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4)

  

  

  아침 회의 시간은 해야 할 일을 분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원래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의 범위가 6개월로 늘어나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일이 추가됨에 수현은 끄적끄적 제가 해야 할 일을 적어보다가 머리가 아파 한참을 한숨만 쉬고 있었다. 수현이 원래부터 해왔던 일은 광고를 통한 반응 서베이와 그를 통한 기업 이미지 포지셔닝 현황을 조사하는 것으로 스스로 해야 하는 일도 많았지만 기업의 조사 기관과의 연결이 매우 중요했다. 조사기관과의 커넥션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중간에 기록이나 수치가 누락되게 되고 그러면 일 망치는 건 정말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추가된 일은 예산 수행의 효율성 정도를 자기평가 하는 것으로 이것도 외주를 준 대행사나 방송광고공사 등과 연계해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외 자잘하게 정리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

  

  

  “전화하는 거 싫은데…”

  

  

  하필이면 돌아오는 일이 다 이런 것들뿐이라니. 펜을 손등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면서 수현은 혼잣말로 웅얼거렸다. 그럼 오늘부터 힘내봅시다, 회의를 마무리 짓는 말에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다시 푹 주저앉았다.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손짓하는 정시우 이사 때문이었다. 괜히 늑장을 부리던 수현의 뒤로 온 정시우 이사가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쪽 입을 맞췄다.

  

  

  “일이 많아?”

  “다 많은 걸요.”

  

  

  힘든 소리를 하기엔 다들 일이 많다. 원래 이맘때는 힘들지 않으면 이상하니까. 작년 하반기도 잘 넘겼으니 이번 상반기도 잘 넘길 수 있을 거다. 물론 작년 하반기보다는 이번 상반기에 한 마케팅이 훨씬 많긴 하지만. 이번엔 기업 이미지 재고를 위해 새로 수립하고 실행한 것들이 한 둘이 아니라서 조사해야 할 것도 작년의 배는 더 될 거다.

  

  

  “이사님도 일이 엄청 많으실 텐데요.”

  “나야 뭐. 서류 올리면 도장만 찍는데.”

  “아닌 거 다 알아요.”

  

  

  일을 얼마나 많이 사서 하는지 수현은 혀를 다 내둘렀다. 게다가 기사도 안 두고 비서도 거의 쓰지 않는다. 비서가 하는 일이라곤 회의 약속 잡은 거 알려주는 정도. 

  

  

  “나가야 할 거 같은데요, 이상하게 볼 지도…”

  “그럼 키스만 하고.”

  “…이사님 키스는 키스가 아니잖아요.”

  “설마 내가 여기서 키스말고 뭘 더 할 것처럼 보입니까?”

  “그… 예.”

  “믿음이 없군요.”

  

  

  호텔에서 키스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사님 키스는 키스가 아니잖아요! 키스라고 해놓고는 온 몸을 다 만지고 삽입만 빼고 다하면서. 수현은 입술을 삐죽이다가 제가 먼저 쪽 입을 먼저 맞추고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베이비 키스!”

  “…….”

  “이것도 키스예요.”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온 수현은 요상한 눈길로 저를 보고 있는 김 주임에게 어설프게 한 번 웃어보였다. 붉어진 얼굴이 미묘한 느낌을 풍겼다. 뺨을 툭툭 두드리면서 제 자리에 앉은 수현이 이마에 빡 힘줄을 새기고 회의실을 나오는 정시우 이사의 눈을 피해 푹 고개를 숙였다.

  

  

  “이 대리님, 이사님이랑 싸우셨어요?”

  “아, 아뇨. 싸우긴요.”

  “근데 왜 이사님이 막 씩씩거리시면서 나오시지.”

  

  

  아마도… 흥분해서? 에이, 베이비키스 정도로 흥분하진 않았을 거고 하고 싶은 만큼 못해서 아쉬운 거겠지 뭐. 슬쩍 파티션 위로 눈을 내밀었다가 수현은 다시 쏙 밑으로 들어왔다. 우와, 아주 그냥 아작아작 씹어 먹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수현이 정시우 이사의 입에 아작아작 씹혀 먹힐 상황은 며칠 동안이나 도래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전부 다 서류뭉치와 컴퓨터 모니터를 붙들고 눈이 벌겋게 될 때까지, 손톱이 깨지도록 키보드를 두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먼저 터지나, 누가 먼저 못 견디고 뛰쳐나가느냐를 다들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 잠시나마 쉴 틈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현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나를 해치우니 하나가 또 밀려들고, 수치 정리를 간신히 다 해서 액셀을 돌리자마자 오류가 생기는 건 대체 뭐… 툭 던지듯 서류를 내려놓고 무거운 돌이 얹어진 듯한 미간을 꽉꽉 문질렀다. 게다가 이곳저곳에 전화를 많이 해대서 머리까지 아팠다. 핸드폰은 뜨끈뜨끈하고 뺨까지도 열기가 옮았다.

  

  

  “점심 먹고 합시다.”

  

  

  아무리 바빠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은 굶지 말자는 신념하에 다들 반쯤 늘어진 채 각자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으로 가는 그 짧은 길을 걷는 것도 싫다고 배달음식을 먹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현은 조금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이건 사람 할 짓이 아니야, 어째 오한이 사르르 오르는 것 같아 이마를 몇 번 문질러보았다. 에어컨 바람에 차갑기만 해야 할 이마가 조금 따끈한 것 같았다. 감긴가…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괜히 아프면 안 된다고 신경 썼더니 외려 감기가 제대로 든 모양이었다. 

  

  

  “식당 밥으로 되겠습니까?”

  “많이 먹으면 속 쓰려요.”

  

  

  정시우 이사의 물음에 납작한 배를 문지르면서 수현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콕콕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은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였다. 점심도 그냥 대충 위벽을 감쌀 정도로만 먹어줘야지, 괜히 욕심 부렸다가는 다 게워내고 말 거다. 셔츠 한 장 사이로 느껴지는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놓는 정시우 이사의 손은 왠지 차가웠다. 수현은 제 몸에 열이 오르고 있음을 그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늘만 지나면 되니까 힘내요. 하반기 예산 결정은 천천히 해도 되니까.”

  “그럼 전 이제 코바코 쪽 정리만 하면 되네요?”

  

  

  수현은 급 신났다. 도저히 하반기 예산 결정까지는 일을 진행시킬 수가 없어 이사 차원에서 그 일은 조금 미루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광고가 상반기에서 하반기로 연결되는 터라 그리 크게 할 일도 없긴 했지만 수현으로선 하나라도 일이 줄어든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것만 하고 나면 집에 가서 좀 쉴 수 있을 거고 만약 이 상태에서 더 몸이 안 좋아지더라도 월차라도 낼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인 거다.

  일과 더위에 지친 사원들을 위한 것인지 오늘 식당 메뉴는 반계탕이었다. 윽, 무거워, 묵직한 뚝배기를 얹은 식판을 가까운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고 수현은 홀랑 다 벗은 나신으로 뚝배기 안에 누워 있는 닭을 조금 아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나, 젓가락질을 잘 하신 하지만 수현은 닭고기를 젓가락만으로 발라먹을 자신이 조금 없었다. 원래 닭이란 건 손으로 뜯어줘야 제 맛인 건데! 후, 한숨을 한 번 쉬고 자리에 앉으려던 수현은 그런 제 뜻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휙 몸이 돌려세워져서는 커다란 손에 얼굴 이곳저곳이 만져졌기 때문이었다.

  

  

  “음… 열이 있군요.”

  “에어컨 때문에 그런가 봐요.”

  “아닌데.”

  “이사님 손이 차가운 건데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슥 밀어내고 수현은 자리를 잡아 앉았다. 이리저리 뚝배기를 둘러보고 젓가락을 들었다. 호호, 뜨거운 국물 위에 바람을 불고 퍽퍽한 닭 가슴살부터 살살 발라내 먹기 시작했다. 

  정시우 이사는 아무리 봐도 수현의 상태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정신 상태 말고 몸 상태가. 지금 거의 대부분의 사원들이 골골거리는 상황인데다가 여름 감기가 꽤 심하게 돌고 있어 좀 걱정이 됐다. 그래도 오늘만 제대로 넘기고 나면 일이 좀 수월해질 테니 그나마 다행인가. 쉬라고 해봐야 은근 악바리 근성이 있는 수현이 쉴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쉴 상황도 아니고. 

  툭, 테이블 밑에서 구두코가 부딪쳤다. 닭에 집중하느라 뚝배기에 코를 박고 있던 수현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그대로 숙였다. 다시 또 툭, 이번엔 고의임이 확실한 그 부딪침에 수현은 슥 발을 뒤로 뺐다. 왜 그러냐고 수현이 입모양으로 묻자 정시우 이사는 그냥 고개를 가볍게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프면 말해요.”

  “…안 아픈데요.”

  “지금 말하라는 거 아니고.”

  

  

  날카로운 눈매가 스치는 걱정에 수현은 더 뒷말을 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제 몸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꽤 좋기도 하고. 꼭꼭 닭고기를 단물이 나게 씹으면서 수현은 왠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다 받고만 있다는 느낌, 해주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흘끔 시선을 들어 올려 잘생긴 얼굴을 훔치듯 한 번 보고 수현은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가슴께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이사님도요.”

  

  

  그는 항상 제가 하는 말에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반응을 보인다. 확연히 달라진 그 얼굴이 가슴을 툭툭 두드려대는 것 같아 수현은 목덜미를 분홍색으로 물들였다. 약간 긴가민가, 사실 이런 남자가 저를 좋아한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저런 얼굴 하나, 표정 하나에 그 의심은 풀릴 수밖에 없다. 

  밥공기의 삼분의 이를 비우고 마지막으로 국물 몇 숟갈을 끝으로 수현이 숟가락을 내려놓자 정시우 이사는 벌떡, 말 그대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도 안 먹었으면서 뭐가 저렇게 급하지 싶어 수현은 길죽길죽한 다리가 쭉쭉 뻗어나가는 길을 그대로 쫓았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팔이 붙잡혀 끌려간 곳은 비상구 계단. 뭘 하려고 그러는 건지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라 수현은 우선 입술부터 가리고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이사님, 저 이 닦아야 되는데요!”

  “나중에.”

  “지금요. 지금…”

  “아, 거참 까탈스럽네.”

  “까탈스러운 게 아니라 당연한 거거든요?”

  “키스 좀 하면 어때서.”

  “밥 먹고 바로 키스하고 싶으세요?”

  “잘만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그 수준이 다르잖아요, 수준이! 샌드위치 먹고 키스하는 거랑 지금이랑 같나요. 그때도 이 닦아야 된다고 하는 사람 억지로 붙잡아서 키스해놓고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피하는 수현을 따라 정시우 이사도 같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탈탈 팔을 털어 꾹 잡은 손을 떨쳐내고 수현은 비상구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저 그 상황만을 피하고 싶었던 건지 수현은 비상구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열리지 않는 비상구 문은 열리지 않았고 수현은 다시 비상구 문고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살짝 돌리고 문을 당기자 바로 눈앞에 당당하게 가슴을 편 정시우 이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하,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문을 닫으려는 찰나 수현은 다시 확, 그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싫은데요, 싫은데요, 몇 번을 말해봐야 이미 소용없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혀가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일뿐.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때까지는 참 좋았다. 억지로 키스 당한 건 별로였지만 그것도 하기 전일 뿐, 시작 하고나자 언제 싫다고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는 듯 열심히 했다. 키스가 너무 능숙해서 약간 기분이 미묘하게 상할 때도 있긴 했지만 그런 생각도 하다보면 다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수현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했다. 자신은 기억에도 없는 일―TV광고 사후조사 보고서―을 보고서로 올리라는 부장의 말 때문이었다. 분명 일을 나눌 때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다 적었다고 생각했는데 빠진 것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적어놓고도 보지 못한 건지. 이런 게 무슨 소용인가, 일을 해놓지 않았는데. 당황한 수현은 제 책상 위에서 스케줄 표를 찾아 읽어보았다. 황당하게도 거기엔 ‘TV광고 사후조사 보고서’라는 말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당황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수현 대신 정시우 이사가 부장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주었다. 부장 말인즉슨, 내일 미팅이 잡혀 있는데 거기서 써야하는 자료가 그것이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오늘 밤, 내일 아침까지는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라서 어떻게 되고 있나 해서 물은 것인데… 하고 흐리는 부장의 말에 수현은 머릿속이 노랗게 변해버리는 것 같았다.

  

  

  “이수현 씨.”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이사님.”

  

  

  수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은 용납이 안 된다. 내일까지 다 할 수 있을까, 수현은 산처럼 쌓여 있는 사후인지 조사 설문지를 생각하고는 골이 다 띵해졌다. 적어도 이틀은 필요한 작업이었다. 쓸모가 있는 설문지와 없는 설문지를 분류하고 그걸 다시 컴퓨터에 입력하고 통계프로그램까지 돌려야 한다. 일의 순서만 따져 봐도 하루 안에는, 그것도 아침시간을 다 보낸 지금부터 해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우선 이 대리 지금 하는 일은 박 과장이랑 김 주임한테 넘기고 그것부터 해. SPSS프로그램 돌릴 줄 아는 사람은 이 대리밖에 없잖아.”

  “어떻게…”

  “부장님 말대로 합시다.”

  

  

  수현은 뻣뻣하게 굳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사무실 내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죄송하다고 마치 허리가 원래부터 굽어져 있었던 것처럼 꾸벅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수현의 뒷모습에 정시우 이사가 쯧, 혀를 한 번 찼다. 일감 나누는 날 상태가 영 안 좋더니. 제 일을 나눠 받게 된 김 주임과 박 과장 앞에서 수현은 정말 대역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도 한 번 못 들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자동인형처럼 중얼거렸다. 다들 괜찮으니 어서 급한 일부터 하라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어줬지만 수현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리고 손도 같이 떨렸다. 입사 이후 이런 실수는 처음이었다. 일에 대해 약간의 강박증이 있는 수현은 자잘한 실수에도 스스로에게 견딜 수 없을 만치 커다란 자괴감을 선물했다. 수치 하나를 잊는다든가, 표 작성을 잘못한다든가, 하는 일에도 자학할 정도인데 이 상황에서는 정말 혀를 확 깨물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수현은 전혀 진정하지 못하고 설문지만 뒤적거리다가 손을 놓고 한숨을 쉬었다. 잇새에서 잘근잘근 씹히는 입술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불리 다가가 도와줄 수는 없다. 정시우 이사는 확실히 자기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고, 회사 내에서는 물의가 일어날 만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또한 그 상황은 분명 자신보다는 수현에게 더한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그래도 커피 한 잔 사서 쥐여 주는 정도는 괜찮겠지, 서류에 휘갈기듯 싸인을 하고 일어나 그는 사내 카페테리아로 방향을 잡았다. 점심시간이 지나 한산한 카페에서 차가운 얼음을 반 이상 넣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가 수현이 감기기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따뜻한 걸 하나 더 시켰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수현은 마치 설문지에 파묻힌 것처럼 앉아있었다. 

  

  

  “이수현 씨.”

  

  

  힘없이 눈을 들어 정시우 이사를 봤다가 수현은 우울한 눈빛으로 고개를 좌우로 두어 번 흔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감이 안 잡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수현은 또 예의 그 죄스러운 얼굴을 했다. 남에게 폐 끼치는 거 한 번 엄청 싫어하는구만, 일을 하다보면 빼놓고 할 수도 있는 거고―물론 지금 일은 좀 크지만―, 일의 경중을 따져서 남에게 다른 일을 맡길 수도 있는 거지. 

  

  

  “졸지 말고 이거 마시고 해요.”

  “…감사합니다.”

  

  

  슥 이마를 한 번 짚어본 정시우 이사는 인상을 더 굳혔다. 아이스커피 때문에 손이 더 식어있기는 했지만 뜨끈하게 느껴지는 수현의 이마는 분명 정상온도가 아니었다. 커다란 손에서 제 이마를 빼내고 수현은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하는 말이 그 순간 얼마나 듣기 싫던지, 정시우 이사는 수현의 입술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은 정시우 이사가 손에 쥐여 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크고 차가운 손이 짚었던 제 이마를 쓸어보았다. 연애를 해서 정신이 빠진 걸까, 수현은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말 연애해서 그런 거면 날 죽이고 싶을 거야. 하지만 연애해서라고 보기엔 이사님이 일하는 시간에는 저를 절대 건드리지 않으니… 그래, 차라리 전부 제 탓인 게 낫다. 멍청한 이수현, 스스로에게 욕질을 하면서 수현은 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설문지 분류를 시작했다.

  이번 주는 퇴근시간에 상관없이 자기가 맡은 일을 다 해치우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기에 9시가 넘은 이 시각에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 일이 조금 일찍 끝난 최 과장님이 두어 시간 정도 수현의 옆에서 일을 도와주었다. 수현은 과장님이 자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해서 견디질 못했다.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일어났다가도 왠지 저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수현은 큰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 괜찮으니 먼저들 들어가세요.”

  “이 대리.”

  “과장님도요, 정윤이가 아빠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생긋 웃는 얼굴이 정말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을 순간 하게 했지만 아직 남은 일거리를 봐서는 밤새 쉬지 않고 해도 아침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말까한 양이었다. 머뭇거리는 최 과장의 손에서 서류를 확 낚아채듯 빼앗아온 수현이 제발 좀 가달라고 등까지 떠밀었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밤새도록 할 일이 있으신 건 아니잖아요. 저 부담 돼요.”

  

  

  이미 늦었으니 제발 좀 돌아가 달라는 수현의 애원 섞인 부탁에 사람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현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애써 웃는 낯으로 배웅까지 했다. 부장님이 손을 붙잡고 일하고 힘들면 내일은 월차 쓰라는 말까지 해줘서 수현은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실수는 제가 했는걸요, 감사합니다, 부장님.”

  

  

  여전히 온 몸을 감싸고도는 자괴감에 울컥울컥하지만 수현은 그런 얼굴과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간신히 다른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수현은 마지막 남은 정시우 이사 쪽을 돌아보았다. 그만 가달라는 제 말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저 사람을 대체 어떤 말로 보낼 수 있을까. 

  

  

  “이사님.”

  “퇴근하라고 말하고 싶으면 관둬요.”

  “하지만… 오늘 일은 다 하셨잖아요.”

  

  

  그럼 집에 가셔야죠, 하고 뒤를 흐리는 수현의 말에 정시우 이사는 꼭지가 돈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새삼 알게 되었다. 수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저 이사님, 이상도 이하도 아닌. 분명 아프면 말하라고 했는데 쌕쌕 숨을 내뱉으면서도 수현은 아픈 티를 안 내려고 마른 입안을 제 침으로 애써 축여냈다. 게다가 오늘 일 다 했다고 집에 가라고? 눈치 빠르게 여우짓 할 때는 언제고 이럴 때보면 진짜 곰이 따로 없다.

  

  

  “집에 가라고?”

  “이사님도 피곤해 보이세요. 그러니까…”

  “이수현 씨.”

  

  

  수현은 정말 울고 싶었다. 일만으로도 벅찬데, 말을 할 때마다 갈라지는 것 같은 목구멍도 아파 죽겠는데, 왜 또 이사님은 저렇게 무서운 얼굴을 해서는 사람을 노려보는 건지. 

  

  

  “이수현 씨는 나를 대체 뭘로 생각하는 겁니까?”

  “…….”

  “그냥 이사님입니까?”

  

  

  그건 아닌데, 그건 절대 아닌데. 하지만 수현은 말을 고르지 못했다. 여러 가지 단어들이 떠오르긴 하는데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태. 계속 그 단어들을 되뇌다 보니 게슈탈트 붕괴현상이라도 오는 건지 그 단어가 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게 맞기는 한 건지, 그것까지 의심됐다. 

  뺨에 차갑게 식은 손이 닿았다. 손이 차가운 게 아니라 자기 얼굴이 뜨거운 걸지도 모르겠다고 수현은 제 몸 상태를 다시 자각했다. 목이 따끔따끔했다. 머리도 아프고 코도 맹맹하게 막히는 것 같았다.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손에 질질 끌려와 자리에 앉혀졌다. 그리고 그는 옆자리 의자를 끌고 와 앉아 수현이 넘겨보고 있던 설문지를 한 뭉치 가져왔다.

  

  

  “뭘 하면 됩니까.”

  “…이사님.”

  

  

  후, 뭔가 지친 듯한 한숨소리에 수현은 울상인 얼굴을 가렸다. 머릿속에 바람이 불었다. 그것도 세차디 세찬 칼바람이. 언제나 그렇듯 이유모를 망설임에 자기 마음대로 잘해주지 못하고, 한발 뒤로 빼고 있다가 멀어지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그 악순환이 또 이어질 것만 같았다. 딱 한 발만, 정말 딱 한 발만 더 와주면 망설임이건 두려움이건 다 집어던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수현 씨.”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이사님.”

  “누가 그런 말 듣자고 이러고 있습니까?”

  

  

  수현은 차라리 버럭버럭 화를 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낮게 깔아진 목소리는 푸석푸석한 얼음이 다 떨어질 정도로 차가웠다. 어떻게 저 화를 풀어줄 수 있을지,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그런 게 하나도 생각이 안 날 수가 있을까. 난 왜 이렇게 멍청하지? 

  뺨이 잡혀 얼굴이 억지로 들어 올려졌다. 수현은 제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정시우 이사의 얼굴을 보는 것도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그 눈에 저 말투만큼의 냉기가 넘실댄다면 정말 딱 기절해버리고 싶을 것 같아서.

  

  

  “눈 떠.”

  “…….”

  “이수현.”

  

  

  손끝이 벌벌 떨렸다. 밀려드는 오한에 수현은 딱딱 이가 다 부딪칠 것 같아 어금니를 다 사려 물었다. 눈꺼풀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다가 간신히 눈을 뜬 수현의 동공에는 정말 복잡한 표정의 얼굴이 맺혔다. 화와 분노, 그리고 거기엔 걱정과 알 수 없는 자괴감까지도 혼재되어 있었다. 

  

  

  “나랑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

  “연애라고. 연애. 그냥 몇 번 만나고 말 사이도 아니고 연애질을 하고 있다고.”

  “…….”

  “아프면 말하라고 했지, 힘들면 도와달라고 하면 돼. 입 다물고 있어봐야 내가 화밖에 더 내?”

  “…….”

  “대답해, 뭐하고 있다고?”

  “여…”

  

  

  수현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검은 눈동자에 온기가 조금씩 깃들기 시작했다. 그에 수현은 적지 않게 안도했다. 얼어붙었던 사지의 끝에 피가 조금씩 돌았다.

  

  

  “…연애요.”

  “알았으면 잔소리 말고 일이나 나눠서 내놔.”

  

  

  자켓을 벗어 던져놓으려던 정시우 이사는 수현의 어깨에 자켓을 걸쳐주고 손수 팔까지 끼워주었다. 벗으면 혼난다는 말에 수현은 소매 밑으로 내놓은 손가락만 꼬물거렸다. 툭툭 굳어졌던 얼굴을 제 손으로 몇 번이나 두드리고 수현은 반쯤 남은 설문지를 반으로 나누었다. 설문지를 건네주면서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냥,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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