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

현관문을 따자 마자, 하이드가 뒤에서 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떻게 참았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다.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수 없이 깨문 입술이 진한 키스라도 나눈 후처럼 붉게 부풀어 있었다.

"칸.... 칸..."

애달은 목소리로 하이드가 간절하게 칸의 이름을 불렀다. 가슴을 더듬던 손길은 어느새 급하게 바뀌고, 하이드가 급히 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하이드. 잠시만요. 여기선 안...!"

말을 잇기도 전에 칸의 목이 뒤로 돌려졌다. 꺾인 목에서 미약한 고통을 호소했지만, 칸은 그것보다 입안으로 파고드는 하이드의 혀에 긴장이 풀려버렸다. 칸의 머리를 손에 쥐고 끌어당겨 입안을 헤치며, 하이드는 나머지 손으로 급히 칸의 옷을 벗겨나갔다. 굳게 잠긴 단추를 뜯듯이 열고, 손바닥으로 칸의 가슴을 급하게 더듬었다. 

입술에 떼어지고, 칸이 다시 만류의 말을 하기도 전에, 하이드가 칸의 몸을 돌려서 벽에 밀어붙였다. 평소와는 다른 거친 하이드의 동작에 칸은 일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숨을 몰아쉬며 진정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던 하이드는 고개를 세차게 두어 번 흔든 후 칸의 입술로 달려들었다. 머뭇거리는 칸의 태도가 불만이지, 입술을 강하게 무는 물었다. 아픔에 칸이 입을 벌리자, 하이드가 고개를 숙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웠다. 어디에서 이 열기가 오는 것인지 칸은 알 수가 없었다. 입안에 열기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붙여진 허리를 연신 비비며 하이드가 낮은 콧소리를 냈다. 그 와중에도 하이드의 손은 착실하게 칸의 상의를 모두 벗겼고, 급히 벨트로 손을 내렸다. 그러다 칸의 맨 살을 느끼고 싶은 욕심에 입술을 떼고 급히 하이드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번엔 칸이 도와주었다. 그도 하이드만큼 달아올라버렸다.

급히 하이드의 옷을 벗기고, 바지도 벗기고, 이들은 태초의 인간이 그러했듯 알몸이 되어 서로의 몸을 만져나갔다. 확인을 하듯, 하이드는 칸의 목덜미, 쇄골로 입을 미끄러트리며 혀로 맛을 보았다. 맛있는 음식의 전체요리를 먹듯, 그의 혀가 매끄럽게 칸의 어깨를 배회했다. 그러다 급히 가슴으로 혀를 미끄러트려 입에 머금었다. 팔을 뻗어 칸의 허리를 감싸 쥐고, 다른 손으론 급히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장님이 사물을 확인하듯 하이드는 칸을 더듬어 나갔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자신도 궁금할 지경이다. 집으로 들어오자, 물씬 풍기는 칸의 향기에 억눌렀던 욕망이 터져 나왔다. 그의 입술, 그의 가슴, 그의 다리, 그의 눈. 하이드가 숙이던 허리를 펴고 칸의 입술을 다시 머금었다. 탄력적인 입술이 벌어지며 붉은 혀를 감아 올리자, 칸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틈을 만들었다. 그것이 못해 아쉽고 속상해서 하이드는 강하게 칸을 벽에 눌러 붙이듯 밀어붙였다. 팽팽하게 서있는 아래가 칸의 단단한 배에 밀어붙여지자 찔끔 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처음은 늘 칸의 안에서! 하이드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급히 손을 칸의 엉덩이로 향했다. 나른하게 풀어져있던 근육이 바짝 긴장하는 듯 해, 하이드는 칸의 혀를 세게 깨물었다. 거부한다면 울어버릴지도 몰라요. 협박 아닌 협박에 칸이 웃었다. 붙어있는 입술을 통해서 그의 미소가 전염되듯 퍼져 나왔다. 

"정말이에요. 울 거에요. 힘들지도 모르지만... 칸... 벌려줘요. 문을 열어줘요."

노골적인 말에 칸의 얼굴과 목이 수줍은 동백마냥 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뭇거리는 그의 동작에 하이드가 망설임 없이 칸의 허벅지를 들어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열려진 입구를 손가락을 급하게 밀어넣자, 고통에 칸이 하이드의 어깨를 잡았다.

"하이드... 으윽... 무리에요."

하이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한 달 만에 입구는 주인을 잊고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새 잊어버리다니... 괘씸한 생각에 하이드가 칸의 엉덩이를 꽉 쥐고 다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빡빡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고집스럽다. 하이드는 이를 세워 칸의 목덜미를 물면서, 그의 긴장이 풀리기를 잠시 기다렸다. 고른 숨을 내쉬던 칸이 어깨에 힘을 빼며 하이드의 머리를 쓰다듬자 잠시 눌러두었던 욕망이 다시금 솟아 올랐다. 한계에 다다른 허리아래의 그것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어서 들어가고 싶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냥 넣으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칸도 힘들 것이다. 하이드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물러날 수도 나아갈 수도 없다. 그 갈등을 알고 있다는 듯, 칸이 하이드의 그곳을 손에 쥐었다.

"흑...! 칸... 안돼요. 안 된단 말이에요."

하이드의 만류에 칸이 손에 쥐어진 남성을 꽉 잡아 쥐자, 하이드의 고개가 앞으로 푹 숙여졌다. 단단하고 거칠지만, 그곳이 칸의 손이라는 것만으로도 얼굴로 피가 몰렸다. 금새라도 코피라도 쏟아질 것 같은 열기에 하이드가 칸의 귀를 세게 물었다.

"으읏! 칸... 칸..."

만류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라고 부추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의 애원에 칸이 하이드의 허리를 끌어안아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역전된 듯한 상황이었지만, 칸으로서도 그다지 여유가 없었다. 아래를 찌르고 있던 하이드의 손가락이 섹스를 하듯 빠르게 움직였다. 빡빡한 입구가 자극에 붉게 부풀 때까지 그는 손가락으로 칸을 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작에 맞춰서 칸이 하이드의 수컷을 아래위로 쓸었다. 하이드의 허리에 걸쳐진 다리가 미끄러지려고 할 때마다 하이드가 엉덩이와 허벅지의 경계를 꽉 움켜쥐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는 듯한 그의 의지 같았다. 

칸의 목에서 소록소록 솟아오른 땀을 혀로 핥으며 하이드의 허리가 거세게 흔들렸다. 칸의 손이 아니라 그의 안에 몸을 뭍은 듯했다.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손가락을 자를 듯 조여오는 그곳에 두 번째의 손가락을 비집듯이 집어 넣자, 그에 반응하듯 칸이 손을 조여와 강하게 하이드의 수컷을 조여왔다. 

질척이는 소리, 신음, 벌거벗은 육체가 마주 비벼지는 음향이 한데 어우러져 한층 흥분을 고조시켰다. 칸의 몸을, 정신을 지배하던 하이드가 목덜미에서 턱으로 혀를 이동시켰다. 도드라진 턱 선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의 허리는 질주를 하듯 칸을 몰아붙였다. 두 팔 안에 칸이 있었다. 하이드의 팔과 다리, 그리고 그의 가슴 안에서 바르작거리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칸. 칸. 칸!

"......!"

"......!"

절정의 신음을 뱉어내기가 무섭게 둘은 서로의 입을 탐했다.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이드가 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다시 입안으로 침입을 시도했다. 잇몸을 쓴다던가, 입안의 얉은 점막을 다정하게 애무하는 동작은 없이 오로지 먹어버리겠다는 듯, 칸의 혀를 옮아매고 빨아들이는 것에 온 힘을 다 쏟았다. 따끔한 아픔마저 느껴지는 키스가 계속 이어졌고, 늘어진 칸의 몸이 벽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릴 때까지 하이드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 뿜어내지 못한 욕망이 칸의 손에서 부피를 더해가며 분출의 시간을 꿈꾸고 있었다. 바닥에 엉덩이가 닿을 그 순간에 하이드는 요령 좋게 세번째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이드의 팔 전부를 먹어 치울 듯 탐욕스러운 그곳이 하이드의 전신을 꽉 조이는 듯 했다. 좌우로 벌려진 칸의 다리에 허리를 밀어 붙이고 하이드가 끝내지 못한 욕망을 호소하며 칸의 손에 몸을 맡겼다. 거친 숨을 연방 귓가에 토해내며 하이드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칸의 몸 안에서 꼼지락 거리며 여린 내벽을 두드리던 손가락들이 쫙 펴지며 칸을 자극했고, 하이드의 것이 하얀색 액체를 뿜어냈다. 오랜 기간 참은 인내의 끝에 느껴지는 해방감의 산물이 칸의 배에, 가슴에 그리고 얼굴에 떨어졌다. 힘찬 분출의 결과물들이 그들이 지금 같이 있고 같은 공간에 있으며 같이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아, 하아, 하아... 칸..."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이드가 칸의 그곳에서 손을 뺐다. 어느새 촉촉하게 그리고 하이드를 받아들이기 알맞을 정도로 젖어있는 그곳이 못내 자랑스럽다는 듯, 하이드의 눈엔 열망이 어렸다. 한번의 분출로 잦아든 흥분이지만, 칸의 몸에 더 가깝게 붙어 있기 위해서 하이드가 다리를 들어 칸의 몸을 감싸 앉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을 타고 냉기가 전해졌지만, 그것은 그들의 열기를 식히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칸의 가슴과 목에서 흘러내리는 투명한 물방울이 하얀 액체와 만나 스르륵 흘러내리며 빈틈없이 붙어있는 그들의 허리아래를 적셨다. 

"칸. 칸."

아직도 여운이 젖어있는 하이드가 칸의 귓가에 애잔하게 이름을 불렀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간절하게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부르자, 칸이 나직하게 '하이드.'하고 답을 해준다. 어느 때보다 만족스럽고 사랑스러운 연인의 태도에 하이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지옥인지 천국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얼굴에 뭍은 액체가 무엇인지 확인을 하듯, 칸이 손으로 그것을 쓸어냈다. 옅은 잔상을 남기는 그것은 한 여름에 눈을 멀게 하는 빛의 잔상처럼 칸의 얼굴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붉고 도톰하게 부푼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고, 붉어진 눈가엔 예쁜 홍조가 어려있었다. 손바닥과 손끝에 뭍은 잔여물을 무심하게 내려다 보는 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단아해 보였지만, 어찌 보면 무척이나 퇴폐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마주친 시선에 칸의 눈가가 곱게 접혔다. 하이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 눈웃음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기도 전에, 칸의 입 속에서 장미보다 붉고, 실크보다 부드러운 혀가 나왔다. 키스를 하듯, 혀로 하이드의 전신을 애무하듯, 칸이 손에 뭍은 유백색의 액체를 천천히 핥아나갔다. 

'할짝. 할짝.'

하이드의 목 울대가 크게 아래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간혹 상상을 하고는 했다. 섹스에 있어서 유달리 부끄러움이 많은 칸이 적극적으로 나와준다면 어떨까? 영화에서 나오는 여러 장면들에 칸을 대입시켜 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나체로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 생각만으로 멋지지만 아쉽게도 얼굴만 칸이지, 몸은 그 영화에 나오던 육체파의 여배우였다. 다음으로 떠오른 것이, 바에 나태하게 기대고 앉아 술을 마시며 눈으로 손짓으로 상대를 유혹하는 카사노바. 너무 익숙해 보여서 그것 또한 칸과 어울리지 않았다. 하이드의 상상 속이 칸은 그것보다 더 아름다웠고, 수줍은 듯 하면서, 더 매력적인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몸을 섞은 후의 여운이 남아있는 눈을 감은 칸의 얼굴! 눈물이 살짝 맺혀있는 눈가와 키스를 조르듯 벌어진 입술! 그것이 하이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인 칸의 모습이었고, 만약 칸이 자신을 유혹한다면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 칸..."

손끝에 묻어 있는 액체를 혀로 할짝이며 사로잡은 시선을 끌어당기는 칸이 입술을 올려 미소 지었다. 

"칸!"

아아... 코피가 쏟아질 것 같아. 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짐승이 먹이를 덮치듯 하이드가 칸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극이 지나치다 못해 하이드의 머리는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눈 앞이 까맣게 변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하이드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칸의 입안에 들어있는 손을 잡아 끌었다. 갈증이 몰려들었다. 칸의 노골적인 웃음이 귓가게 맴도는 듯했다. 한쪽 머리에선 그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또, 뭔가에 쒸인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고, 다른 한쪽에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칸이 오늘 작정하고 유혹하는 것이 분명해! 우어어어! 늑대가 무섭도록 울부짖었다. 본능에 충실하고, 그나마 희박한 이성이 칸의 앞에서 와르르르 무너져 내렸다. 집으로 오는 동안 차 안에서 그의 손을 입안에 넣고 굴렸다. 다시 하고 싶어. 먹고 싶어. 느끼고 싶어! 하이드의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펑하고 터질 것처럼 붉게 붉게 달아올랐다.

"하하하."

"......?"

끝내는 참지 못하고,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칸의 손가락을 입에 물로 쪽쪽 빨아들이던 하이드가 칸의 웃음에 고개를 들었다. 젖꼭지를 물고 있는 아이마냥 일견 순진해 보이는 그 모습이 나이에 맞지 않게 무섭도록 어울려서 칸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 칸?"

이번에도 씌인것인가? 의심을 하듯 하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칸인지, 칸의 껍질을 뒤집어쓴 불쾌한 영혼인지를 판가름하게 하겠다는 듯, 하이드가 매섭게 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입안에 든 칸의 손가락을 빼지는 않았다. 

"하이드. 하하하."

"칸? 칸 맞아요?"

"아... 네. 맞아요. 하하하."

칸이 하이드의 입 속에 있는 손가락을 세워 그의 입천장을 쓸어올렸다. 오싹. 쾌감이 전신을 내달리자, 한번의 분출로 잠잠했던 그것이 또다시 불끈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칸이 눈만을 내려 그런 하이드의 분신을 지그시 응시하자, 부끄러움도 모르는 그것이 기쁨에 또다시 부풀어올랐다. 

"왜 웃어요?"

민망한지, 아니면 빼앗긴 손에 대한 불만인지 하이드가 볼을 부풀렸다.

"그냥요. 그냥 웃음이 나왔어요.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다고 할까요? 그런데 하이드가 갑자기 달려드니깐 어쩐지 웃겼어요. 상황역전. 그렇지 않나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칸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아앗! 이제 시작인데 어디 가려고 하는 거에요, 칸! 하이드가 불만을 잔뜩 담아, 일어선 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뺨에 닿는 그의 배와 검은 수풀이 유혹하듯 하이드를 자극했다. 살짝 깨물면 화를 낼까? 그냥 조금 맛을 보면... 칸이 일어서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는 것을 까맣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하이드는 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이를 드러냈다. 조금만 깨물어 볼게요. 아니 깨무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여기 배꼽 옆에 키스마크 하나만 새길게요. 정말이에요, 딱 하나만! 간절한 하이드의 소망이 전해진 것일까? 칸이 웃음을 지우지 않은 표정으로 하이드를 내려다 보았다.

"안돼요."

"칸!"

"안돼요, 하이드. 일어서요. 여기서 마냥 있을 수 많은 없잖아요?"

우와! 거절이 아니다. 그럼 여기선 안되지만 침대에선 괜찮다는 뜻? 시무룩해진 얼굴에 금새 화색이 돌며, 하이드가 칸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막 침대로 칸을 덮쳐 누르려는데 그 틈으로 파란 물체가 휙하고 던져졌다. 뭐라고 묻기도 전에, 가운을 걸친 칸이 방을 빠져나가자, 하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잇! 이게 뭐야? 칸 너무해. 너무해! 투덜거리면서 하이드는 충실하게 칸이 던져준 가운을 입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칸. 그런데 무슨 뜻이에요? 상황역전이라니요?"

"응? 상황역전?"

샤워를 끝내고 식당에서 칸과 장난을 치다 두어 번 타박을 들으면서도 칸의 말에 착실하게 펄펄 끓는 물에 스파게티 면을 넣던 하이드가 물었다. 껍질을 벗긴 토마토를 잘게 저미던 칸이 무슨 소리냐며 반문을 하자, 뚜껑을 덮으면서 하이드가 칸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아까 그랬잖아요. 상황역전. 그래서 웃었다고요. 잊었어요?"

"제가 그랬어요? 흐음..."

칼을 들고 잠시 고민하던 칸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칸. 칸. 여기 눈가에 주름이 늘었어요. 한달 만에 바뀐 연인의 새로운 모습에 하이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분 좋은 두근거림과 그 동안 만나지 못하게 한 칸에 대한 원망에 대한 두근거림이 섞여있었다. 눈가에 깊게 입을 맞추며 하이드는 칸의 말을 기다렸다. 간지러운지 어깨를 움츠리던 칸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 간격만큼 하이드가 따라붙었다. 은근슬쩍 허리를 더듬는 손길에 칸이 매섭게 하이드의 손등을 내리쳤다.

"아얏! 칸! 심술쟁이!"

"심술쟁이라니요, 하이드? 요리하고 있잖아요. 배고프다고 했잖아요?"

"언제요, 제가 언제 그랬어요? 배가 고프다고는 말 안 했어요. 그냥... 고프다고 했지."

"입술 내밀지 말라고 했죠?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요. 나이도 있는데..."

슬쩍 돌리는 말에 하이드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나이도 있는데... 나이도 있는데... 그 뒷말은? 나이도 있는데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습이 싫다는 뜻? 아니면 나이도 있는데 주책 맞게 귀여운 척 한다고 싫다는 뜻? 그것도 아니면... 나이 들은 티가 얼굴에 난다는 뜻? 머리의 뇌세포가 칸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뉴론을 자극했다. 그러나 답을 알고 있는 칸은 파랗게 변했다,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는 흰색 리넨처럼 하얗게 변하는 변화무쌍한 하이드의 변화에 그저 한숨만을 내쉴 뿐이었다.

이대로 놓아두면 당장에 스파나 뷰티살롱으로 달려갈지도 모른다. 그것도 자신을 끌고... 칸은 지나치게 행동이 빠르고 결단이 빠른 연인을 제제하기 위해서 말을 돌렸다.

"아까 차에서 하이드가 한 것을 그대로 흉내 낸 것 뿐이에요."

"네? 아, 뭐라고요?"

"이것 말이에요."

냄비에 다듬은 토마토와 야채, 미리 익힌 새우를 넣고 그 위에 스파게티용 토마토 소스를 넣던 칸이 손가락에 뭍은 소스를 입에 물었다. 칸은 엉덩이에 닿아있는 하이드의 것이 불끈하고 모양을 세우는 것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차 안에서 하이드가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느낀 기분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갈증이 난다고 할까요?"

"갈증이요?"

"음... 그런 것 같아요."

귓가를 물들이며 칸이 살짝 웃었다. 오늘 웬일이야. 이런 식으로 말을 다 해주고. 웽재한 기분에 하이드가 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시 말해줘요. 갈증이요? 저에 대한 갈증? 그만큼 제가 보고 싶었다는 것이죠? 저만큼 칸도 제가 그리웠다는 것이죠?"

"...... ...... 네."

"얼만큼 그리웠어요? 제가 얼마만큼 보고 싶었어요? 응, 칸? 말해봐요. 응?"

하이드가 조르듯이 칸의 등에 이마를 비볐다. 

"무척이나요. 일 때문에 하이드에게 전화를 하지 못한 것이 속상할 만큼. 오늘 약속시간에 늦은 것이 미안하다기 보다는 늦은 시간만큼 당신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늦어진다는 것이 화가 날 만큼. 운전을 하고 있지 않았으면, 하염없이 하이드... 당신을 확인하고 싶을 만큼... 갈증이 났어요."

짙은 원두커피의 향이 감도는 담담한 칸의 고백에 하이드는 주책 맞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여기가 뉴욕의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멋진 레스토랑이나 호텔의 스위트룸이 아니라는 것도, 주변을 꽃으로 장식한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것도, 멋지게 옷을 빼 입고 한껏 멋을 부린 차림새가 아니라는 것도, 그 모든 것이 상관이 없었다. 옆에 칸이 있고, 지금 자신의 팔 안에 그가 있고, 꿈에서도 그리워한 칸의 목소리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조용히 고백하는 그가 중요했다. 칸, 칸. 나의 연인. 나의 사랑. 아아, 칸. 

"어쩜 말을 해도 이렇게 멋지게 할까요, 나의 칸은. 감동했어요.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그 어떠한 말보다, 당신의 한마디가 절 숨쉬게 해요, 칸. 당신을 보지 못하는 그 기간은 기억에 없어요. 칸이 없는 시간, 칸이 없는 공간. 그것은 무의미해서 생각도 나지 않는 걸요? 당신이 불러줄 때까지 봄을 기다리는 씨앗처럼 한껏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이고, 팔로 몸을 감싸 안고 기다려요. 그러면 당신이 '하이드' 하고 절 부를 테니까요. 당신이 부르면 그제야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아, 내가 숨을 쉬고 있구나. 당신을 향해서 뻗어가는 팔을 보면 그제야 내가 팔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느껴요. 당신을 향해서 걸어가는 두 다리가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요. 저의 전부에요, 칸은. 이 심장은 당신을 만났을 때에만 쿵쿵하고 뛰어요. 이 눈은 오로지 당신만을 담고 있어요. 제 입은 칸, 당신이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존재해요. 제 귀는 당신의 달콤한 신음을 듣기 위해서 만들어졌어요. 제 팔은 당신을 끌어안기 위해서 움직이고, 제 다리는 당신을 향해 가기 위해서 움직여요. 들려요? 제 몸 속을 돌고 있는 피가 외치는 소리가. 제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말이 들려요?"

칸이 몸을 돌려 하이드를 끌어안았다. 

"들려요. 저도 그런걸요."

"칸?"

옆을 더듬던 하이드가 비워있는 자리에 잘게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커튼이 쳐진 창 너머로 밝은 햇살이 비쳤다. 침대부터, 갈색 사이드테이블, 18세기 베네치아 풍의 유리창틀부터, 메일어 (Aristide Maillol, 1861-1944)의 지중해 (Mediterranee, 1905)를 모티브로 한 흰색 뒤셰스 브리제 (Duchesse Brisee,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을 위한 휴식용 의자), 그 옆의 오리 주둥이 모양의 다리가 달린 테이블. 하다못해 침대 맞은 편의 벽에 걸린 그림. 모든 것이 눈에 익은 칸의 방이다, 여기는.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 이어진 사랑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고 감미로웠다. 보통 때라면 이성을 잃고 칸이 기절할 때까지 몰아붙였겠지만, 하이드는 그러지를 않았다. 칸이 조심스레 들려준 그의 마음 한 자락이 가슴을 꽉 채우고 있어서 하이드의 날아가려는 이성을 붙잡아 주었다. 그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나서의 달콤함을 맛보았다. 아직도 남아있는 칸의 체취에 하이드는 나른한 숨을 뱉어냈다. 팔에, 입술에 그리고 가슴에 칸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칸?"

다시 그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다.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있던 하이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역시... 어제 하고 싶은 만큼 했으면, 지금쯤 여기에 칸이 누워있을 텐데..."

같이 눈을 뜨는 아침을 맞지 못한 것이 못내 속상한 사람치고는 그 분위기는 자못 살벌했다. 무엇이 그의 관심을 끌게 만든 것인가? 그것은 늘 하이드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자신의 품속보다 우선순위 되는 그것이 무엇일까? 왜 그는 먼저 일어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일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없다. 

"못 만났던 동안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역시... 이러니 같이 살아야 돼. 그래야지 옆에서 칸이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그림을 수정하는지 알 수 있잖아. 휴... 사립탐정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겠군."

하이드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침대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를 신고, 가운을 걸쳤다. 문을 열고 나가자 여러 화가들의 목탄 스케치가 걸려있는 좁은 복도가 나왔고, 그 복도의 정면과 양 좌우엔 문이 각기 하나씩 있다. 정면에 보이는 문은 거실로 통하는 것이고, 오른쪽의 약간은 작지만 돌고래가 양각으로 조각된 너도밤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욕실로 통하는 문이다. 왼쪽은 올리브 바구니를 머리에 짊어진 그리스 여인을 조각한 갈색 문은 옷을 넣어두는 드레스 룸이었다. 

"칸?"

거실로 향하는 문을 열고 나오자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칸의 목소리였다. 작업실에 있는 건가? 일은 끝났다고 했는데... 약간은 불만이 섞인 투덜거림이 하이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일이 끝났으면 쉬어야지, 뭐 때문에 다시 작업실에 가는 거에요, 칸." 

천국의 문이라고 칭했던 피렌체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Santa Maria del Fior)의 기르베티(Lorenzo Ghiberti, 1378 - 1455)의 작품을 본뜬 커다란 두 개의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기르베티의 작품이 성서를 배경으로 한 십여개의 부조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 문은 6개의 부조 형식의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칸의 할아버지가 이 집을 그에게 선물했을 때 직접 이탈리아 테라모 (Teramo)의 오래된 성당에서 이 문을 가져왔다고 했다. 역시, 그의 할아버지답다고 할까? 칸이 이 집에 대한 애착에는 분명 이 문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칸의 목소리가 좀더 분명해졌고, 그와 더불어 가녀린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공기를 진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스며들듯한 그 목소리에 하이드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하는 말은 뚜렷하게 들리진 않았다. 그저 조금은 웅얼거리는 듯한 어찌 보면 노인의 중얼거림 같은 그 목소리는 분명 그것이 분명했다. 칸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하이드는 희미하지만 그것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혼자 있을 때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칸의 곁에 그것들이 있으면 들렸다. 신기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무서운 일이었지만 하이드에겐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들리기만 하지 그 의미를 모르는 것에 화가 났을 뿐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들의 모습이 칸이 복원을 위해서 가져오는 그림 속의 모습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하이드는 당장에 칸의 일을 일일이 확인했을 것이다. 그래서 칸이 인물화에 관한 일을 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헤럴과 크리스티 측에 압력을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진 않지만, 들리는 목소리의 분위기로 하이드는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저것들이 칸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그를 얼마나 원하며 할 수만 있다면 끌고 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인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그곳의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우아했다. 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질 만큼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그런 그녀가 칸에게 애달프게 매달렸다. 

저것들은... 저 쓸데없는 것들은 칸의 연인이 자신이라는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은 늘 칸을 유혹한다. 그러니 하이드는 답답했다. 이를 부드득 갈 정도로 저것들이 싫었다. 인간이라면 자신의 외모에 넋이 빠져 감히 칸에게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연인이 있는 사람에 대한 상식 때문에 설혹 칸에게 마음이 있더라도 작업을 걸지도 않는다. 하지만 저것들은 상황이 달랐다. 저들은 하이드의 외모에 빠지지도 않았고, 그를 경계하지도 않으면서 인간적인 예의라는 것을 몰랐다.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칸을 유혹하려는 거야? 귀를 뾰족 세웠지만 그 목소리의 의미는 끝내 하이드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뜻을 알 수 있다면...! 당분간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제 헤럴과 만난 것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일이 끝났으니 상황보고를 하기 위해서 만났을 것이라고 하이드는 애써 불안을 지웠다. 그러니 지금 칸과 같이 있는 그림은 분명 이번에 칸이 구입한 것이리라. 집에 가면 칸이 산 그림의 경로와 이전 소유주에 대해 조사한 사립탐정의 보고서가 있을 것이다. 

하이드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꽉 여며진 가운을 느슨하게 조였다. 이를 세워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혈색이 돌게 만들고, 볼도 살짝 꼬집어서 핑크빛이 돌게 만들었다. 그림 따위에 질 순 없지! 

"칸? 칸. 여기서 뭐 하는 거에요?"

"아, 앗! 하이드!"

당황한 듯 칸이 급히 등을 돌렸다. 그리곤 손에 들린 흰색 리넨을 들어 그림을 가리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하이드가 다가선 것이 더 빨랐다. 

"...... ...아...... 아름... 아름다운 여자네요."

붉은 색 튀르쿠아즈 (turquoise)에 몸을 눕힌 여인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황금빛 피부는 매끄러웠고, 만지면 분이라도 묻을 것처럼 뽀얀 광택을 자랑했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하얀 터번으로 꼭꼭 동여매어진 머리엔 커다란 사파이어가 고정되어 있었다. 홍조를 그리는 분홍빛 뺨과 금새라도 말을 할 것 같은 도톰한 입술... 그녀의 시선은 도발적으로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동공조차 보이지 않는 까만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슴처럼 길고, 부드러운 목엔 다이아몬드로 테두리를 두른 8개의 사파이어가 금실로 나란히 엮은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은 손바닥 안에 전부 감싸일 것처럼 소담스러웠고, 탄력적인 형태를 그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그 가슴의 중앙엔 입술보다 더 붉은 유두가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입에 머금었다가 놓았다는 듯 그것은 남자를 자극하는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허리가 완만한 구릉지를 형성하듯 흐르듯이 그려져 있고, 현대의 빈약한 여성들과는 다른 풍요로운 배가 펼쳐져 있었다. 은밀한 상상을 부추기듯 배와 허벅지 사이는 부채에 가려져 있었다. 통통한 손에 들린 공작새의 꼬리로 만들어진 부채가 약한 바람에도 파르르 떨릴 듯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힘을 주어 잡으면 손자국이 남을 것 같은 허벅지와 둥글게 튀어나온 무릎. 털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끈한 다리와 장밋빛으로 물들은 발톱까지.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유혹하기 위해서 태아 났다는 듯,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눈으로 하이드를 비웃는 듯했다. 하이드의 다리기 휘청거렸다. 없애야 한다. 이 그림을 칸의 곁에 두어서는 안 된다. 위험신호가 머릿속에서 급하게 울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그의 곁에 있으면 칸의 마음이 변할지도 몰라! 그가... 날 떠날지도 몰라! 지금까지 어떻게 지켜온 사람인데. 날아드는 날파리를 쫓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이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손이 자연스레 앞으로 뻗어 그림에 닿았다. 

'찢어버릴 거야!' 

그림이 잘게 떨리며 비명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귀를 기울어야지 들리는 그 소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담고 있었다. 하이드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사 천을 고정하는 나무의 일부가 부서지는 소리가 실내에 울리자, 칸이 하이드의 손을 잡았다.

"하이드! 뭐 하는 겁니까? 그 손 놔요!"

칸이 급하게 하이드의 손을 떼어내고 하이드가 잡았던 부분을 살폈다.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굽혀서 자세하게 들여다 보던 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중얼거림이 하이드의 귀에 꼽히듯이 들려왔다. '다행이야. 아름다운 몸이 상하지 않아서. 쉬... 괜찮아. 울지마.' 그 목소리는 다정했다. 하이드에게 하듯이 칸은 그렇게 그림을 달래고 있었다. 비명이 잦아들어가고 칸의 눈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릴 때까지 하이드는 그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보여져야 할 미소를 짓고 있는 칸이 낯설었다. 그리고 묻어두었던 불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칸을 만나지 못하는 기간 동안 그는 무엇을 하며 지낼까? 칸의 그 미소는 정말 자신의 것일까?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진실일까? 혹시 칸은 자신에 대한 마음만큼 저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칸을 만나고 나서는 그의 마음을 얻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사귀고 나서는 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 두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그 최선이 하이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칸의 마음이 의심되었다. 그리고 그 의심에 불을 붙인 것은 칸의 미소였다. 일년 열두 달 중 하이드가 가진 것은 단 육 개월뿐이다. 나머지 시간은 저것들이 가지고 있다. 그 징글징글하고 지겨운 저것들과 칸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 싫어. 나누고 싶지 않아!

"칸... 칸..."

"네."

숙이던 무릎을 피며, 칸이 조심스런 손길로 드러난 오달리스크의 몸에 리넨천을 덮었다.

"저 그림 뭐에요?"

"...... 하하..."

난감한지 칸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 구입한 건가요?"

"...... 그건 아니에요."

"그럼 뭐에요, 저것은. 구입한 것이 아니라, 선물 받은 것이라면... 저것을 집에 둘 것이라면... 두지 말아요. 아주 기분 나쁜 그림이네요. 추잡하게 옷을 벗고 유혹하는 꼴이라니. 끔찍해요. 역겨워요."

단단하게 굳은 하이드가 욕을 하듯 내뱉자 칸이 당황한 듯 허둥지둥 하이드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오래 둘 것은 아니에요. 부탁 받은 것이어서... 오늘 하루면 충분한 일인걸요? 오전 중에 잠시 보다가, 오후에 보낼 겁니다. 하이드, 신경쓰지 말아요."

칸이 사정을 하듯 하이드의 팔을 붙잡았다. 부탁 받은 것? 하이드의 눈썹이 삐죽 솟으며 칸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에요? 이제 당분간 일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분명 약속했잖아요. 제 곁에 있을 것이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으면서... 나보다 저게 더 중요해요?' 

서러웠다. 칸은 자신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다는 사실에 서러움이 솟아 올랐다. 하이드의 파란 눈이 일렁이며 이슬을 머금기 시작하자, 당황한 칸이 급히 하이드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니에요. 하이드. 저에겐 하이드가 더 중요해요. 알잖아요. 헤럴이... 정말 어쩔 수 없이 급한 일이어서 저에게 부탁한 것뿐이에요. 빨리 끝낼게요. 약속할게요. 이번 일만 끝내고 나면 한동안 일은 받지 않을 겁니다."

다급한 칸의 말에 끝내 하이드가 눈물을 흘려 보냈다.

"거짓말쟁이. 칸. 칸은 거짓말쟁이네요. 전에도 그랬잖아요. 이번 일만 끝나면 멀리 여행을 가자고. 그래 놓고 '말도 안돼. 이 역사적인 그림이, 이 아름다운 그림이! 이건 신에 대한 모독이야!' 라고 말하며 일을 맡았잖아요. 그 후에도 이제 일은 안 한다고 약속하고는 또 일은 맡았어요.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라고. 이번 년도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해 놓고... 칸은 정말 절 사랑하는 것이 맞아요?"

"하이드..."

"의심하는 것은 아니에요. 칸은 절 사랑하는 것이 맞겠죠.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사랑하는 것이 칸이 여유가 있고, 시간이 있을 때만 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슬퍼요. 당신의 첫 번째는 그림이죠. 저 따위 그림이 당신의 첫 번째. 두 번째는 칸의 가족이고, 세 번째는 칸의 친구들이겠죠? 전... 4번째에요? 아니면 다섯 번째? 저의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칸인데. 순서를 매길 수 있는 모든 것에 있어서 우선순위는 당신인데... 당신은... 그게 아니군요."

"아니에요. 하이드!"

칸이 급하게 부정을 말을 했다.

"거짓말쟁이. 말로는 늘 내가 중요하다. 사랑한다. 말을 하면서 늘 일에만 매달리잖아요. 절 사랑한다면 일보다 제가 우선시되어야 되지 않나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잖아요. 저 보다 그림이 더 아름답다고 칸의 눈은 말하는 걸요. 저 보다... 일이 중요하다고 행동하고."

맑은 눈물이 섬세한 하이드의 속눈썹에 매달려 반짝거렸다. 칸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적은 없다. 일을 하면서도 하이드를 생각했다. 일은... 일은 해야만 하는 일이다. 강제성을 가진 것이 복원이라는 것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다해 전념하는 것은 하이드였다. 그가 이렇게 오해를 하다니. 칸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어떻게 행동했으면 그가 이렇게 불안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것일까?

"하이드, 아니에요.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입니다."

칸이 주먹을 쥐며 당당하게 하이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칸의 검은 눈이 하이드에게 영혼의 조각마저 모두 받치겠다는 듯, 물러서지 않고 그를 직시한다. 부끄러움은 모두 떨쳐버린 사내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입술이 단호하게 벌어지며 하이드를 사로잡았다.

"일에 대한 것 때문에 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이드, 당신이 희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싫다면 이 일을 거절하겠습니다. 제가... 일에 매달리는 것이 싫다면 그만두겠어요. 당신이 중요해요. 제 우선순위가 일이라고요? 아니에요.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전 하이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하이드를 사랑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떼를 쓰던 모습이나, 화를 내는 모습, 투정을 부리는 모습. 그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어요."

하이드의 귓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창백하게 질린 그이 뺨에 복사꽃 같은 홍조가 어렸다.

"정말... 이에요? 정말로... 제가 중요해요? 진짜... 제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겁니까?"

"네. 당신에게 약속했잖아요. 헤럴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맡았던 일입니다. 헤럴이 저에게 실망하든, 그와의 관계가 악화되든 그것은 상관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하이드, 당신의 마음이니깐요. 미안해요. 계속 이 말만 하게 되네요. 당신이... 당신이 알면 싫어할 줄 뻔히 알면서 일을 맡은 것이니깐... 반나절 밖에 걸리지 않은 일이니깐, 당신이 잠든 사이에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칸이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연인에 대한 태도보다는 대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하는 듯한 정중한 모습에 하이드의 얼굴에 얼굴과 몸에 열이 치솟았다. 화가 났다. 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왜 원망한다는 투로 이야기 했을까? 칸에게 상처를 입혔다. 

하이드는 그것을 알았다.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데 얼마나 귀중한 사람인데, 한 순간의 질투에 눈이 멀어 어린아이처럼 칸에게 투정을 부리고 그를 상처 입히다니... 하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이 너무 부끄럽고 속상했다. 좋은 모습,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해도 부족한데 왜 이리 어리석게 굴은 것일까? 

대답이 없는 하이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칸은 여전히 숙이고 있는 허리를 들지 않았다. 

"아니에요, 칸. 제가...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하이드가 칸을 바로 세우며 그를 끌어안았다. 

"단지 욕심이 났을 뿐이에요. 투정을 부린 것뿐이에요. 정말이에요. 미안해할 것 없어요."

당신이 절 혼자 내버려두는 시간이 길어서 그런 것뿐이에요. 마지막 말을 간신히 삼키며 하이드가 미소를 지었다. 밝고 화사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다시 한번 칸이 자신에게 반하기를 간절히 빌면서 하이드는 웃었다. 

'아아... 잘난 애인을 둔 내 탓이야.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걸까?' 

하이드는 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질투로 일그러졌을 추한 얼굴을 숨겼다. 

칸이 조금만 못생겼다면, 아니 하다 못해 직업이 없었다면, 조금 더 욕심을 내서 그의 비범한 능력이 없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그가 일이 생길 때마다 몇 개월씩 만나지 못해 아쉬움과 두려움에 울지 않아도 될 텐데. 언제나 칸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을 수 있을 텐데... 다시금 고개를 드는 독점욕에 하이드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되지도 않는 욕심 따윈 버려. 여기에서 만족해야 돼. 더 욕심부리면 칸이 싫어 할거야!

"투정을 부려도 괜찮아요, 하이드. 화를 내어도...... 제가 감정에 둔한 편이라 그렇게라도 기분을 알려주지 않으면 잘 모르거든요. 가끔...... 하이드가 씁쓸하게 웃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딘가 참는듯한 모습을 볼 때마다, 여기가 따끔거려요. 제가 잘못한 것이 있는데, 그저 참고 넘기려는 듯이 보여서요. 더 보여줘요. 더 알려줘요."

전율이 일었다. 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억울하고 서글프며 때로는 섭섭함을 느끼게 했던 잔재 물들을 씻어 내리고 있었다. 정말 그래도 되요? 욕심을 부려도 되요? 하이드의 푸른 눈동자가 물어보듯 칸을 응시했다. 

'쪽'

칸이 하이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자상하게 웃었다.

"당신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요. 싫은 모습이라도 알고 싶고, 화를 내는 모습도 보고 싶어요. 이상한가요?"

"아니요, 전혀. 전... 칸이 싫어 할까 봐... 그게 늘 두려웠어요. 좋은 모습을 보여줘도 부족한데, 그런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하이드가 말을 더듬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기분 좋은 혼란스러움이었다. 

'칸이 이만큼 날 생각한다. 그가 이만큼 날 사랑한다.' 

뿌듯하게 들어차는 환희가 하이드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난폭해지려는 욕망을 칸은 부드럽게 감싸 안고 조용히 달랬다. 

"저도 그래요. 하이드에게 멋진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렇지만 때로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이기적이고 욕심도 많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것이 제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하이드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우리들에 대해서. 가장 올바른 길은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이래서 하나보다 둘이 어려운가 봐요."

다시금 칸이 하이드의 입술에 깃털 같은 입맞춤을 남겼다. 불에 데인 듯 입술이 화끈거렸다. 이럴 때면 하이드는 실감하게 된다. 칸의 나이가 자신보다 많다는 것을. 그가 살아온 삶이 결코 평탄치 많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얼마나 진지한 사람인 것을. 칸을 사랑하게 된 것은 역시 운명이었는가 봐. 이렇게 멋지고 아름답고, 그리고 자상한 사람이 자신의 연인이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하이드의 가슴에 맑은 물이 고이듯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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