 오싹한 소름이 돋아 칸은 팔을 벅벅 문질렀다. 그 소란으로 보건 데 아마도 침실에 뭔가를 했을 것이다. 장미꽃잎이라도 뿌린 건가? 아니면 온 방안을 향초로 장식? 것도 아니면... 흐음... 칸은 빈약한 상상력으로 가정을 해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쉽게 포기했다. 나중에 가면 알 텐데, 뭐. 차려진 음식은 맛있었다. 하이드가 직접 요리를 한 것은 아닐 테니, 아마도 출장 요리사라도 불렀거나 호텔에서 음식을 배달시켰을 것이다. 준비된 과일 타르트까지 말끔히 먹어 치우자, 피곤이 엄습했다. 밖은 이미 검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잠을 자면 딱 좋을 상태. 칸은 흥얼흥얼 노래를 중얼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하하..."

마치 칸이 들어올 것을 알았다는 듯, 촛불이 밝혀진 욕실의 욕조엔 뜨거운 물이 찰랑거리며 넘칠 것 같은 수위를 자랑했다. 철저하게 준비했군.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덜컥 걱정이 되었다. 한달 만에 하이드와 가졌던 어제의 정사의 여운이 아직도 칸의 몸에 남아있었다. 의자에 앉을 때나 걸을 때 아릿하게 아파오는 그곳의 통증에 칸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하지 말라고 할 것을 그랬나? 그래도 하이드가 속상해 하는 것보다, 힘들더라도 넘어가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래저래 몸만 축나겠군. 하이드도 양심이 있을 테니, 지나치게 몰아붙이진 않겠지. 그리고 그도 예전에 비해서 많이 양호해졌으니 말이야. 칸은 어제의 정사로 하이드의 자제력에 믿음이 갔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자신이 왜 그를 믿었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다. 

문을 열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크를 했다. 분명 안에는 인기척이 있지만 들어오라는 소리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칸은 손잡이를 잡고 잠시 갈등했다. 들어가도 될까? 아니면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잠시간의 고민이 무색하게 안에서 하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그 소리가 어째 사형선고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칸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고 다시 들이마셨다. 하이드도 인간이니 설마 무슨 끔찍발랄한 일을 펼쳐놓진 않겠지? 그러나 거실의 카펫 위에 길게 자국이 남은 것과 욕실의 아로마 향초가 칸의 의심을 부추겼다. 

작업실을 나가기 전에 하이드는 유심히 그림을 살펴보았다. '나보다 이게 더 예뻐 보이는 것은 아니지요?'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무엇인가 굳은 결심을 했는지, 하이드의 눈이 번쩍였다. 

'제발...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기행을 저지르지 않기를...' 

몸에 좋다며 올리브에 볶은 호박씨를 한아름 안겨준 하이드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먹으라며 얼린 새우와 게를 냉장고에 꽉꽉 채워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먹어야 한다며 챙겨준 약만해도 10여 종류였다. 이것들 모두가 정력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머니와의 통화를 끝내고 나서였다. 

'어머. 나이도 어린 것이 벌써부터 정력제를 먹고 그러니? 사귀는 사람이 부실하다고 그러니?' 

부실하다니요... 절대로 아니에요, 어머니. 

"그러고 보니... 방금 먹은 식단도... 참... 전복과 장어, 인삼을 넣어 만든 밀 전병.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써 스스로를 자위하며 칸은 한 숨을 내쉬었다. 어제도 했는데 오늘이라고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한번으로 끝냈으면... 아니, 그것이 힘들다면 두 번으로... 정 안 된다면 세 번으로 합의를 보면 안될까? 갑자기 헤럴에게 전화를 해서 일을 시켜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칸은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이번은 하이드의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 그를 외롭게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굳은 결심을 하고 칸은 문을 열었다. 

"칸."

"...... ..... 하... 하이드?"

"늦었네요. 어서 와요."

새초롬하게 웃으며 하이드가 부채를 살랑살랑 부쳤다. 방은 바뀌어져 있었다. 이집트 산 호도나무로 만들어진 칸의 침대는 4개의 귀퉁이와 상판부분에 휘장을 칠 수 있는 케노피 침대였다. 평소엔 그저 늦잠을 잘 때 햇볕을 가리려는 의도로 두꺼운 회색 천으로 덮여 있던 그곳은 다른 것으로 덮여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질 좋은 붉은 빌로드가 기둥에 금색 리본으로 묶여있었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또한 같은 재질의 색감이 조금 다른 천으로 덮여있었다. 가구의 배치가 바뀐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칸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저 튀르꾸아즈는 어디서 구입한 것인가? '부채를 든 오달리스크'가 누워있던 그 튀르꾸아즈를 현실로 끌고 온 듯 그것은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겼다. 질감은 물론이거니와 색감조차. 

"하이드. 대체..."

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에 앉아있던 하이드가 입고 있던 가운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어깨를 미끄러져 내리는 가운 안의 하이드의 나체가 드러났다. 칸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느릿하게 하이드가 튀르꾸아즈에 몸을 눕혔다. 아라베스크 문양이 수놓아진 쿠션에 팔을 괴며, 하이드가 다리를 들어 하체의 은밀한 부분을 슬며시 가리며 촉촉하게 물기가 어린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림의 그 모습이었다. 배경 역시 불과 1시간 전에 칸이 작업을 하던 그림과 똑같았다. 원근법을 고려한 사물의 배치와 구도까지 눈의 착시인지 확인을 하지 않으면 못 배길 만큼 동일했다. 단지 그녀가 아니라 하이드라는 것이 차이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이드가 드러난 목젖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어때요?"

그 속에 숨겨진 의도가 칸의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제가 더 아름답지 않나요?' 

하이드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표정을 최대한 자제하며 하이드가 진주빛 부드러운 어깨를 손가락으로 쓸어 내렸다. 칸의 눈이 자연스레 하이드의 손길을 따라 그의 몸을 더듬는다. 

'제 피부가 더 부드러워 보이지 않나요?' 

다시금 하이드는 눈으로 물었다. 검푸른빛의 공작새의 꼬리털이 은은하게 밝혀진 촛불에 흔들리며 깊은 초록과 어두운 파란빛의 잔상을 남기며 하이드의 몸을 가렸다. 가릴 듯 말듯한 부채의 흔들림 너머로 아기천사의 행복한 입술보다 붉고, 이슬을 머금은 장미보다 부드러우며, 페르세포네를 유혹한 석류보다 반짝이는 가슴의 과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미동도 하지 않고 석상처럼 굳어있는 칸의 몸을 더듬듯 바라보던 하이드가 몸을 일으켰다. 길고 우아한 다리를 모아 은밀한 부위를 가리더니, 천천히 다리를 꼬아 앉았다. 

'이래도 그녀가 아름답다고 말하실 건가요?'

"칸?"

하이드가 천천히 칸을 불렀다. 미묘하게 끝을 올린 하이드의 음성이 방안의 뜨겁게 달구어진 공기를 진동시키며 옹달샘에 던져진 나뭇잎의 파문처럼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칸은 눈을 감았다. 

"칸?"

다시 하이드가 칸을 불렀다. 움직이지 않는 그를 대신해서, 하이드가 붉은 빌로드가 덮인 튀르꾸아즈에서 일어섰다. 바다거품에서 태어난 미의 여신이 인간의 대지에 그 아름다운 첫발을 내딛듯 하이드의 고운 발끝이 칸을 향해 다가왔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분홍 조개 껍질을 매달은 듯한 손톱, 강인한 손목과 진주와 은을 곱게 갈아 만든 듯한 팔을 지나 은은하게 빛나는 어깨, 백금을 녹여 만든듯한 쇄골과 사슴처럼 고아한 목, 태양의 빛을 한 줌 따다가 만든듯한 찬란한 금발, 세상의 모든 기쁨과 슬픔, 고통과 즐거움을 섞어 만든 파란 눈동자. 

칸은 현기증이 일었다. 이 아름다운 신의 작품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만지는 것이 겁이 날 정도,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마저 죄악처럼 느껴지는 하이드의 향기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강렬한 향기 속에 녹아있는 하이드의 불안과 초조가 칸에게 전해져 왔다. 

"어때요?"

달콤한 하이드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아네모네를 꽃피우고 지게 하는 미풍의 살랑임이 귓가의 솜털을 자극하고, 칸의 깊은 곳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는 칸의 모습에 하이드가 화사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입 고리가 살짝 올라가 새초롬한 초승달의 자취를 남기며 칸의 입술에 그 흔적을 남겼다. 

"칸... 나의 연인. 칸."

하이드의 섬세한 손이 가운 안에 숨겨진 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열기를 담은 손이 칸의 가슴을 더듬으며 유혹의 꽃을 피워 올렸다.

"후후."

요염한 미소를 띄우며 하이드가 칸의 가운을 벗기며, 서서히 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가지고 싶지 않나요? 만지고 싶지 않아요? 느끼고 싶나요?"

하이드는 칸을 의자에 앉히며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딘가 멍한듯한 칸의 눈가에 입술을 찍어 누르며, 하이드가 칸의 다리를 벌렸다. 그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하이드가 칸의 목덜미를 끌어내렸다.

"오늘은 재우지 않을 거에요. 울어도, 싫다고 해도, 그만두지 않을 거에요. 싫어요? 아니며 칸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입술을 맞대고 중얼거리며 대답을 기다리던 하이드는 끝내 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자, 심술 굳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를 세워 칸의 아래턱을 깨물었다. 잘근잘근 씹다가, 까끌한 수염의 자국이 남아있는 부분을 집요하게 빨아들이며 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입술근처를 배회하며 대답하지 않으면 키스는 해주지 않겠다며 속으로 다짐했던 결심이 흔들리도록 그의 말은 들리지 않자, 하이드는 그제야 무엇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이렇게 분위기를 잡았는데 목석처럼 가만히 있는 거야?' 

분명 하이드의 예상으로는 칸이 흥분해서 덤벼드는 장면이었다. 

'그가 흥분한 모습이 보고 싶다. 그가 나에게 다시 한번 반한 얼굴이 보고 싶다. 감히... 날 옆에 두고서도 그림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말한 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하이드 미셀러니임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잘만 하면...... ......' 

그런 거창한 계획하게 시도한 일이었는데, 반응이 없어도 너무 없다.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하이드는 칸의 양 뺨을 손에 쥐고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어딘가 겁에 질린듯한 칸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칸?"

설마... 겁에 질렸다니. 무심코 내린 손이 칸의 검은 수풀에 닫자, 흘끔 눈을 내린 하이드는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것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아프기까지 한데, 칸의 것은 추운지 잔뜩 오그라들어 평소의 크기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이봐, 이봐. 이게 아니잖아. 지금 거기서 줄어들면 어떡해? 커져야지!' 

손으로 잡고 흔들기라도 할 심상으로 하이드가 손을 뻗었을 때, 그 손을 칸이 잡아 쥐었다.

"칸, 괜찮아요? 제가 놀라게 한 건가요?"

"...아.. 아닙니다."

칸의 목소리 끝은 갈라져있었다. 목이 마른 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던 칸이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입으며, 테이블에 놓인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한 잔, 두 잔. 얼굴에 혈색이 돌 때까지 술을 마신 칸이 어지러운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호흡을 고르자, 하이드가 급히 다가갔다.

"칸...!"

"괜찮아요. 그것보다, 하이드. 옷을 입으시는 것이 좋겠군요."

"네?"

잘못들은 것이겠지. 옷을 입으라니? 무슨 뜻이야? 가운을 걸치라는 것도 아니고 옷을 입으라니... 하이드는 칸의 의중을 살피려고 했지만, 무슨 뜻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건네주는 옷을 입을 생각 또한 더더군다나 없다. 

'얼마나 고생해서 셋팅해 놓은 건데! 귀마드 갤러리 (Hector Guimard, 1867 - 1942)에서 이 의자랑 테이블, 뒤의 커튼까지 대여한다고 압력까지 넣었는데! 절대 안돼! 절대 못나가!'

하이드는 고집스레 칸이 건네준 옷을 거절했다. 

"왜? 왜 그러는 것이에요? 뭐가 문제에요? 말을 해줘요. 옷을 주고 나가라고 하지 말고. 칸! 화났어요? 네?"

"아니요. 화가 난 것은 아닙니다."

무뚝뚝하게 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왜! 왜 나가라고 해요? 하이드가 불만을 품어 칸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노력을 허무하게 무너뜨릴 수 없다. 칸의 팔을 잡고 하이드가 끈질기게 물었다. 

"이유를 말해줘요. 칸."

"......"

곤란한지 칸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시선을 피했다. 

"칸... 칸... 어서요. 이런 게 싫어요? 제가 싫어 졌어요? 방을 마음대로 바꿔서 화가 난 것이에요? 네? 칸..."

이제는 울먹임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하이드가 애잔하게 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잘못했는가 보다. 그냥 기다릴 것을.' 

괜히 오달리스크에 발끈해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잘못이었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차라리 기다렸다가 칸과 저녁을 먹고, 기분 좋게 목욕을 했다면, 지금쯤은 침대에서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을 텐데. 왜 그랬지? 아우, 바보, 바보.' 

거진 자책하는 심정으로 하이드가 칸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매달렸다. 

"하이드의 잘못이 아니에요. 모두... 제 탓입니다."

"칸의 탓이라니요. 아니에요. 칸이 이런 것을 싫어하는 줄 모르고 일을 벌인 제 탓이에요.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닙니다. 사과는 제가 해야 하는 걸요."

칸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오달리스크... 그런 사람으로 하이드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칸이 하이드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밀려난 거리만큼 차가운 공기가 둘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술탄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알아요, 저도."

그래서 그녀의 관능적인 몸매와 요염한 미소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에게 짧은 순간이나마 칸이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도 알아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아시나요?"

칸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하이드를 바라보았다.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엄격한 표정의 칸은 예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이름 모를 하연 꽃이 피어있던 들판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칸을 유혹하던 여자가 있던, 그곳의! 그날의! 칸과 닮아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볏쭈볏스며 한기가 돌았다. 벌거벗은 육체에 북극의 날카로운 바람이 살을 에듯 불어와 하이드는 어깨를 움츠렸다. 

'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난... 단지... 내가 이만큼 아름답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을 뿐인데. 그냥 그것뿐이에요.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칸이 빠져들기를 바랬을 뿐이에요.'

하이드가 입술을 깨물며 칸의 손을 잡았다. 무서웠다. 

"오달리스크는 아름다울 뿐입니다. 그녀들은... 술탄을 위한 욕망의 배출구일 뿐이에요. 제가 그녀들에게서 느끼는 것은... 아름다움보다는 가엽다는 동정이 더 큽니다. 하이드. 당신이 왜 이러는지 알아요. 이렇게 하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외모도 아름답지만, 절 향한 마음의 깊이가 아름답게 여겨져요. 절 유혹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제가 또다시 당신에게 반하기를 바란 것인가요? 그저, 순간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새겨두고 짧은 시간 동안 사랑을 주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아니에요. 칸. 아니에요."

하이드가 급하게 부정을 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런 것 같군요. 굳이 오달리스크를 모방할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에 대한 미안함과 서운함이 같이 드는 군요. 저의 무심한 태도가 당신을 몰아붙인 것 같아 미안합니다. 가끔 찾아오는 술탄을 위해서 외모를 꾸미고 테크닉을 배우고, 다른 여인을 시기하고... 오로지 그 자신의 삶은 없고, 술탄을 향한 육체적 욕망에 번뜩이는 여인들. 하이드, 저는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섹스? 좋아요. 당신과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한 방편이니까요. 몸이 겹쳐지는 그 순간엔 영혼까지 같이 하고 있다는 그 충족감이 저는 좋습니다. 그렇지만, 욕망의 배출구로서 당신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겠어요, 하이드? 전 당신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어요. 자주 표현하진 않지만, 늘 당신을 생각한다고 한 것을 잊었나요? 가볍게 여기고, 쉽게 당신의 마음을 저버릴 것이라고 믿는 다면..."

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하이드의 얼굴이 공포로 파랗게 질렸다. 

'말하지 마요. 말하지 말아요! 설마... 설마... 헤어지자는 건가요? 그런 것이에요?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당신의 욕정을 풀기 위한 도구로서 행동하는 것 같으니, 그게 싫어서... 칸, 당신의 마음을 제대로 몰라줘서, 헤어지자는 건가요?' 

겁에 질린 하이드가 칸의 팔을 잡아끌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