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질수록 수현은 점점 몸 상태가 악화됨을 시시각각 느낄 수 있었다. 순간순간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것 같아 꾹 입술을 물고 한참을 가만히 있어야했다. 조금 정신이 차려질만 하면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고 설문지를 넘기고, 또 어질해서 정신을 놓고. 그렇다 보니 수현의 속도는 정시우 이사보다 현저히 느릴 수밖에 없었다. 절반이나 가져가서 했던 걸 다 끝내고 정시우 이사는 남은 수현의 일감에서 또 절반을 가져왔다. 전부 다 가져다놓고 그냥 어디 들어가서 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건 또 저 꼬장꼬장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될까 참았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졌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잔뜩 떠다놓고 마시면서도 수현은 기침을 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문지를 던지듯 책상 위에 놓고 수현은 정시우 이사가 설문지를 정리하고 있는 김 주임 책상 쪽으로 의자를 쭉 밀어 옮겼다.
“…뭡니까?”
“사, 사탕 좀…”
“사탕?”
켈륵, 또 흉곽이 다 들썩거릴 정도로 기침을 해대면서 수현은 김 주임 책상 위의 목캔디 통을 가리켰다. 초록색 뚜껑을 열어 사탕을 하나 꺼낸 정시우 이사는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기침을 하는 수현에게 바로 사탕을 주지 않고 껍질을 쭉 찢었다. 빨리요, 하고 손짓을 하는 수현은 무시하고 그는 제 입 안에 갈색 사탕을 넣었다. 지금 사람이 아픈데 그러고 싶어요?! 수현은 목 아픈 것도 잊고 소리를 지르려다 입이 막혔다. 몰캉한 혀가 단단한 사탕을 쑥 밀어 넣어주었다.
“더 맛있지?”
“감기 옮으세요.”
사탕이… 느끼해. 하지만 수현은 속내를 숨기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사회 생활하면서 늘은 거라곤 이런 것뿐이다.
“보자.”
수현은 이마로 쑥 들어온 손에 조금 놀랐지만 가만 얼굴을 내어주고 있었다. 커다란 손은 뜨끈한 이마를 한 번 짚고, 뺨을 손등으로 쓸고, 사탕이 굴러다니는 볼 안쪽을 꾹 누르기도 했다. 이젠 스스로 자제가 안 되는지 수현의 입술 사이에선 쌕쌕대는 숨이 거칠게 흘러나왔다.
“일 할게요.”
“이수현 씨.”
“예?”
“우선 프로그램 돌리는 것 좀 가르쳐줘 봐요.”
“…왜요?”
“알아두면 좋으니까.”
뭔가 미심쩍은 대답이지만 수현은 SPSS 프로그램을 돌리는 법을 간단하게나마 알려주었다. 어차피 설문 자체가 프로그램을 돌리기 쉽게 구성되어 있고 코딩은 이미 다 해놨기에 어지간한 컴맹이 아니고서야 두어 번 알려주면 쉽게 따라할 수 있다.
“음, 쉽네요.”
“쉬운 거 아니에요. 코딩하는 건 어렵다구요.”
사탕 하나를 먹더니 목이 좀 트인 건지 수현은 말대답도 잘 했다. 자기가 해놓은 게 별 거 아닌 일처럼 치부되는 게 싫다는 그 일욕심이 어째 귀여웠다. 품이 좀 넉넉한 자켓을 걸치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킁, 맹맹하게 막힌 콧소리를 내면서 수현은 다시 설문지에 집중했다.
정시우 이사는 수현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체력도 아닌 정신력을 다 소모하고 이제 그것마저도 끝자락. 끙끙거리는 소리마저 자각 없이 내고 있는 걸 보면 언제 철퍽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잠들면, 뒤에 눕혀놓고 나머지 일은 알아서 끝내줄 생각이었다. 프로그램 돌리는 것도 알고, 이제 설문지도 그럭저럭 다 입력해 가니까. 하지만 문제는 언제 수현이 잠들어 줄까, 였다. 아무래도 악바리 근성이 살아 숨쉬는 수현은 꾸벅꾸벅 잠깐씩 졸면서도 잠들어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시우 이사는 약간의 속임수를 써야겠다고,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에 마음을 먹었다.
“이수현 씨.”
수현은 잠시 졸다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이를 어째, 제 일인데, 도와주는 사람을 옆에 두고 졸고 있다니.
“잠깐 뒤에 가서 눈 붙여요.”
“아니에요. 죄송해요, 이사님.”
“…….”
“죄…”
‘죄송해요.’라고 말해서 죄송하다고 말할 수가 없어 수현은 입조차 아예 열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혼날 줄 알아.”
“죄…”
“…….”
“예…”
“의자 붙여줄 테니까 잠깐 누워서 자요. 한 시간 뒤에 깨울 게요.”
“아니요, 그냥…”
“어허, 참 말 많네. 아픈 사람 신경 쓰이니까 가서 누워요.”
정시우 이사는 수현을 끌어다가 의자에 앉히고 옆 의자를 탁탁 끌어다 붙여주었다. 편안하지는 못해도 누워서 쉴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확보가 되었다. 하지만 수현은 쉽게 누우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일을 놔두고 누워 잠을 잘 수가 있겠냐는 그 반항에 정시우 이사는 그저 어깨를 꽉 누르는 것으로 답했다. 마음은 장사지만 몸은 병자인 수현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 의자와 등을 닿게 할 수밖에 없었다.
“딱 한 시간 뒤에 깨울 테니까, 좀 자.”
“하지만…”
“…….”
“…꼭 깨우셔야 해요.”
“물론.”
깨울 리가 없지, 혼절하듯 잠들어버린 수현의 이마와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져 보고 정시우 이사는 다시 일에 몰두했다. 미국의 대학에서부터 회사까지 날밤 새우는 건 부지기수요, 아침 새벽부터 밤 까지 일하는 것도 익숙한 그에게 이 정도는 껌이었다. 체력이 기본적으로 동양인의 두 배는 되는 서양인들을 따라가기 위해 단련해놓은 것이 이럴 때 제대로 발휘되었다. 팽팽하게 등 근육을 세우고 그는 컴퓨터와 산더미 같은 설문지와 씨름했다.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 즈음, 여름이라 해가 일찍 떠 그는 수현에게 햇빛이 가지 않도록―혹 깨게 되면 안 깨웠다고 난리칠 것 같았다― 블라인드를 쳤다. 밤새도록 한 것이 아깝지 않게 설문지는 이제 100여장밖에 남지 않았다. 두어 시간 정도만 하면 다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양이다. 왠지 모르게 배부른 표정을 한 채 정시우 이사는 마지막 남은 일감을 싹 다 해치워버렸다.
둘 다 월차를 내버릴 생각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오늘 월차를 내면 주말까지 쉴 수 있으니 딱 좋다. 괜히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그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인쇄되어 나오는 날밤 까기의 결과물을 훑어보았다. 실수가 있을 수도 있지만 워낙 설문의 양이 많이 수치 한두 개 틀린 것 가지고는 티도 나지 않는다. 실수가 있다고 해도 지금 와서는 고칠 수도 없고.
아무리 튼튼한 그라도 밤을 완전히 새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닌 듯 온 몸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리저리 몸을 꺾다 정시우 이사는 뒤에서 부스스 일어난 인영이 경악어린 목소리로 시각을 외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 일곱 시??”
“일어났습니까?”
수현은 시계에 대고 삿대질까지 했다. 깨우라고 했는데, 분명히 한 시간 뒤에 깨우라고, 그리고 자기도 깨워주겠다고 했으면서! 수현은 프린터에서 줄줄 나오고 있는 걸 집어보곤 더 경악했다. 저 사람은 대체 뭐지, 수퍼맨인가.
“깨웠는데 안 일어났습니다.”
“거짓말!”
칼칼하게 마른데다가 감기 때문에 붓고 자고 난 여운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는 날카롭게 찢어졌다. 수현은 목을 움켜쥐고 몇 번 쿨럭거렸다. 정시우 이사는 수현이 덮고 자다 바닥에 떨어뜨린 자켓을 들어 툭툭 털었다.
“프린트 다 되면 집에 갑시다.”
“예?”
“월차.”
“아… 쓰긴 써야 할 거 같아요.”
간신히 버티곤 있지만 정말 몸 상태가 엉망이기도 하고, 밤을 새운 상태에서 괜히 버티고 있어봐야 민폐다. 수현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책상 위를 대충 치우기 시작했다.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종이 몇 장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철퍽 주저앉아 설문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건 안 해도 됩니다.”
“정리를 해놓고 가야…”
“김 주임이나 최 과장에게 부탁해 놓죠.”
프린트 된 결과물을 딱 서류첩에 넣어 부장의 자리 위에 던지듯 올려놓고 정시우 이사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저, 이사님.”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수현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런, 정시우 이사는 제게 이런 취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식은땀, 거칠게 긁혀 나오는 목소리,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불끈불끈 흥분하게 생겼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이건 뭐지, 정시우 이사는 가방을 떨어뜨릴 뻔 했다. 왠지 목덜미가 미미하게 달아오른 것 같고 괜히 목이 막혀 흠흠 헛기침을 몇 번이나 했다. 딱 보쌈해가서 물고 빨았으면 소원이 없겠지만 아픈 사람이니까 하루 정도는 몸 보전을 하게하고…
“빨리 갑시다.”
“예, 잠시만…”
“셋 셀 동안 안 일어나면 공주님 안기해서 갈 줄 알아요.”
“예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지.”
수현은 우당탕 소리까지 내가면서 급히 가방과 핸드폰 등을 챙겨 들었다. 공주님 안기라니, 진짜 미쳤나. 정신감정을 의뢰하고 싶을 정도로 황당하긴 했지만 또 저 한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닌 것 같아 무서웠다.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만 집어 책상 위에 던져놓고 수현은 이미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 정시우 이사의 뒤를 따랐다.
“아쉽네.”
“하하…”
아쉽긴 개뿔이.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나서야 수현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구석에 처박혀 몸을 기대고 후욱후욱 뜨거운 숨을 뱉느라 수현은 지하에 도착한 것도 몰랐다.
“어, 엄마야…”
“엄마 아닌데.”
“이사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수현을 어깨에 둘러멘 정시우 이사는 아주 당당하게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물먹은 솜뭉치처럼 늘어진 수현이 위에서 아무리 허우적거려 봤자 내려줄리 만무, 조수석 옆에 탁 발이 바닥에 닿도록 내려주고 정시우 이사는 깔끔하게 차 문을 열었다.
“공주님 안기는 안 했잖아.”
“…….”
“좀 자.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새벽에도 한 시간 뒤에 깨운다고 해놓고는 안 깨웠으면서,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은 참 잘하지. 도와준 건 고맙고, 일 마무리 다 해준 것도 정말 고마운데… 그냥 왠지 얄밉다. 이미 푹 퍼졌으면서 수현은 눈을 부릅뜨려고 온갖 애를 썼다. 하지만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는 요람 속 같고, 눈꺼풀은 천근을 달아놓은 것처럼 그대로 밀려 내려왔다. 그냥 좀 잘까, 뭐 이번엔 안 깨울 리도 없고. 손등으로 눈을 몇 번 부벼보던 수현은 가만 앞을 보면서 핸들만 돌리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곧 까무룩 정신을 잃듯 잠이 들었다.
이상하게 몸이 너무 편한데, 기억의 끝은 자동차 좌석치고는 넓고 쾌적하지만 그래 봐야 조수석 좌석에 지나지 않는 곳이었다.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리지 않은 한은 분명 그랬다. 수현은 이불을 확 들추면서 벌떡 일어나다 다시 띵, 울리는 골을 붙잡고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목소리가 안 나와,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고 목을 가다듬고 나서야 듣기 거북한 쇳소리 같은 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협탁 위에 올려져 있는 디지털시계는 PM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야,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 수현은 광활하게까지 느껴지는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우리 집은 이렇게 안 넓은데, 이불도 이렇게 안 부들부들거리는데, 또 협탁도 이렇게 비싸 보이는 거 아니라고.
그래도 어디 납치되어서 온 건 아니겠지 싶어 수현은 이불을 거두고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작은 틈을 두고 열려있는 문을 살짝 밀자 긴 복도가 보였다. 너무 넓어, 너무! 집은 맞는 건가, 설마 호텔? 방을 빠져나와 문에 번호판이라도 붙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그런 건 붙어 있었던 흔적조차 없다. 매끈하고 무게감 있는 문을 밀어 닫고 수현은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유리문 있는 쪽은 부엌인 거 같고 그럼 여기가 거실인가, 툭 튀어나온 벽 뒤에 몸을 숨기고 수현은 머리만 쏙 내밀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벽걸이 TV에 푹신해 보이는 가죽소파에 검은색의 부드러운 러그까지 깔린 모델하우스 뺨치는 거실에 잠시 넋을 놓았다. 아니, 정말 모델하우스인가, 하지만 약간의 생활감이 보이기도 하는데. 커피테이블 위에 몇 권 놓여있는 책이라든가, 리모컨이라든가, 슬리퍼라든가, 소파 위에 올려진 자켓이라든가, 자켓이라든가, 자… 자켓?
“이건…”
이사님 건데, 그럼 설마 여기가…
“뭐합니까?”
“으악!”
수현은 제 어깨에 툭 떨어지는 뭔가에 정말 기겁을 했다. 파닥거리면서 놀라 난리를 치는 수현 때문에 그의 어깨에 올렸던 턱을 꽤 아프게 얻어맞은 정시우 이사가 수현의 팔을 잡아 눌렀다. 진짜 초식동물도 아니고, 뭘 이렇게 깜짝깜짝 놀라대는지. 퍽 소리가 나게 맞은 턱을 이곳저곳 문질러보는 정시우 이사의 행동에 수현은 잔뜩 긴장했다. 제 어깨가 다 뻐근할 정도니 턱은 얼마나 아플까.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입니까.”
사실… 예. 아프긴 하겠지만 괜찮아 보이세요. 그래도 수현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풀지 않았다. 호― 하고 불어주기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짓까지는 아직 못하겠다. 원래 그렇게 귀염성 있는 성격도 아니고―착각도 가지가지…―.
“여기 이사님 집이에요?”
“그럼.”
“깨운다고 하셨잖아요.”
“깨웠는데 안 일어난 게 누군데.”
또 거짓말! 잠귀가 어두운 편이긴 하지만 좀 잡아 흔들면 잘만 일어난다. 지금이야 좀 아프니까 잘 안 깰 수는 있어도 깨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깨울 수 있는 수준이란 말이다. 억울함 가득한 수현의 얼굴에 정시우 이사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톡 수현의 코끝을 한 번 쳤다.
“말하지 말고 여기 와서 죽이나 좀 먹어요.”
“죽이요?”
“감기 걸렸을 때는 죽 먹어야지. 그리고 입 꼭 다물고. 목소리 다 갈라.”
병원 놀이라도 해보려고 했더니, 수현은 아프다고 해서 골골거리면서 드러눕진 않는 모양이다. 왠지 좀 아쉬워진 정시우 이사는 비서를 시켜 사오게 한 죽이라도 먹이고 보자고 생각했다. 우선 죽 먹이고 약 사온 거 있으니까 그거 먹이고 침대 위에서 음… 토닥토닥이나 해주든가. 아픈 사람 데리고 이 짓 저 짓 하고 싶진 않다. 약 먹고 괜찮아지면 상황 봐서.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요.”
숟가락을 꺼내 수현에게 쥐여 주고 정시우 이사는 수현이 먹는 걸 가만 지켜보았다. 뜨끈뜨끈한 죽을 떠서 꽤 오래 응시하더니 정시우 이사 쪽으로 수현은 휙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죽에 시선 고정.
“왜 그럽니까?”
“…아뇨.”
“뭐 넣었을까봐?”
“…그냥요.”
솔직히 이사님 하는 게 뭔가 잘 먹이고 잘 키워서 확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무섭거든요. 후후, 죽 위를 몇 번 입김을 불어 식히고 수현은 윗부분을 살살 긁어 뜬 죽을 입에 넣었다. 고소하고 단 맛이 나는 죽이 부드럽게 목을 훑고 내려갔다. 하지만 편도 쪽이 많이 붓긴 한 건지 넘길 때마다 따끔따끔했다.
“이사님은 안 드세요?”
“먹었습니다.”
“흠…”
예의상 한 번 물어주고 수현은 열심히 죽을 먹었다. 생각해보니 전날 저녁이랍시고 허술한 백반 하나 먹은 게 다였다. 거의 하루 내내 아무 것도 못 먹었으니 배가 고플 수밖에. 허겁지겁이라는 말이 어울리도록 열심히 먹고 수현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급히 먹어서 반도 다 먹지 않았는데 배가 빵빵하게 불렀다. 그만 먹겠다는 듯 숟가락을 내려놓자 정시우 이사는 몇 번 더 권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수현을 보곤 그릇을 슥 밀어버렸다.
“왜 이쪽으로 데려 오셨어요?”
“내가 피곤해서.”
수현은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건 내 옷이 아닌데,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멍청할 정도다.
“오, 옷은요?”
“내가 갈아입혔는데?”
“왜요?”
“왜긴, 불편해보이니까.”
“피곤하셨다면서요!”
“아무리 피곤해도 옷 갈아입히는 건 충분히 하지.”
얼굴이 붉어지고 목에서는 삑사리가 났다. 어차피 절반 이상 빼놓은 진도라고 해도 민망한 건 민망한 거다.
“저, 그럼 돌아갈…”
“누구 마음대로.”
슬쩍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수현은 그대로 다시 끌어 앉혀졌다. 러그 위에 주저앉아 엉덩이가 아프진 않았지만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앞머리가 슥 걷어 올려지는가 싶더니 콩 이마에 이마가 닿았다. 으앗, 차라리 뽀뽀를 했으면 했지 이런 건… 푸드덕거리는 수현을 꾹 눌러 앉히고 정시우 이사는 이마로 전해지는 열기를 가만 가늠해보았다. 새벽보다는 좀 낫지만 여전히.
그리고 뻣뻣하게 굳어져선 눈만 이리저리 굴리는 수현의 얼굴도 찬찬히 뜯어보았다. 슬금 눈을 옮겼다가 마주치면 휙 다시 피하고 또 슬금 눈을 맞춰오는 게 정말 작은 동물 같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코끝이 닿고, 살짝 얼굴을 비껴 마주하면 입술이 닿을 텐데. 또 키스하려고 하면 이 닦아야 한다고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정시우 이사가 슬쩍 조금 더 다가와 앉자 수현은 엉덩이를 뒤로 슬슬 빼면서 입을 열었다.
“저 이 닦아야… 또 감기 옮아요, 이사님.”
“그럼 뽀뽀만.”
“그것도…”
뽀뽀라니, 그런 귀여운 말 좀 입에 담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수현은 거부하지 못하고 얕게 닿아오는 입술을 맞아야했다. 살짝 쓸 듯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깔끔하게 떨어져 나간 입술이 왠지 아쉬워 입맛을 다시다 수현은 정시우 이사가 건네는 약봉지를 받았다.
“약 먹고 좀 더 자요. 혹시 씻고 싶으면 뜨거운 물로 샤워 하고.”
“이사님, 저 집에…”
“공주님 안기 해서 약 먹을래?”
뭐 이미 한 번 했지만. 차에서 집으로 옮길 때 수현이 기겁을 했던 그 공주님 안기를 이미 했다는 건 경비원과의 둘만의 비밀로 해둔다.
“내일되면 보내 줄 테니 오늘은 여기서 쉬어요.”
알약을 하나하나 삼키느라 숨까지 헐떡거리면서 수현이 고개를 마구 저었지만 이미 게임 오버.
“아프지?”
“…….”
“안 아픈 척 하지만 아프잖아. 그지?”
“…….”
“그러니까 말 들어.”
“…샤워하고 싶어요.”
정시우 이사는 수현을 훌쩍 또 어깨에 둘러멨다. 바동거리는 수현을 내려주고 씻겨 줄까, 하고 물었다가 그는 퍽 온 몸의 무게를 실은 손바닥에 밀려 욕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원놀이나 해야지, 냉수포며 해열제 물약이며 잔뜩 사온 걸 들고 걷는 그의 걸음은 가볍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