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4)

  

  

  

  우와씨,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꾸물꾸물 솟아오르는 기억에 수현은 발을 마구 동동 굴렀다. 침대가 좋아서 그런지―옆에서 발 굴러도 도미노가 안 쓰러지는 에X스 침대인가― 옆에 누운 정시우 이사는 미동도 하나 없다. 미쳤지, 내가 미쳤지! 지금까지 뺀 게 민망할 정도다. 원래 침대 위에서 꽤 적극적이기도 하지만 어제는 정말, 무슨 뽕 맞은 것처럼 들떠서 움직이라고 말 안 해도 알아서 열심히도 움직였다. 체력이 별로 없어 금세 철푸덕 넘어간 게 다행이지, 안 그랬다가는 진짜 추태를 다 부릴 뻔 했다. 이사님은 오히려 그런 걸 더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욱신거리는 허리춤을 주무르고 수현은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오랜만이긴 하지만 이사님이 감기라고 좀 봐줘서인지―한 번만 하고 끝났다.― 몸이 마구 아프진 않았다. 정말 땀 빼고 났더니 감기가 나은 듯도 하다. 근육통이 약간, 조금 욱신거리고 불편할 뿐. 욕실에 들어와서 거울로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목덜미에 새빨갛게 난 잇자국이 거슬리긴 했지만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보단 팔뚝에 난 손자국이 더 심하다. 허벅지 안쪽을 들여다보고 수현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생긴 건 절대 남에게 뭐 안 해줄 것처럼 생겨서는 아래를 덥석덥석 물던 정시우 이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흠흠, 목을 가다듬고 수현은 찬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수납장을 마구 뒤져 새 칫솔을 하나 찾아냈다. 치약을 잔뜩 짜서 입에 물고 한참 이를 닦았다. 하얀 거품을 퉤퉤 뱉어 입을 헹구고 제 집 방만한 욕실을 휘 둘러보곤 수현은 욕조 턱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들보들한 수건으로 얼굴을 툭툭 두드려 닦다 수현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진짜 민망해, 못 나가겠어. 이젠 이사님이 능글맞게 굴어도 뭐라고 빼지도 못할 거고.

  배고파, 수현은 배를 슥슥 문지르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침에 눈 떠서 좀 무드 있는 상황이 연출되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잠만 퍼 자는 것도 좀 아니잖아? 적어도 꼭 안고 잘 잤냐고 먼저 말해주는 센스 정도는 있어야 할 거 아냐, 아픈 사람 꼬드겨서 홀랑 삼켰으면.

  옆으로 쓰러지듯 누워 수현은 다시 자는 척 하려고 했다. 이불을 끌어다 덮고 튼실한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음―? 뭔가 다른 열감에 수현은 단단한 정시우 이사의 맨 허리를 툭툭 더듬어보았다. 열나잖아? 

  

  

  “이사님?”

  

  

  우와, 감기 제대로 옮아갔다.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이마는 물론 몸 이곳저곳을 짚어보았다. 쯧쯧, 감기 걸린 사람하고 내내 물고 빨아놓고 옷도 안 입고 자니까 감기가 걸리지. 이불을 확 끌어 올려 온 몸에 다 덮어주고 수현은 해열제를 뒤적거려 찾았다. 그리고 방바닥에서 찾아낸 약을 들고 수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사님―”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어깨를 마구마구 흔들었다. 정시우 이사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가 귀찮은 듯 휙 등을 돌렸다. 으음, 하고 거칠게 울리는 목소리에 수현은 티 나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가 부득불 귀찮다는 사람 어깨를 돌려 얼굴을 마주했다. 

  

  

  “아홉 시도 넘었어요.”

  “…쉬는 날인데 시간이 무슨 상관.”

  “우와, 목소리 다 갔다. 감기 걸리셨나 봐요.”

  

  

  정시우 이사는 쿨럭 크게 기침을 한 번 했다. 흐릿한 눈으로 수현을 올려다보고 그는 아픈 기색도 없는 수현의 얼굴에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파서 그런가 좀 느리네, 수현은 아직 자기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정시우 이사의 눈앞에 손을 몇 번 흔들었다. 

  

  

  “뭡니까.”

  “이사님 감기 걸리신 거 같다구요.”

  “…그런 거 같군요.”

  

  

  흠흠, 목을 몇 번 가다듬어보고 이마를 짚자 식은땀이 묻어나는 손바닥을 정시우 이사는 불만 섞인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수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픈 얼굴보다야 저런 얼굴이 더 낫긴 한데 뭔가 눈이 초롱초롱하게까지 빛나는 게 왠지 불길하다. 

  

  

  “아침은 어떻게 해요?”

  “아주머니가 챙겨두신 게 있을 겁니다.”

  “밥 먹고 약 드시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서랍장에 약 있으니 좀 꺼내 줘요. 물도 한 잔 떠다주면 고맙고.”

  “에이, 빈속에 약 먹으면 속 다 까져요.”

  

  

  이 불안감은 대체 뭘까. 오한이 감기 때문에 드는 건지 아니면 이 불길한 예감 때문에 드는 건지 정시우 이사는 소름이 돋은 팔을 슥슥 쓸었다. 하지만 제 배 위에 털썩 앉아서 걱정스러운―과연.―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수현은 꽤 귀엽고 사랑스럽고. 턱을 살짝 쥐어 당기자 수현은 입술이 아닌 뺨에 정시우 이사의 입술이 닿게 했다. 

  

  

  “감기 다시 옮아오기 싫어요.”

  “너무하네.”

  

  

  몸을 완전히 겹치게 하고 수현은 잠시 눈치를 봤다. 슬쩍 손을 움직여도 별 반응 없는 것까지 확인하고 목덜미를 슬쩍 깨물어 신경까지 분산시켰다. 그리고 헐렁한 하의 안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뭐하는―”

  “이사님 열나시니까… 속옷도 안 입으셨어요?”

  

  

  뭐 나야 좋다만, 흐흐흐, 하는 느끼한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얼굴로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엉덩이를 쥐었다. 

  

  

  “이수현 씨.”

  “예.”

  “아픈 사람 데리고 뭐하려고.”

  “이사님이 그런 말할 군번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픈 사람 데리고 이런 짓 저런 짓 한 건 이사님인데요, 불퉁한 표정을 한 수현의 손끝이 슥, 의미심장한 부분을 훑었다. 움찔, 그런 곳을 건들여져 본 적이 없는 정시우 이사는 영문 모르는 얼굴을 했다. 

  

  

  “좌약 말이에요.”

  “…….”

  “그거 별 거 아니에요. 전 좌약 열 개 합쳐놓은 것 같은 크기도 넣어봤는데 뭐, 괜찮던데요?”

  

  

  내내 짓고 있던 표정의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던 건가, 정시우 이사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수현을 보고 좀 황당해졌다. 지금 좌약 넣을 생각에 저러고 있는 건가. 참 사소 한 거에 행복해하네, 곱게 당해줄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제의 수현처럼 싫다고 버둥대지도 않을 거다. 씨익,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정시우 이사의 얼굴에 수현은 조금 움찔했다. 

  

  

  “넣어 봐요.”

  “…예?”

  “빈속에 약 먹으면 배 아프니까 사놓은 약은 이럴 때 써야지.”

  “정말… 넣어요?”

  “넣어보라니까?”

  

  

  차마 약을 넣지도 바지 안에서 손을 빼지도 못한 채 수현은 우물쭈물 거렸다. 그렇지, 막상 하라 그러면 또 못하지. 하지만 정시우 이사의 생각은 짧았다. 어제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 정도에서 물러났겠지만 수현은 좌약 가지고 놀려대던 정시우 이사의 목소리와 어제 제 몸을 마구 쑤셔댔던 그 커다란 걸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수현은 곧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넣을게요.”

  

  

  해맑다싶을 정도로 함박웃음을 짓고 수현은 그대로 손가락을 진입시켰다. 쑥.

  

  

  

  

  

  

  

  

  

  

  

  “좌약이 효과가 좋네요. 열이 금방 떨어지네.”

  “…….”

  “아직 많이 남았던데 다음에 또 열나면 쓰세요.”

  “…….”

  “다음엔 역할 바꿔 볼까요, 이사님 거기 탄력이 아주…”

  “…….”

  “…그만 할게요.”

  

  

  검은색 오오라가 마구 피어오르는 것 같아 수현은 놀려 먹는 걸 그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좌약은 효과가 좋았고―열도 다 떨어지고 속도 안 거북하고― 많이 남은 것도 사실이고, 탄력도 정말 좋았으니까. 약만 넣으면 되는데 괜히 손가락까지 집어넣은 게 잘못한 거였을까, 속에서 손가락을 한 번 휘저은 게 잘못한 걸까. 자기는 어제 내내 속을 마구 들쑤셨으면서.

  

  

  “이수현 씨.”

  “예?”

  “밥 먹고 뭐할 겁니까?”

  “글쎄요…”

  

  

  집에 가서 대청소나 할까, 수현에게 토요일은 일주일동안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특히 청소를 대대적으로. 청소기를 밀고 걸레로 바닥과 책장 먼지를 훔치는 것까지 한다. 먼지에 조금 예민한 그에게 청소는 꽤 중요한 일이었다.

  

  

  “집에 가서 청소하려구요.”

  “집에 간다고?”

  “예… 뭐 다른 거 할 거 있으세요?”

  “…못 가게 해야겠군.”

  “예?”

  “아무것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정시우 이사는 반쯤 비운 밥그릇을 맹렬하게 비워갔다. 맛깔스러운 반찬들을 하나하나 다 먹어가면서 수현은 미미하게 웃었다. 그냥 있으라고 하면 있을 텐데, 이사님은 은근히 수줍음이 많다. 능글맞을 때는 아주 끝없이 능글맞으면서 또 직접적으로 말하는 건 조금 민망해한다. 

  

  

  “가지 말까요?”

  “…….”

  “뭐… 아님 말구요.”

  “우선 커피 한 잔 마십시다, 그리고…”

  “그리고?”

  “TV 크니까 영화라도 한 편 보든가.”

  “청소해야 되는데요.”

  “아주머니 그쪽으로 보내죠.”

  

  

  다 먹었는지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정시우 이사는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수현이 저렇게 나올 때마다 아주 이상하게 속이 바싹바싹 타는 기분이었다. 갈증이 난달까. 알면서도 그런다는 걸 알지만 얄밉다기보다는 거기에 넘어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수현이 밥공기를 다 비우자 정시우 이사는 반찬 뚜껑을 탁탁 덮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뚜껑을 덮어쓴 유리통들을 식탁 구석에 쌓아놓고 정시우 이사는 어정쩡하게 서있는 수현을 훌쩍 들어 식탁 위에 앉혔다. 헉,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손도 한 번 휘저어보지 못한 채였다. 수현은 감기 걸렸으면서도 참 사람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옮길 수 있을 정도인 정시우 이사의 체력에 감탄했다. 음, 그러고 보면 어제도 참 힘이 좋았지. 

  

  

  “키스 하시려구요?”

  “음…”

  “이도 안 닦았고… 감기 옮기 싫어요.”

  “그럼 키스 말고 다른 거 하지 뭐.”

  “커피 마시고 영화보자고 하셨잖아요.”

  “예정은 바뀌라고 있는 거거든.”

  “전 커피 마시고 싶어요. 그리고 이사님 몸 걱정도 좀 하세요. 아픈 거 눈에 다 보이거든요?”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을 풀고 식탁 위에서 내려온 수현이 커피메이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걸로 커피 내리면 되죠?”

  “…걱정하는 겁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이상한 걸 되묻는다는 듯이 동그랗게 떠진 수현의 눈에 정시우 이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왠지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사실 지금까지의 관계는 자존심 상하지만 이쪽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모양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수현의 말이나 행동을 살짝 되돌려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제가 밀어붙일 때는 억지로 넘어가는 듯 하기도 하고 빼는 듯도 하지만 가만 두면 수현은 관심 가져달라는 고양이처럼 꼬물꼬물 움직여 다가온다. 

  

  

  “이수현 씨.”

  “예?”

  

  

  남의 집인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찬장에서 머그컵 두 개를 꺼내 커피를 따르던 수현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좋아합니까?”

  “…커피요?”

  “모른 척 하지 말고.”

  

  

  대상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저런 진중한 눈빛으로 물어보는 거라면 그것밖에 없겠지. ‘나’ 좋아합니까. 수현은 머그잔을 들고 도망치듯 거실로 걸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건 아주 짧은 시간을 미룰 수 있는 방편일 뿐이었다. 그냥 우물거리면서 넘어가기엔 예전에 집요하게 굴어서 이사님 입에서 좋아한다, 연애하자는 소리까지 하게 만든 것이 생각나 양심이 찔렸다. 하지만 말하는 건 부끄러웠다. 듣는 건 좋지만 막상 하는 건…

  

  

  “난 굉장히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이수현 씨는 어떻습니까?”

  “전…”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정시우 이사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DVD를 플레이 시키자 예쁜 색감의 프랑스 영화가 한 편 시작됐다. 

  

  

  “이 영화 말하는 겁니다.”

  

  

  말하기 힘들어서 소파 위에서 엉덩이까지 들썩거리는 수현이 귀여웠지만 계속 뒀다간 영화 보는 내내 안절부절못할 것 같아 정시우 이사는 제가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첫사랑 하는 소년 같이 아프다고 걱정해준 거 하나에 만족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정말 좋아해요, 많이.” 

  

  

  결정타, 지금까지 부끄러워하던 건 다 연기라도 되는 듯 똑똑히 눈을 보고 하는 말에 정시우 이사는 당했다는 듯 난감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키스하고 싶은데. 키스뿐 아니라 다른 것도 해버리고 싶다. 

  

  

  “키스 말고 뽀뽀만 해요.”

  “…….”

  “아니면 이 닦고 해요.”

  “감기 옮기 싫다면서.”

  “그거야 핑계지, 그런 눈치도 없어요?”

  

  

  쏘아 붙이는 듯한 말투에 정시우 이사는 허어, 하는 허탈한 소리를 냈다. 오냐오냐했더니 이사님한테 눈치도 없냐는 말까지 하냐. 하지만 그것도 화가 나지 않으니 큰일이다. 둘이 있을 때는 이사님 소리 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그런 직위로 보지 않았으면 해서였으니 딱히 할 말도 없다. 꿋꿋하게 이사님이라고 계속 불러서 호칭을 바꾸는 건 거의 포기한 상태긴 하지만.

  

  

  “빨리 이 닦아요, 이사님.”

  

  

  리모컨을 꾹 눌러 DVD를 정지시키고 수현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스하고 싶다구요.”

  

  

  반짝 눈이 마주치고 둘은 욕실로 뛰듯 들어가 칫솔을 물고 전투적으로 이를 닦았다. 사실 이를 닦았다기보다는 치약 맛만 나면 된다는 식이었다. 이를 닦는 중간중간 정시우 이사가 칫솔을 문 채 그놈의 깔끔, 이라면서 타박을 놓자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옆구리를 콱 찔렀다. 

  칫솔을 던져놓고 수현은 저보다 한 뼘 큰 남자의 뺨을 붙잡고 끌어내렸다. 물에 젖은 입술이 뭉개지듯 맞닿았다. 급히 혀를 밀어 넣자 커다란 손이 뒷머리와 허리를 잡아 당겼다. 수현은 살짝 눈을 떠보았다. 키스에 열중한 남자의 얼굴이 새삼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돋움까지 해 키스를 하면서 수현은 감기걱정 따위는 이미 안드로메다로 보낸 지 오래였다. 손에 잡히는 등근육이 황홀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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