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4)

  

  

  이것도 몇 번 해보니까 별로 안 떨린다. 처음엔 차라리 회장님 앞에서 말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떨렸는데 이젠 평온한 어조로 말할 수 있다. 수현은 오리엔테이션 설명을 줄줄 막힘없이 해나가면서 부담스럽게 빛나는 눈빛들을 애써 외면했다. 높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발표하는 건 자신이 아랫사람이기에 얻을 수 있는 메리트가 있는데 이런 상황에선 얄짤 없다. 실수 좀 하고 빈틈 좀 보이면 그냥 푹푹 찔러 들어오는 게… 참 요즘 애들은 배려심도 없지.

  인턴사원이라고 해서 그냥 잡일만 시킨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애들도 좀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말 다했지. 작년 여름에 수현은 박 과장과 인턴 과정을 싹 다 뜯어 고쳤다. 그룹을 만들어서 인턴사원들에게 실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 이 연수의 골자였다. 솔직히 그냥 잡일 시키는 게 학생들도 편하고 이쪽도 편하긴 하지만 그건 왠지 허무했다. 

  이번엔 지면과 빌보드 광고를 인턴들에 맡길 예정이었다. TV 쪽은 학생들이 맡기엔 너무 힘든 과제였다. 어차피 인턴사원에게 일을 맡긴다고 해도 그건 부수적일 뿐 절대 주가 되지 않는다. 부서 내에서 다 진행하고 학생들의 프로젝트는 참고할 만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참고하는 수준. 하지만 의외로 머리가 굳지 않은 학생들의 발상은 꽤 좋은 것들이 많아 지난겨울에도 몇 개 따다 쓴 것이 있었다. 

  

  

  “자, 그럼 질문 있습니까?”

  

  

  얇은 책자를 다 설명하고 탁 덮은 수현이 좌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시간도 딱 맞고, 깔끔하게 마무리. 수현은 오후 회의 시간에 늦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수현은 일을 좋아하는 워커홀릭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므로.

  

  

  “저… 대리님?”

  “질문 있습니까?”

  “혹시… 작년에도 연수 담당하셨었나요?”

  “그렇습니다만.”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수현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왠지 숙덕거리는 저 학생들의 대화 내용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서류들을 정리해 들고 일부러 만든 가면 같은 얼굴로 생긋 웃었다. 그를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람이라면 진저리를 치면서 싫어하는. 어떻게 보면 사람 홀리는 웃음이지만 절대로 한 발도 자기 쪽으로 더 오지 못하게 하는 그 웃음. 

  

  

  “오늘은 이걸로 끝입니다. 내일은 이쪽으로 8시 40분까지 출근하세요.”

  

  

  나쁜 것들, 내가 너희들보다 나이가 한두 살 많은 줄 아냐! 빽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수현은 안간힘을 써서 참았다. 지금까지 잘했는데 괜히 막판에 망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낡은 회의실을 빠져나와 수현은 도망치듯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 대리님, 안 늦었네요?”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요.”

  “이사님이 회의 좀 미루자고 하셨는데 안 미뤄도 되겠어요. 이 대리님 회의 참석 못하면 분명 나중에 귀찮게 할 거라고…”

  “귀찮게 하긴 누가!”

  “누구긴 누구야, 일 좋아하는 이수현 씨지.”

  

  

  커다란 손이 머리를 푹 눌렀다. 수현은 흐트러진 머리를 빗어 정리하고 회의실로 들어가는 넓은 등을 얄밉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사실이니 뭐라 할 수도 없다. 회의에 필요한 서류와 책을 챙겨 수현은 종종걸음을 걸어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 시간까지 15분 정도 남은지라 회의 실은 정시우 이사와 수현 둘뿐이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이사님 때문에 우리 부서 실내 기온이 회사 내에서 제일 낮은 거 아세요? 이사님이 맨날 긴팔 입고 오니까 부장님이 에어컨 온도 제일 낮게 맞춰 두신다구요.”

  “반팔이 없어서.”

  “사세요!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사무실은 사람이 있어서 조금 덜 추웠는데 회의실은 좀 너무할 정도로 춥다. 수현은 드러난 팔을 슥슥 문지르면서 정시우 이사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맨날 담요 덮어쓰고 있습니까?”

  “저만 그런 게 아니라 김 주임이나 다른 분들도 그러잖아요.”

  “그럼 수현 씨도 긴팔 입어요.”

  “전 올 때 덥거든요? 자가용으로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 에어컨도 없는데…”

  ‘우쭈쭈쭈 추웠어? 안아줄까?’라고 하려다가 정시우 이사는 간신히 말을 참았다. 불퉁해진 얼굴이 저런 말이 그대로 튀어나올 정도이긴 했지만 애 취급 해봐야 돌아오는 것 중엔 좋은 게 없다. 하지만 얼굴 보자마자 팩 짜증 섞인 소리를 하는 게 뭔가 다른 곳에서 비틀려 온 것 같은데, 정시우 이사는 기민하게 수현의 기분을 알아챘다. 기분이 나쁜지 좋은지와 같은 단순한 것부터 떨리는지, 둥실 떠오르는 거 같은지와 같은 구체적인 것까지도. 물론 그 예상이 틀릴 때도 꽤 많지만 대부분은 들어맞는다.

  

  

  “그러면 아침에 태우러 갈까.”

  “…예?”

  “반팔 입고 오는 게 더워서라며. 한 삼십 분정도 일찍 나오면 충분하겠는데.”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이용하면 이용하는 대로 열심히 휘둘려줄 텐데 안 그러는 게 좋다. 겨우 원나잇 상대였으면서 이것저것 요구하던 인간들만 보다보니 수현 같은 부류는 신기하기도 하고.

  

  

  “음, 싫어?”

  “싫지는 않지만 그런 거 부담스러워요.”

  

  

  부담스럽다라,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엽기도 하지. 정시우 이사는 수현의 턱을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언제 문이 열릴까 싶어 흘끔 문 쪽으로 눈알을 굴리기에 아예 못 보게 고개를 휙 돌려 다시 입술을 댔다.

  

  

  “그쪽에 너무 신경 쓰지 마.”

  “그쪽이요?”

  “인턴.”

  “아아…”

  “확 다 엎어버리는 수가 있어.”

  “엎긴 뭘 엎어요.”

  

  

  감정 관리, 표정 관리 잘 하라고. 정시우 이사는 수현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생긴 만큼만 했으면 좋겠는데 생긴 것보다 더 허술하니 원.  

  

  

  

  

  

  

  

  

  

  

  

  이거 참… 수현은 인턴 프로젝트 그룹들이 내놓은 안건들을 보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총체적 난국이다. 애들이 점점 머리가 굳긴 굳는 건가, 어떻게 가면 갈수록 새로운 발상이란 건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귀찮아서 그런 건지 작년에 선배들이 대충 했던 것들 따라 적어 놓은 것을 보면서 수현은 이놈들이 꽤 괘씸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감 시즌에만 일하기 싫어하는 워커홀릭 수현에게 이런 안이한 마음가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놈들을 그냥…”

  

  

  하지만 마구잡이로 채찍으로 후들겨 팰 순 없지. 수현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당근과 채찍을 언제 어느 때에 써야할지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채찍질을 했다가는 끝까지 분위기가 경직되어서 가니 지금은 살살 달래줘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또 그랬다가 어떤 사태가 날지 모르니… 

  

  

  “이수현 씨.”

  “예?”

  “잠깐 외근 나가야 되는데 같이 나갑시다.”

  “외근이라뇨?”

  “코바코 쪽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비서가 출장을 가서.”

  

  

  핑계가 참 좋기도 하지, 원래 비서 따위 데리고 다니지도 않으면서 이럴 때만 비서타령이다.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속내를 알 것 같았지만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주중에는 둘만 있을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밤에 만나 이런 짓 저런 짓 하기에는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다음 날 회사 일이 좀 걱정 되고, 주말까지 기다리기엔 주중이 심심하고. 아무래도 사내에서 밀회를 즐기기엔 눈이 너무 많다. 막무가내일 것 같은 정시우 이사가 의외로 그런 면에서 배려를 해줘서 수현은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조금 아쉽기도 했다. 사내 연애의 매력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같은 사내 스킨십이 아니겠는가!

  

  

  “이거 정리만 해놓구요.”

  “4시에 약속이니 천천히 해요.”

  “예.”

  

  

  머리카락을 쓰는 손이 꽤 기분 좋았다. 정시우 이사는 가끔 이런 은근한 터치를 했다. 피곤하냐면서 뒷목을 주무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싹 한 번 쓸어 올려주기도 하고. 수현은 커다란 손에 약했기에 그런 스킨십에 노글노글 녹아났다. 막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자리로 돌아가는 정시우 이사의 뒷모습을 좀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다 수현은 나중에 하면 되지,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역시 연애를 하면 이렇게 순간순간 팍팍 튀어버리는 마음이 문제다.

  빨간 볼펜으로 쫙쫙 쓸데없는 내용들을 그어버리고 수현은 서류철을 탁탁 덮어 들었다. 회의실에 들러서 인턴들에게 서류철 던져주고 수정하라고 할 참이었다. 실제로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수현은 어색하게 한 번 웃고 프레젠테이션 스크린 앞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이거 참, 분위기 한 번 오묘하네. 수현은 미간이 못난 주름을 한 번 만들었다가 애써 폈다. 표정 구겨봐야 만들어지는 건 주름뿐이다. 좌중을 쭉 둘러보고 수현은 서류철을 열어 각각 그룹별로 간단한 코멘트를 했다. 그 신랄한 평가에 인턴들은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다. 당황하기도 하고 조금은 억울한 듯하기도 하고, 하지만 수현은 가차 없었다.

  

  

  “3조 분들은 아직 이미지마케팅의 개념도 제대로 못 잡고 계신 거 같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단순한 제품 판매가 아닙니다. 물론 제품 판매가 단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

  

  

  마지막 4조까지 코멘트를 마치고 수현은 서류철을 나눠주었다. 얼떨떨한 얼굴들에게 생긋 기분 좋은 미소를 보여주고 수현은 내일아침까지 코멘트 한 것 반영해서 기획안을 제출하라고 한 뒤 회의실을 나가려고 했다. 누군가의 말이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뭔가 떠밀려 나온 듯한 남자 하나가 수현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오늘 회식이 있는데 대리님도 참석하시나요?”

  

  

  애초에 참석할 생각도 없었거니와 오늘은 금요일이니 분명 이사님이 집에 보내주지도 않을 거다. 주중에도 열심히 덮치려는 기색을 보이는 그를 막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또 오늘은 열심히 달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인턴 직원과 사적인 자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단호하게 말을 끊고 수현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벽에 기대서있던 정시우 이사가 들고 있던 수현의 가방을 건넸다.

  

  

  “비서는 제가 아니라 이사님 같네요.”

  “손끝으로 부려 먹어도 부려 먹혀 주지.”

  “영광인데요.”

  

  

  침대 위에서 부려 먹어주면 더 좋은 텐데. 귓가에 은근슬쩍 속삭이는 소리에 수현은 퍽 정시우 이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음담패설하고는, 정말로 침대 위에서 ‘거기, 거기’ 이런 소리만 하고 손가락 까딱 안 할 테다. 

  주차장에 내려와 차 문을 열다 수현은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화려한 미녀… 예쁜 고양이 같은 얼굴이 점점 다가옴에 수현은 당황했다. 그녀는 수현 쪽으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운전석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현은 정시우 이사에게 휙 고개를 돌렸다. 그는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애 좀 안아 봐, 팔 아파.”

  

  

  수현을 한 번 보고 여자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정시우 이사가 아기를 안아 들었다. 토실토실한 아기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수현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막 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 들어 인상까지 팍 써졌다. 아기가 보고 울먹일 정도로. 정시우 이사는 아기를 달래면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는 여자의 다리를 무릎으로 툭 쳤다. 그녀는 매섭게 정시우 이사를 노려보고 다시 통화에 열중했다. 주차장이라 소리가 울려 수현은 그 통화 내용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음, 침착하자. 아무리 이사님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애 딸린 여자가 있을 리는 없다. 아니 만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럼 이 상황에서 저렇게 당당할 리가 없지. 수현은 애써 상황을 합리화 하면서 중얼중얼 댔다. 그러다 확 신경질이 나서 차에 올라 문을 거세게 닫아버렸다. 아무리 뭐 아니라고 생각을 해도해도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거다. 

  정시우 이사는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난감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그는 정말로 난감하고 또 난감했다. 잘못한 일은 없지만 상황 자체가 황당하지 않은가. 뜬금없이 애 딸린 여자가 와서 턱하니 애를 안기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정시우 이사가 딱히 바로 무슨 말을 하지 않은 건 약간의 심술 때문이었다. 한 주간 인턴사원에게만 신경 쓰는 수현이 그는 조금 섭섭했고, 약간 불안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질투해주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다.

  

  

  “회사 요즘 경영난이니? 요즘 왜 이렇게 바빠, 다들?”

  “애나 안아, 무거우니까.”

  

  

  그래도 얌전하게 품에 안겨있던 아기를 여자의 품에 넘겨주고 정시우 이사는 차문을 열었다. 데이트 가냐는 물음에는 대답 없이 운전석에 올라 쾅 문을 닫았다. 차 시동을 걸고 차를 빼던 정시우 이사는 싸늘하게 굳어져 있는 수현의 얼굴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 떠보는 일은 좋아하지 않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필요하다. 

  수현은 이마를 손끝으로 세게 눌렀다. 먼저 물어볼까, 하지만 또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정말 별 일 아닐 지도 모르고.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꼬치꼬치 캐물어야 하는 건지 수현은 잘 알 수 없었다. 분명 속은 이상하게 들끓는데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해야 할지. 

  

  

  “아기 예쁘던데요.”

  “애 엄마를 닮았거든.”

  

  

  아, 이거 참. 정말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지. 정시우 이사는 콩깍지를 인정하면서도 수현이 제 눈에만 귀여운 것이 아니라는 것에 조금 좌절했다. 저 분을 이기지 못한 표정이라니. 어디 차 세워놓고 온 몸을 물고 빨고 핥아주고 싶은 얼굴이다. 하지만 그건 오늘 밤의 유희로 남겨둬야지.

  

  

  “궁금합니까?”

  “뭐가요?”

  “아까 그 여자 누군지.”

  “…궁금하면 알려주시게요?”

  “궁금한 거 참으면 병 돼.”

  “안 궁금해요.”

  

  

  흥, 수현은 휙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고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이런 거 싫어, 마치 자기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이런 감정은 절대 사절이다. 하지만 원인제공 한 사람은 저렇게 기분 좋은 얼굴인데 왜 피해를 본 사람은 기분이 더러운 건데! 연애하는 사이라고 내내 강조할 때는 언제고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 수가 있는 건데? 수현은 확 꼭지가 도는 기분이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수현은 입을 꾹 다문 채 먼저는 한마디도 안 했다. 말을 붙이면 억지로 마지못해 답을 하는 정도만 하고 내내 뿌루퉁해 있었다. 딱 보아하니 화가 부글부글 나는데 괜히 참고 있는 게 보였다. 

  회의는 간단한 식사와 함께였다. 수현은 여전히 기분 나쁜 기색이 완연했지만 그래도 일을 하는데 있어서 피해를 줄 정도로 분별이 없진 않았다. 단지 시종일관 웃고 있는 정시우 이사의 얼굴을 가끔 가다 노려보았을 뿐. 그런 행동이 정시우 이사의 웃음을 더욱 짙어지게 하는 이유라는 걸 수현은 알 수 없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지금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상황에 맞는 말인지도.

  수현은 여기서 참는 건 정말 병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 정강이를 까주고 싶다는 충동도. 일을 마치고 가게를 빠져나오면서 수현은 확 정시우 이사의 팔을 잡았다. 진짜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건 매너 없는 행동이잖아! 구구절절하게 변명하는 게 더 싫긴 하지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것도 싫다고!

  

  

  “…이사님.”

  

  

  정시우 이사는 수현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함에 즐거워졌다. 하지만 그 즐거움을 티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했다. 그랬다가는 나중에 분명 한소리 더 들을 게 뻔하므로.

  수현은 팔을 붙잡은 채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치졸해보이지 않을까. 이런 게 되게 웃기단 말이지, 당당하게 물어도 되는 건데 대체 왜 못 물을 걸 묻는 것 같이 느껴지냔 말이야. 수현은 빙글거리는 낯빛을 한 정시우 이사를 매섭게―정작 정시우 이사는 전혀 매섭다고 느끼지 않고 있지만―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저 당당한 태도가 문제인 거다. 

  

  

  “저랑 이사님이 뭐하고 있는지 아세요?”

  “음…”

  “모르세요?”

  

  

  이 질문 어딘가 익숙한데. 정시우 이사는 수현이 아플 때 제가 했던 질문을 그대로 답습하는 수현이 귀여웠다. 웃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정시우 이사는 슬슬 올라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제가 웃겨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근데 왜 웃으세요?”

  

  

  더 이상 놀려먹었다가는 달래주지도 못할 것 같아 정시우 이사는 수현을 폭 끌어안고 말았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 수현은 숨이 막히는지 어깨 위로 턱을 올리고 숨을 내뱉었다.

  

  

  “연애 하는 거지, 연애.”

  “근데 왜…”

  

  

  수현은 아까 그 상황을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찜찜하고 기분이 나빴다. 한 번 중간에 쉬면서 숨을 골라야 할 정도로.

  

  

  “애가 성격은 매형을 닮아야 할 텐데.”

  “…매형이요?”

  

  

  뜬금없는 말에 수현은 멍청한 얼굴을 했다. 얼굴은 애 엄마를 닮았다고 했고 성격은 매형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건… 그럼 아까 그 여자는 이사님 누나고 아기는 조카? 

  

  

  “이사님 저랑 아옹다옹 해보실래요?”

  “난 엎치락뒤치락이 더 좋은데.”

  “…집에 갈 거예요.”

  “누구 집.”

  “제 집이요.”

  “이수현 씨, 오늘 금요일입니다?”

  “근데요.”

  “근데요, 라니. 금요일인데 어딜 간다고.”

  “이사님이 화나게 했잖아요.”

  

  

  팔을 쥔 손을 탁탁 떨어뜨리고 수현은 망설임도 없이 돌아섰다. 잡을 틈도 안 줬다. 안도와 함께 울분이 확 더 치밀었다. 씩씩거리면서 걸어가는 수현의 뒤를 정시우 이사는 딱 세 발의 간격을 두고 뒤따랐다. 좀 심했나, 다른 것보다는 마지막에 웃은 것 때문에 더 화가 난 것도 같고. 하지만 그는 그 나름대로 섭섭했다. 수현이 제게 먼저 감정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요 며칠 간은 방치플레이를 연상케 할 정도로 접점이 없었다. 어디서 좀 오붓하게 있을 수 있을까 싶으면 그놈의 애새끼들이 껴들었다. 얼굴보고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곤 점심시간뿐이었지. 

  

  

  “따라오지 마세요!”

  

  

  저벅저벅,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발소리를 견디다 못한 수현이 빽 소리를 질렀다. 큰길은 아니라서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뒤를 휙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였다.

  

  

  “이수현 씨.”

  “…진짜 이런 거 싫어.”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놀림보다 제 감정이 들쑥날쑥하는 게 더 싫었다. 남에게 휘둘리는 것도. 그것이 제 의지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끔찍했다. 수현은 틀어 잡힌 제 팔을 내려 보고 한숨을 쉬었다.

  

  

  “떠보는 거 싫어요. 그리고 팔 놔주세요.”

  “떠본 게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정시우 이사는 떠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사람을 놀리고, 웃고…”

  “미안합니다.”

  

  

  깔끔한 인정에 수현은 입을 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래버리면 지금까지 퉁퉁댄 나는 뭐가 되냐고. 수현은 애꿎은 벽만 툭툭 찼다. 

  

  

  “씨이― 화도 못 내게…”

  “화 풀어줄게.”

  “뭘로 풀어줄 건데요.”

  “뭐든.”

  “그럼 오늘 머슴해요.”

  

  

  그거야 바라는 바지. 

  

  

  “마님이라고 부르면 화낼 거예요.”

  “머슴은 마님이 부리는 건데.”

  “그럼 주인님이라고 불러요.”

  

  

  발가락으로 부려 먹어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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