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24)

  

  

  수현은 인턴사원들의 마케팅 기획서를 다시 체크하고 있었다. 한 번 돌려주고 다시 받은 거라서 그나마 좀 괜찮아졌다. 고민을 한 흔적들이 보인다는 것에 만족하고 수현은 절차상 틀린 부분만 빨간 볼펜으로 체크했다. 그리고 마지막 기획서를 펴드는 순간, 안에서 작은 종이쪽지가 떨어졌다. 

  

  

  “뭐야, 이건. 누군데 사람보고 오라가라야.”

  

  

  12시에 옥상? 이게 미쳤나… 뭘 폭로한다는 거지. 기획서에 꽂아서 보낸 거 보면 이 쪽지의 주인공은 당연히 인턴 중에 한 명일 것이다. 그것도… 3조. 수현은 찜찜한 기분에 인상까지 다 썼다. 

  

  

  “진짜 찝찝하네, 대체 뭐야 이거.”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보자고 하는 거긴 할 텐데… 수현은 예전의 그 끔찍했던 경험을 떠올리곤 찜찜하다 못해 짜증까지 났다. 그래도 이번엔 전혀 틈을 안 줬으니 그건 아닐 거고. 책상에 엎드려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수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획서를 챙겨들고 인턴들이 있을 회의실로 향했다.

  

  

  “분명 뭔가 눈치가 다른 놈이 있을 거야.”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인턴들 사이에 휑한 정적이 흘렀다. 수현은 흠흠 목을 가다듬고 서서 조장들에게 기획서를 다시 되돌려주었다. 

  

  

  “절차상 틀린 부분한 체크해두었습니다.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수현은 좌중을 죽 둘러보았다. 요즘 애들 왜 이렇게 얼굴 숨기는 것도 잘하는 건데! 쪽지까지 넣어 남겼을 정도면 하기야 굉장히 대담한 거긴 하지만… 수현은 기획서를 넘겨보고 있는 3조 조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른 조원들이 저 서류철에 쪽지를 끼워 넣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저 조장 모르게. 만약 조원이 했다면 조장은 당연히 알았겠지. 쪽지는 바로 제일 앞 장 위에 올려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한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 쪽지를 쓴 당사자만이 알고 있다는 뜻이고 그건 3조 조장이 쪽지를 쓴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근데, 대체 왜?

  

  

  “기획서 마지막 마무리 하세요. 오후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흠― 회의실을 빠져나와 휴게실로 향한 수현은 가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살면서 뭔가 폭로 당할 짓을 하고 살았던가. 수현은 곧 그 물음에 자답할 수 있었다. 역시 성취향이지, 그리고 지금은 이사님이랑 연애중이고. 그걸 폭로하겠다고 하면― 하지만 뭔가 얻고 싶은 게 있다면 이사님한테 가는 게 더 빠를 텐데. 애가 머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단 직원인 나를 찔러서 뭐하겠다는 거야. 그리고 성취향이라고 하기엔 최근 몇 년간은 클럽이며 바에 간 적도 없다고.

  

  

  “이수현 씨, 뭐합니까?”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좀…”

  “나쁜 짓?”

  “예.”

  “나쁜 짓은 어제 했지.”

  “뭘요?”

  “어제가 아니라 그제라고 해야 하나.”

  “그건 놀라서…!”

  “아직도 턱이 아프네.”

  

  

  그건 정당방위였거든요? 기겁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수현은 억울했다. 자신이 이사님의 턱을 차버린 건, 이사님이 제 아래를 덥석덥석 물었기 때문이었다.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제 바지를 벗기고 축 늘어져 힘도 들어가지 않은 걸 물었으니 당연히 사람이 놀랐을 수밖에. 번쩍 눈을 뜨고 수현이 한 건 발버둥이었다. 그 와중에 발로 턱을 차버린 거였고.

  

  

  “전 잘못 없어요.”

  “아픈데 말이야.”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뭐… 그건 그렇고 점심 먹으러 갑시다.”

  “예?”

  “12시 다 되어 가는데.”

  

  

  시계를 내려다보고 수현은 잠시 고민했다. 그 쪽지를 무시할 것이냐, 아니면 가볼 것이냐. 무시하기엔 그 ‘폭로’라는 단어가 거슬렸고 가보기엔 또 뭔가 걸리는 게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것 같아 고민됐다. 이사님이 좋긴 하지만 그 사실을 온 천하에 밝힐 생각은 없다. 이미 평범하진 않지만 그래도 평범해 보이는 생활을 영위하고 싶었다. 

  

  

  “전 일이 좀 있어서요. 먼저 드세요.”

  “내가 모르는 이수현 씨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수현 씨 꽤 한가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일이 생겼어요, 이사님.”

  “흠…”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단호한 수현의 어투에 정시우 이사는 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뭔 일이길래 주먹까지 불끈 쥐고 말을 하나 싶었다. 굉장히 이상하고 의심스러운 상황이지만 그거야 나중에 알아내면 되는 거지, 싶어 말을 말았다. 그러다 아차, 잊었던 말을 덧붙였다.

  

  

  “수현 씨, 승진명단에 오른 거 알고 있습니까?”

  “아… 정말요?”

  “내가 설마 가짜를 말해줄까.”

  “이번엔 기대 안 했는데…”

  “워낙 열심히 하니까.”

  

  

  승진 명단에 없으면 힘 좀 써서 넣어주려고 했지만 수현은 제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떡하니 명단에 붙어 있었다. 사실 정시우 이사가 그런 일을 했다면 수현은 굉장히 기분 나빠 했을 것이다. 알면서도 만약 안 됐으면 해줘야지 했는데, 안 하게 되어서 다행스럽기도 하고.

  

  

  “설마 이사님이…”

  “난 건드린 거 없습니다. 알다시피 그건 인사과에서 철저하게 사감 배제하고 스코어 매기는 거라서.”

  “…….”

  “만약 없었으면 넣어 주려고 슬쩍 압박정도는 넣었겠지만 떡하니 붙어 있는데 내가 뭘 더 했겠어. 일을 좀 잘해?”

  

  

  일 잘한다는 말에 수현은 입이 죽 찢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저저 워커홀릭, 마감시즌만 싫고 언제나 일이라면 환영인. 일 잘한다는 말이 무엇보다 더 좋겠지.

  

  

  “일이 있다니까 더 붙잡을 순 없고, 나중에 봅시다. 무슨 일인지 말해주는 거 잊지 말고.”

  

  

  순순히 저를 보내주는 정시우 이사가 좀 의아했지만 수현은 괜히 제 무덤을 파지 않고 바로 옥상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도 수현은 찜찜함을 감추지 못했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에 스스로 놀랄 정도로. 그러니까 그 3조 조장은… 회식 오실 수 있냐고 물었던 그 놈이고, 자기 소개서도 꽤 잘 썼던 거 같고, 눈빛이 좀 부담스러웠던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수현은 그것이 성적인 상대를 보는 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 구분도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가장 가까운 감정을 찾는다면 음… 좋은 선배를 보는 눈빛? 약간의 존경? 그런 거였다.

  

  옥상은 점심시간이라 텅 비어있었다. 수현은 회사 측에서 복지랍시고 만들어 놓은 옥상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햇빛 한 번 뜨겁구나, 유리천장은 정말 있으나마나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다 다시 앞으로 옮겼을 때 수현은 예상했던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그 3조 조장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리님.”

  

  

  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깊게 가라앉은 눈은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야기했다. 음, 그래도 아직 그런 의미는 아냐. 이사님처럼 금방이라도 꼭꼭 씹어 먹고 싶다는 눈은 아니거든. 

  

  

  “전… 대리님이 굉장히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안 깨끗할 것도 없습니다만.”

  

  

  어떤 의미로 깨끗한 거냐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겠지만. 수현은 그래도 지금까지 크게 법을 어겨본 적도 없었고 뭔가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도 하지 않았다. 불쾌감이 온 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저 눈은 뭐야? 상처 받은 듯한 저 눈은? 진짜 미친 거 아냐, 하는 생각도 같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직장상사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는 것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인가요! 친분을 이용해 승진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또 듣고 있었냐, 이 찌질한 놈아, 들으려면 제대로 끝까지 듣던가. 수현은 점점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놈은 어제 회사 주변 고기집에서 저와 이사님을 본 것이 틀림없다. 다른 곳에서 봤을 리는 없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걸 봤다, 둘이 친한 사이 같다, 직상 상사와 부하직원이 그렇게 지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승진까지 시켜줬단 말이지… 그래 그 사고 과정이 이해는 가는데 대체 이렇게 불러내서까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대체 뭐지. 잠깐의 고민 끝에 수현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인턴 직원의 눈동자에 떠 있는 건 배신감이었다. 자, 그럼 무엇을 배신한 것일까. 그것도 금방 답이 나왔다. 배신감이 있으려면 기대가 있어야 한다. 자기 마음대로 기대해놓고 마음대로 실망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보아하니, 이사님과 제 관계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아직 캐치하지 못한 것 같다. 어설프기 그지없다. 척하면 척 알아차려야지. 저 인턴의 머릿속에 남자와 남자의 관계는 쉽게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로 발전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회사 내에서 상사와의 친분은 승진 및 보너스 등등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니 이 사고과정도 이해한다.

  하지만 수현은 매우 불쾌했다. 수현은 일을 잘했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프라이드가 꽤 높았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자신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이룬 성과에 대해 악담하는 건 절대 참지 못했다. 이사님이 제 승진을 도와주었다면 그와의 관계도 재고해 볼만큼.

  

  

  “야.”

  

  

  수현은 싸늘하게 그를 불렀다.

  

  

  “너 진짜 한 번 죽어볼래?”

  

  

  이 새끼가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확 돌변한 수현이 무섭기라도 했던 건지 꽤 덩치가 큰 그는 주춤 뒤로 조금 물러났다. 

  

  

  “내가 승진했는데 뭐가 어째? 내 승진 이사가 시켜준 거면 그 놈도 내 손에 죽어, 알아?”

  “하지만…!”

  “내가 일벌레 소리 들으면서 일하는 사람이야, 내가 열심히 해서 승진하는데 말이 많아!”

  “그래서 더 실망한 거라구요! 얼마나 기대를 많이 했는데 상사랑 시시덕거리는 거나 보고…”

  “직장상사랑 밥도 못 먹냐? 누가 네 마음대로 기대하고 실망하래?”

  

  

  애새끼가 말하는 거 하고는,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저 새끼 진짜… 수현은 이놈의 정신상태가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이거 누나가 아이돌가수 좋아할 때랑 상황이 똑같다. 마음대로 기대한다. ‘우리 OO는 정말 순수하고 착하고 여자도 모르고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아!’ 여기서 사건이 터진다. 스캔들이라든지, 뭐 다른 충격적인 사건. 그리고 이렇게 변한다. ‘저런 썩을 것! 정말 실망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고. 누가 기대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일면만 보고 마음대로 기대하고 또 다른 일면만 보고 실망하고. 오타쿠의 전형이다.

  

  

  “어쨌든,”

  

  

  수현은 어딘가 비틀리게 웃었다.

  

  

  “넌 좀 맞자.”

  

  

  

  

  

  

  

  

  

  

  

  비오는 날이어도 먼지가 났을 텐데 비도 안 오는 해가 쨍쨍한 날이었으니 먼지가 오죽 심하게 날렸을까. 수현의 건방진 인턴 구타 사건은 언제나 그렇듯 아주 빠른 시간 내에 회사 내로 번졌다. 이야기가 여기저기 변질되긴 했지만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줄기인 ‘건방진’이라는 단어는 바뀌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사내 대부분의 직원들은 수현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 피해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인 인턴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가 잘못을 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영리하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만 때렸기 때문에 그 인턴은 겉으로 보면 아주 멀쩡했다. 속은 불긋불긋 난리도 아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수현의 애인이 정시우 이사라는 것이고, 굉장히 영향력 있는 그는 한 순간에 그 사건을 정리해 버렸다. 건방진 인턴이 수현에게 인격모독성 발언을 했고 그와 수현은 아주 약소한 육체적인 충돌―절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충돌이라고 설명했다―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틀린 말은 없다. 충돌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였다는 것이 좀 다를 뿐. 하지만 수현의 손등이 긁힌 것으로 정시우 이사는 충돌이라는 말을 멋들어지게도 만들어냈다.

  

  하지만 수현의 분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자근자근 짓밟아줬어야 했는데, 점심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어도 확실하게 밟아줄 수 있었을 텐데. 수현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시근덕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다 정시우 이사와 이 관계를 이어가도 괜찮은 것인가, 라는 아주 원론적인 문제가 부딪쳐서 고민거리까지 한가득 안고 있었다. 수현은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아주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좋은데 어떡해!”

  

  

  문제는 그거다. 그가 잘못한 일도 아니고, 사실 그 멍청하고 건방지고 싸가지 없는 인턴 놈이 이상한 상상만 안 했어도 절대 없었을 일이니 이깟 걸로 고민하는 것도 좀 웃기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사님은 힘이 있고, 그 힘이 언제 어떻게 쓰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그 힘이 방향을 잃고 사용되었을 때, 이사님은 호의라고 생각한 일이 자신의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힌다면…

  

  

  “그냥 이용해 먹을까.”

  

  

  속물이 되려면 확실하게 되었어야 했는데, 이건 뭐 되다 말아서. 

  

  

  “그런 건 또 싫다고.”

  

  

  이놈의 쓸데없는 결벽성. 수현은 옥상 난간에 머리를 쾅쾅 찧어댔다. 순간 뒤에서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머리 다칩니다.”

  “이 쓸데없는 머리 좀 다쳐도 돼요.”

  “이수현 씨.”

  “이사님은… 제가 해달라는 건 다 해주실 거죠?”

  

  

  수현은 눈에 확 띄진 않지만 윤곽이 좀 더 또렷해진 정시우 이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의 진위를, 그렇게 하면 다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안 하실 거죠?”

  “그것이 정당하다면.”

  

  

  한참동안 정시우 이사의 입술을 응시하던 수현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벌어지지 않은 일 가지고 고민하면 바보 같은 거겠죠?”

  “글쎄.”

  “잘 생각해보세요. 그 대답여하에 따라 제 생각이 휙 이상하게 변해버릴 수 있거든요.”

  “그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면 고민하는 것이 시간낭비일 수 있지.”

  “그럼 그 고민에 따라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도 바보 같은 거겠죠?”

  “…아마도.”

  “아마도가 뭐예요! 아마도가!”

  

  

  마치 혼내는 듯한 수현의 말투에 정시우 이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런 수현은 또 처음이었다. 참 까도 까도 계속 뭐가 나오니, 양파처럼 맵지도 않은 게. 

  

  

  “고민 안 할래요.”

  

  

  수현은 휙휙 손을 저었다. 또 성격이 참 좋은 게 한 번 안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또 쉽게도 잊는다. 그래, 나중에 저런 일 벌어지면 한바탕 하면 되는 거지. 폭발하면 뭐 폭발하는 거고. 그 폭발에 휘말려서 깨지든 뭐든 그건 이사님이 결정한 거라고. 수현은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쉽게 결정지었다. 

  갑자기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수현은 그 바람에 섞인 미미한 땀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저 검은색 긴팔 셔츠를 입은 이사님은 참 덥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가 이 땡볕에 더위를 참으면서 저 때문에 이 옥상에 올라와 있다는 생각도. 내려가자고 한 번쯤 말해볼 만도 한데 꿋꿋하게 참고 있다는 것도. 

  수현은 지금까지 제 고민이 정말 헛짓거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사님은 생각보다 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다. 조금은 느끼하고 능글맞고 야하고 사람 놀리는 것도 좋아하지만.

  

  

  “좋아해요, 이사님.”

  

  

  뜬금없는 공격에 정시우 이사는 생전 처음 지어보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확, 정말 꽃이 피듯 웃는 수현의 얼굴에 같이 웃고 말았다. 바보 같고 마치 자기 자신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은 유쾌하진 않지만 싫지도 않다. 단지 어색할 뿐이다. 

  꽉 팔을 붙잡고 끌어 당겼다. 그리고 키스했다. 부드럽고, 달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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