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alisque
"헤럴. 말이 틀리잖아요. 분명 계약했을 때에는 알프레드 시슬레 (Alfred Sisley, 1839 -1899)의 '이국이 배가 있는 테이블 (1898)'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달리스크 (Odalisque)라니. 그것도 갑자기. 도저히 무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 저편의 헤럴의 우는듯한 음성이 들렸다.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번 경매는 끝장이다. 이러다가는 해고될지도 모른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도와달라. 기타 등등.
"하아......"
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도 급한가 보다. 아쉬운 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안하고 만다는 주의의 헤럴이 이렇게 사정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보통 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 맡은 시슬레의 '이국의 배가 있는 테이블'은 풍경화를 주로 그리던 그가 19세기 말엽에 그린 몇 안 되는 정물화 중에 하나다. 하얀 대리석 테이블에 중국풍의 도자기가 올려져 있고, 그 위에 동양식 배가 6개 이리저리 배치되어 있는 이 정물은 말년에 상하이에 여행을 갔던 시슬레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가 잘되어 있어서 어디 한군데 손볼 때가 없는 그림이었지만, 작년 그림의 소유주인 에르만 씨가 부부싸움을 하다 시슬레의 그림을 떨어뜨렸고, 깨진 유리조각으로 뒤덮인 캔버스 위에서 탭 댄스를 춘 것은 그의 부인이었다.
차라리 액자만 깨져서 캔버스의 모서리가 상한 것이라면 일은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림은 부분적으로 구멍이 났고, 두껍게 칠해진 물감 위에 유리에 의한 상흔이 남아버렸다. 이 일을 헤럴을 통해서 의례 받았을 때, 칸은 그 사실을 몰랐다. 단지 최대한 빠르게-에르만 씨가 제시한 날짜는 1개월 이었다.- 그림을 원상 복귀시켜 달라는 주문과 상자에 들어있는 그림을 받았을 뿐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렸다. 하이드와 사귄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고, 그것을 헤럴이 듣게 된 이후로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칸에게 해소했다. 잘난 애인을 둔 덕택에 이 고생이라니. 날카롭게 잘려진 아사 천은 둘째치고 라도, 모든 작업을 현미경 아래에서 미세 붓을 손에 쥐고 하는 일은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 작업이었다. 칸은 피곤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너도 어디 한번 당해봐라.'라는 심정으로 무시하고 싶지만, 그러다가는 다음에 또 일이 들어올 때 어떤 보복이 있을지 무섭기도 하다. 거기다 헤럴이 이렇게 통 사정을 하는데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알았어요, 헤럴. 우선 그림을 보고 결정하겠어요."
칸은 벽에 걸린 시계가 4시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했다.
"제가 6시에 약속이 있어요. 그러니... 음... 차가 조금 막히긴 하겠지만 지금 출발하면 4시 반쯤엔 그곳에 도착할겁니다. 그림을 확인하고, 할 수 있는 일이면 할겁니다. 혹시 제가 거절할 수도 있으니, 다른 복원가에게도 연락을 넣어봐요. 네. 네. 알았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한 숨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 있을 크리스티의 정식 팜플렛에는 앵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 - 1867)의 '부채를 든 오달리스크 (La odalisque tenant un ventilateur, 1814)'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칸을 응시하고 있었다. 앵그르의 유명한 오달리스크 시리즈 중 '그랑 오달리스크 (La grand Odalisque)'와 같은 해에 제작된 '부채를 든 오달리스크'는 전작이 인체의 불균등한 인체비례로 인해 세간에 선을 보였을 당시에 혹평을 들은 것에 반하여 완벽한 인체의 아름다움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덕택이랄까,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도 전에 '부채를 든 오달리스크'는 프랑스의 부유한 귀족이 오랜 시간 소장을 했다.
"오달리스크란 말이지... 오달리스크. 오달리스크."
칸은 수염이 돋은 거친 턱을 쓸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렸을 때는 그녀의 요염한 매력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었다. 커서는 다시 한번쯤은 만나지 않을까 갈망했던 오달리스크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이번 일의 긴박성 때문에 하이드를 장시간 방치해둔 것이 걱정이라면 걱정이랄까? 거의 만나지 못했고 일에 치여 전화도 일주일에 서너 번 한 것이 다였다.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전화기 너머의 하이드의 목소리엔 기운이 없었다. 그것이 세 번째 주였다. 마지막 주에 들어섰을 때에는 하이드는 거의 화를 내듯이 따졌다. '내가 중요해요, 그림이 중요해요!' 그런 하이드를 달래고 달래면서 칸은 약속을 했다. '당분간 일을 맞지 않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하이드.' 그렇게 굳게 약속을 했고, 하이드와 오늘 저녁을 약속했다.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연인에게 또 다시 일 때문에 일주일을 그냥 보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구겨지며 파란 눈동자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상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야. 그냥 가서 보기만 하고, 조언 할 수 있는 것이면 하자. 일을 맡으면 안돼! 절대로 안돼, 칸!"
칸은 힘차게 기합을 넣고 외출 준비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시간은 7시 23분. 벌써 1시간 23분이나 초과했다. 뉴욕의 교통체증을 알면서도 지하철을 탈 수 없었던 자신의 체질에 칸은 화가 났다. 쓸데 없는 체질!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을까? 하이드와 마지막 통화를 한 것은 5시 22분이었다. 괜찮다며 천천히 오라고 했지만, 그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헤럴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 칸은 일을 맞기로 했다. 헤럴은 칸에게 일을 맞기면서도 정식경매일까지 복원을 끝마칠 수 있을지 반신반의 하는 눈치였다. '최대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엄숙하게 말을 했지만, 칸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헤럴의 걱정과는 달리, 이 일은 서너 시간 정도면 충분히 해결할 만한 것이다. 내일아침까지 그림을 집으로 배달해주겠다는 헤럴의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왔을 때는 5시 30분.
여기에서 약속된 식당까지는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던 것이 실수였다. 앞에서 사고가 났는지, Throgs neck bridge에 진입을 하기도 전에 차가 막혔다.
"차라리 Brooklyn Bridge로 가는 것인데..."
칸은 핸들을 몇 번이나 내리치려는 팔을 움켜잡았는지 모른다. 시간은 계속 가고, 마음은 초조하고... 급하게 나온다고 핸드폰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헤럴에게 부탁해 6시 이후에 하이드에게 전화를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예감이라고 할까? 칸은 막연히 약속시간에 늦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 늦음이 10분 20분 정도였지 지금처럼 1시간 23분, 아니 28분은 아니다.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피워 물은 담배가 벌써 8개피를 넘기고 있었다.
"옷과 몸에 니코틴냄새에 배이겠군. 하아..."
핸들에 머리를 기댄 칸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내일 만날 것을... 헤럴이 아무리 급하게 사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내일 만날걸..."
칸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한 달간 하이드에게 제대로 신경쓰지 못했다. 전화도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다. 칸은 자신에게 연인으로서의 점수를 매겨보았지만 그 점수가 너무나도 끔찍해서 눈을 감고 말았다. 데이트도 잘 못하고, 멀리 여행을 가기로 약속을 해도 어기기가 빈번하다. 하다 못해 만나더라도 변변찮은 말재주 때문에 대화를 하기 보다는 주로 하이드의 말을 듣는 편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감정표현이 서툴러서 그의 열기 어린 고백에도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한다. 그런다고 자상하거나 세심하게 하이드를 신경 써주는 것도 아니다. 어느 한가지에 집중을 하게 되면 다른 것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간혹 하이드는 그것이 불만스럽다며 조그맣게 속삭이기도 했다. 그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해주었기에 지금의 칸과 하이드가 있은 것이 아닐까?
"마지 노선도 오늘로 끝이군. 하이드가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어. 정말이지..."
이런 칸이지만, 그는 하이드와의 약속은 꼭 지키려고 노력했다. 사소한 약속이라도 늦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그가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는 일은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귀면서 칸이 부득이한 경우로 시간을 어긴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아마 하이드도 그것을 알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불만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참고 넘어간 것은 칸이 하이드에 대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깨져버렸다.
슬슬 정체가 풀리기 시작하는 도로를 보며 엑셀레이터에 발을 올린 칸은 복잡한 마음을 억눌렀다. 불안하게 흔들리면 틈이 생긴다. 그 틈조차 마음껏 음미할 수 없는 자신의 불행한 체질이 오늘따라 더욱 원망스럽다.
막 레스토랑 근처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왔을 때였다. 얼굴에 검게 번진 마스카라 자국의 젊은 여자 두 명이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급히 문을 열고 나서는 것이 보였다. 상당히 세련된 옷차림의 그녀들의 곁에는 유니폼을 입은 나이 지긋한 남자가 따라 붙어 연방 사과를 하며 따라 나왔다. 그때 칸의 귀에 그녀들의 입에서 나온 '미셀러니' 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응? 미셀러니? 하이드를 말하는 것인가?"
칸은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와 밝은 갈색 머리카락의 미녀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잘 못 들었겠지."
문을 열고 들어선 레스토랑은 조용했다. 좋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의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던 피아니스트는 의자에 앉아 그저 주위의 눈치를 볼 뿐이었고, 서빙을 하는 웨이트레스들 역시 어느 한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모아진 끝에 앉아있는 것은 하이드였다.
"하이드..."
목이 막혔는지 자갈을 입에 물은 듯한 부정확한 발음이 칸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팔짱을 끼고 테이블을 노려보던 하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위의 식어있는 음식들만큼 하이드의 얼굴 역시 차갑게 얼어있었다.
"하이드. 미안해요.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칸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
하이드는 말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칸은 당황했다. 정말 화가 났는가 보다. 보통 난 것이 아니라, 단단히 화가 났는가 보다. 칸은 더럭 겁이 났다.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있기를 몇 분. 지배인의 은근한 눈초리에 밖으로 나왔을 때 하이드는 칸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몇 미터 남짓이지만, 그의 굳은 얼굴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다가와 칸은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하이드에게 다가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기운에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아니, 시간이 흘러서 더욱 농익어 가는 과일처럼 그의 아름다움은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깨에 닿을 듯 말듯하게 길렀던 붉은 금발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금으로 실을 짠 것처럼 하이드의 머리카락은 눈이 부셨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한결 부드러워진 눈매와 아직도 풍성함을 자랑하는 섬세한 속눈썹. 그 안에 자리잡은 짙은 사파이어 블루의 눈동자는 그 어떠한 보석보다도 고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매끈한 콧날과 대리석보다 흰 피부, 석류 같은 붉은 입술은 선정적인 색이다. 곧게 세워진 허리와 늘씬한 팔 다리. 섬세한 손과 우수가 어린듯한 목. 따로 떼어놓고 보더라도 신의 작품마냥 아름다웠고, 이것을 모두 합쳐서 만들어진 하이드 미셀러니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부터 운전하던 사람들까지 속도를 늦추거나 잠시 그 자리에서 서서 하이드의 모습을 쳐다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대담하게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기도 했다.
평소라면 이런 것이 싫어서, 거리로 잘 나오지 않는 하이드가 말 없이 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짙어질수록 칸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검은 구름이 의지를 가지듯 길게 팔을 뻗어 서서히 하이드를 감싸고 있었다. 사람들의 몸에서 뻗어 나온 옅은 기운들은 강한 흐름을 형성해서 하이드를 숨긴다. 알고 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신이 알고 있는 미사어구를 모두 통틀어도 이 사람을 찬양하는데 부족한지를... 그래서 얼마나 스스로가 초라해지는지... 칸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칸이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괜찮아요. 그냥... 그냥... 이것저것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걱정이 되었던 것뿐이에요. 그리고...... 조금 화가 나기도 했고요. 헤럴이 전화를 하더군요. 당신이 조금 늦을 것이라고요."
하이드는 잠시 말을 끊고 칸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가 그들의 사이에 놓여있어, 하이드는 주먹을 질끈 쥐었다. 달려가서 칸의 팔을 잡아 끌어 품에 안고 싶었다.
지독한 향수냄새를 풍기는 여자들이 귀찮게 달라붙으면서 자신에게 동석을 요구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그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무시하듯 맞은 편 의자에-칸이 앉을 의자에-앉자 하이드의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아니 나빠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불쾌하고 더럽고, 귀찮으며 짜증이 났다. 칸이 앉을 의자였다. 자신의 앞 자리뿐만 아니라, 옆, 뒤. 이 모든 곳간은 칸을 위해 마련되고 준비된 공간이지 그들의 것이 아니다.
볼썽사납게 속옷을 보이며 뒤로 넘어지든 말든지 상관없이 얼굴가득 미소를 띄우는 그녀의 의자를 발로 걷어찬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지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얼굴 가득 난감함을 드러내는 매니저에게 의자를 바꿔줄것을 요구하며 화가난듯 숨을 몰아쉬는 그녀들에게 단지 몇마디를 했을 뿐이다.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을 뿐인데, 곧이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옷을 잡아 끌었다.
뺨을 때렸던가? 아니면 걷어찼던가? 하이드로서는 오랜만에 느껴본 불쾌감이었다. 타인의 체온은 싫다. 단순히 싫은 정도를 넘어서 바퀴벌레보다 더 끔찍하고 부패된 시체보다 더럽다고 하이드는 느꼈다. 그 뿐이었다. 좀 전의 끔찍했던 경험에 인상을 찌푸렸던 것일까? 다가오던 칸이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와요! 어서! 달려가서 당신을 끌어안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전에 절 품에 안고 달래줘요.'
멀게만 느껴지는 칸의 모습에 하이드의 등뒤로 잊었던 불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혹시라도 저기에 서 있는 사람이 칸이 아닌 것은 아닌지, 비웃으며 보았던 할리우드 영화처럼 그의 영혼만이 이곳에 와서 저렇게 서있는 것은 아닌지... 등등의 있어서도 안 되고,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서 안 되는 끔찍한 상상들이 다시금 하이드를 괴롭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마나 무서운 상상을 했는지 칸은 꿈에도 모를 거다. 칸이 핸드폰을 놓고 와서 자신이 대신 전화해 주는 것이라며 말하는 헤럴의 목소리엔 기쁨이 어려 있었다. 마치 선심을 쓰듯, 오늘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라도 된다는 듯이 헤럴은 멋있는 저녁을 보내라고 말했다. 그것이 기분 나빴다. 왜 칸은 헤럴을 만난 것일까? 일 때문이라도 헤럴과 만나는 것은 싫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에 의해서 칸의 상황을 전해 듣는 것이 불쾌하다. 칸에 대한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했고,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이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포기가 안 되는 것이 있는 법이다.
생전 약속에 늦은 적이 없는 칸이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 헤럴에게 다시 전화를 했지만, 그는 받지를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혹시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닐까? 불길한 생각이 하이드를 잠식 했었다.
'지금 나는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칸은 무슨 사고라도 나서 병원에 실려간 것이라면 어쩌지? 교통사고라면? 혹시라도 총기 난사 사고라면? 강도는? 비행기가 추락해서 칸이 타던 차를 덮친 것이라면?'
말도 되지 않은 망상이 끊임없이 하이드를 괴롭혔다.
'5분만... 5분만 더 기다리자. 그래도 그가 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자. 아니, 인근 병원에 연락을 넣는 것이 더 빠를지도...'
5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확신으로 변해갈 때쯤에 칸이 왔다. 그때의 안도감이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안전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칸이 볼을 붉게 물들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했을 때 하이드는 목이 메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와서 다행이에요. 당신이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걱정했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질지도 모른다. 여기가 밖이라는 것을 잊고 칸의 머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출지도 모른다.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힘껏 껴안을 지도 모른다.
앞서나가려는 몸을 힘주어 누르고, 하이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칸이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에게 사랑 받는 것만으로도 부족한데, 미움이라니! 왜 늦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온 것이 중요했고,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스런 미소가 슬그머니 피어 올랐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칸. 늦었어도 왔잖아요?"
하이드가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여유 있는 모습과는 틀리게 하이드는 내심 초조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와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것을 하이드는 무척이나 싫어했다. 멀리 있을 때에나, 칸이 바쁠 때엔 어쩔 수 없지만,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이상은 칸은 하이드의 품에 있어야 했다. 칸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이드는 더럭 겁이 났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막 입을 떼려는 찰라, 칸이 성큼 다가와 하이드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칸?"
칸! 정말 칸이에요? 이럴 수가! 오오... 세상에. 칸이 먼저 다가와서 끌어안다니, 그것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거리에서? 횡재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하이드의 얼굴에 행복에 겨운 미소가 번졌다. 방금 전까지 그를 잠식하던 무서운 악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곳엔 영원히 지속된 행복하고 따뜻한 천국이 펼쳐졌다.
이 부끄럼 많은 사람이 정말 미안했는가 보다. 이런 일을 다하는 것을 보니. 하이드는 칸의 등에 팔을 두르며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칸, 미안해서 그러는 것이에요?"
"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제가 거리와 시간 계산을 잘못했어요.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늦어버렸어요. 그것도... 이렇게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칸."
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하이드가 한껏 숨을 몰아셨다. 그의 체취가 맡아지자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팔에 힘을 주어 칸의 몸을 더욱 꽉 끌어안고, 드러난 칸의 목에 입술을 비비자, 그가 긴장했는지 등이 굳었다. 아아, 칸. 어쩜 이렇게 귀여워요? 이렇게 나오면 당장 먹어버리고 싶잖아요. 이런 서비스가 있다면, 종종 늦어도 괜찮아요, 칸.
하이드가 짓 굳은 미소를 띄우며 칸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배가 조금 고프긴 했지만, 식욕보다는 칸을 안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때에서야 하이드는 칸이 아직 저녁을 먹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칸, 저녁은요? 아직이죠?"
"네."
"어쩌죠? 이 시간이면 대부분의 레스토랑은 문을 닫을 시간인데..."
주위를 둘러보던 하이드가 고개를 숙여 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집에서 먹을까요? 가는 길에 와인도 사고, 치즈도 사고, 이것저것 장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랜만에... ...... 먹고 싶어요."
열이 오른 칸의 귓불을 살짝 깨물며 하이드가 다시 속삭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알죠? 지금 이 자리에서 먹고 싶을 정도로... ......고파요."
"하하하... ...... 배가 많이 고픈가 보군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칸이 하이드에게서 몸을 뗐다.
"음... 글쎄요. 배가 고픈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하이드가 눈을 살짝 내리 깔았다. 풍성한 금빛을 두른 파란 눈동자에 드러난 갈망에 칸은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았다. 잊고 있었다. 하이드가 얼마나 정열적인지를... 그는 지금 배가 고프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고프다고 말하고 있었다. 주위에 분홍색 하트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환상에 칸은 억지로 입가를 올렸다.
"하하하... 저는 배가 고프네요. 어디서 식사라도 하죠?"
"음... 밖에서 먹기는 그렇고...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이 칸의 집이죠? 아니, 우리 집! 칸과 저의 집. 집에 가서 먹어요."
'아니 그러니깐 뭘 먹자는 건데? 응? 밥을 먹자는 거죠, 하이드? 응?'
칸은 정확하게 문장의 주어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굳게 잡힌 팔을 빼내기가 못내 아쉬워, 그 말을 삼켰다. 한 달이었다. 그 동안은 칸에게도 조금은 괴로운 시간이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하이드는 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지 않은 왼손을 손에 쥐고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손바닥을 꾹꾹 누르던 하이드가 은근슬쩍 칸의 눈치를 살폈다. 핸들 바로 옆에 기어가 있는 칸의 차는 운전을 하기에 편리했다. 주차를 하기 전까진 기어를 드라이브에 놓고 운전을 하면 되었기에 하이드는 마음껏 칸의 손을 만졌다. 칸은 그것이 만지는 것이 아니라 떡을 주무르는 듯하다고 느꼈다. 옆에서 느껴지는 하이드의 시선에도 칸은 모르는 척 앞만을 응시했다. 이 정열적인 사내가 차 안에서 덮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다사다난 한 연애기간이었다. 끝을 모르는 하이드의 정열에 침대에 붙어있기를 여러 날, 칸은 가감이 그에게 야외로 드라이브를 가자고 제의했었다. 연애초기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는 정녕코 몰랐다. 물론 그런 환상은 칸 역시 가지고 있었다. 연인과 차 안에서의 달콤한 사랑. 그런 환상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 뿐이지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칸은 빠르게 깨달았다.
지칠 줄 모르는 정열적인 연인은 칸을 시트에 눕히고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었다. 완전히 누운 것이 아니라, 반쯤 누운듯한 자세에서 하이드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다. 지금까지 자극되지 않은 부분까지 속속들이 하이드에게 건들여지고, 허공에 뜨인 다리가 차의 천정과 유리에 부딪치며 야릇한 결합의 소리와 맞물렸다. 좁기 때문에 둘의 몸은 한치의 틈도 없이 붙어 있게 되었다. 서로의 체취가 빠져나가지 않고 좁은 차 안에 가득 맴돌자, 그것이 하이드를 더욱더 정열적이게 만들었다. 쉽게 떨어져 나가주지도 않으면서, 어렵게 매달리지도 않는다. 칸의 허벅지가 경련이 일 때까지 안고, 또 안고, 열심히 안고... 지쳐서 거진 기절을 할 때가 되어선, 하이드가 가감이 칸을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놓고, 다시 움직였다.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칸. 칸."
"네?"
"배 많이 고파요?"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일까? 칸은 신호대기에 멈춰선 앞의 차를 바라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촉촉하게 젖은 눈가가 붉게 일렁거렸다. 갈증에 입이 타는지, 하이드가 연방 입술을 혀로 축이며 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는 연인이 야속한지, 하이드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이가 들어도 저런 것이 어울리다니.... 칸은 애매한 미소를 띠울 뿐이다.
"응? 배가 많이 고파요? 못 참을 만큼? 응?"
연신 칸의 대답을 기다리며 재촉하던 하이드가 칸의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읏!"
낮은 신음이 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입에 물은 손가락을 '쪽' 소리가 나게 빨던 하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칸. 대답을 해줘요."
애원하듯 칭얼거리는 하이드의 목소리는 한 없이 달콤했다. 칸은 핸들을 꽉 쥐고 침을 삼켰다. 입을 열었다가는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다.
그런 칸의 반응에 하이드가 화사하게 웃으며 칸의 손가락을 다시 입에 물었다. 이를 세워 손가락 첫 번째 마디를 깨물다가, 혀를 굴려 손톱과 손가락 사이의 좁은 틈을 재치 있게 자극한다. 입술을 개화하기 전의 장미 봉우리마냥 오므렸다가,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의 경계부분까지 쏙 집어 넣고 다시 쪽쪽 소리가 나게 빨아들이자, 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이래도 배가 고프냐고 말할 것이냐며, 하이드가 은근히 혀를 세워 다시 칸의 손가락 끝을 힘주어 깨물자, 끝내 그가 백기를 들었다.
"집에 빨리 가야겠네요. 잘못하다가는 사고를 낼 수도 있겠습니다."
잡힌 손을 빼며 칸이 말하자, 하이드가 활짝 웃었다.
"어서 가요. 참기 힘들어요. 너무... 고파서요."
이번에도 칸은 현명하게 주어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달짝지근한 하이드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고, 칸은 악셀레이터에 힘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