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느슨하게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마치 혼자 잡지에서 오려놓은 것 마냥― 정시우 이사의 뒤를 뾰족해진 눈으로 좇다가 눈이 아파와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러다가 뺨에 닿는 차가운 것에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놀랐다.
“목마를 텐데 마셔요.”
미니바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수현에게 주고 정시우 이사는 수현의 옆에 털썩 앉았다. 침대 급이 다르긴 다르네, 수현은 출렁거리지도 않는 침대를 한 번 꾹 눌러보고 맥주 캔을 땄다. 안 그래도 목이 타들어가던 참이었다.
“…키스만 한댔으면서.”
“그럼 그게 키스지.”
“키스 세 번만 했다가는 말라 죽겠네요.”
“해볼까요?”
됐거든요, 좋긴 하지만 정신적인 혹사가 너무 심하다. 시우 씨라고 불러 봐요, 어서, 빨리, 더, 얼마나 졸라대던지.
“졸라…”
졸라댄다니. 저 덩치에 저 얼굴에 전혀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게 조른 거지, 뭐야. 협박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이걸로 벌칙 다 감해주세요.”
“벌칙? 아하, 안 됩니다.”
“벌칙이 그… 뽀뽀든 키스든 그거잖아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이 사기꾼! 수현은 아주 속이 다 탔다. 진짜 능구렁이, 아주 도처에 덫을 깔아 놨다. 가슴을 텅텅 치면서 수현은 맥주 캔을 싹 다 비웠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팩 던져 넣고 미니바에서 맥주를 더 꺼냈다. 다 마셔줘야지, 내일 나가면서 안에 들어있는 거 다 꺼내 가지고 갈 거다, 뭐 그래 봐야 저 사람한테는 껌 값일 거 아냐. 골탕 먹일 생각에 들떴다가 금방 우울해진 수현이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이유 모를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정시우 이사를 봤다면 좀 덜 마셨을까.
“술 더 마실 겁니까?”
“뭐 시켜 주시게요?”
“뭐든. 아직 룸서비스 되니까.”
“…됐어요. 잘래요.”
수현은 가운을 꼼꼼히 살폈다. 앞섶을 확실히 가리고 허리끈도 안 풀어지도록 꽁꽁 묶었다. 혼자 묶을 거라고 생각하고 왔으니 당연히 밤에 입을 옷은 가져오지도 않았다.
“안 덮칩니다.”
“만지지도 마세요.”
“물론.”
슥, 흘겨보는 눈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정시우 이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수현의 젖은 앞머리만 살살 매만져 정리해주었다.
“머리 다 말리고 자죠? 감기 걸릴지도 모르는데.”
“안 걸려요.”
귀엽긴, 그럼 자라는 투로 등을 툭툭 두드려주자 수현은 여분의 베개를 중간에 일자로 놓고는 등을 홱 돌려 누웠다. 내 손바닥에 쏟아놓은 게 바로 전인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민망한 투가 역력한 수현의 말과 행동이 이미 콩깍지 덮어쓴 정시우 이사의 눈에는 귀엽기만 했다. 뭐 저런 생물체가 싶을 정도로.
수현은 피곤했는지 금방 잠들어버렸다.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내려놓고 정시우 이사는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나는 띠링, 하는 전자음에 잠든 수현을 한 번 살피고 희망온도를 쭉 내려놓았다.
“난 안 만졌다.”
단지 방어벽이랍시고 쳐놓은 베개만 뺐을 뿐. 정시우 이사는 수현과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참 좋은 술버릇이야.”
에어컨을 튼 지 십오 분이 지났을까. 추운지 수현이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트를 당겨 덮어보기도 하지만 전혀 나아지는 게 없는지 천천히 따뜻한 체온이 있는 곳으로 몸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두 뼘이었던 거리가 한 뼘이 되고 반 뼘이 되고 완전히 없어지기까지의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시우 이사는 알아서 기어 들어오는 걸 날름 낚아챘을 뿐이다. 절대 먼저 손대지 않았다. 절대.
수현은 자괴감에 화장실 벽에 머리를 박아댔다. 눈 떠보니 보이는 건 외간 남자의 가슴팍이요, 제 손을 그 남자의 식스팩이 화려한 허리를 끌어안고 다리는 말 같은 허벅지를 있는 힘껏 감고 있더라… 그저 눈물 나는 이야기였다. 애써 표정을 숨기고 동요를 가리고 일은 제대로 끝마칠 수 있었지만 스스로 너무 창피했다. 그놈의 술이 문제였다, 술!
“뭘 그러고 서있습니까.”
“그냥 스스로의 삶에 대한 회의가…”
“갑시다.”
그것뿐이냐,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는 아주 이사 어깨에 머리를 박고 자지 않았던가. 정시우 이사가 ‘나랑 동급인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못생긴 쿠키 좀 먹죠.’라고 할 때까지. 아주 열심히도 잤다. 그러면서 또 쿠키는 먹었다. 빨대 꽂아 주는 바나나우유도.
“어디 가요. 차 있는데.”
“…예?”
“비서가 갖다놨을 겁니다.”
정시우 이사는 수현을 끌고 기차역 주차장으로 갔다. 은색의 매끈하고 섹시한, 익숙한 차체가 눈에 들어오자 수현은 뭔가 불안하면서도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음에 좋다는 생각도 했다. 몸이 피곤하니 저 차 안에 단 둘이 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잊고 말았다.
“안전벨트 매고.”
기차 안에서 어중간하게 잤더니 몸이 더 축 가라앉는 것 같았다. 수현은 정시우 이사가 제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쪽 이마에 입까지 맞추는데도 가만있었다. 말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재미없는데.”
이제 존대는 다 잘라 먹는 구나, 하기야 어차피 직위도 높고 나이도 많은데 반말이 대수랴. 수현은 하고 싶은 말이 꾸역꾸역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불편한 듯 몸만 한 번 뒤척였다.
“이수현 씨.”
하지만 정시우 이사는 끈질겼다. 이제 좀 이력이 쌓였는지 고개도 까딱 안 하는 수현의 머리를 푸스스 흐트러트리고 정시우 이사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주말에 데이트 합시다.”
움찔, 어깨가 살짝 튀었다. 차체가 울렁거리지 않게 천천히 운전 하면서 정시우 이사는 즐거워했다. 언제까지 반응 안 하고 있나 보자.
“데이트 하자니까요.”
“…….”
“하기 싫습니까?”
“…….”
“이수현 씨.”
“…….”
“이수현.”
“…….”
“수현아―”
“제가 왜 이사님이랑 데이트를…!”
“이사님 말고.”
시트에서 등까지 다 떼어낼 정도로 확 흥분했던 수현은 이사님 말고, 라는 말에 입술을 삐죽이면서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흥분하지 말자, 흥분하면 넘어가는 거야.
“어제는 잘만 부르더니.”
“…….”
“나중엔 말 안 해도 알아서 불렀으면서 이제 와서 빼긴.”
“이사님!”
“시우 씨, 시우 씨, 보내줘요, 가고 싶어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제 얼굴과는 달리 아주 아주 상쾌한 미소를 가득 지은 정시우 이사의 얼굴에 수현은 주먹을 한 방 꽂아 넣어주고 싶었다. 정말 그러면 안 되나, 한 대 때린다고 뭐 문제 되나, 좀 맞는다고 저 몸에 어디 멍이라도 들겠어?
“그러니까 데이트 합시다.”
대체 왜 거기서 그러니까, 라는 말이 나오는 거죠? 어디서 도출 된 결론인가요? 다다다 따져 묻고 싶었지만 수현은 그럴 수가 없었다. 데이트라는 단어가 좀 거슬릴 뿐 만나는 건 별로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고 또 저렇게 좋아 웃는 사람 기분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하는 겁니다?”
“…….”
“수현아, 대답해야지.”
아… 그냥 아까 때릴 걸, 수현은 캭 깨물어버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정시우 이사를 잠깐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웃는 사람 얼굴에 침 못 뱉고 화 못 내는 건 사람의 슬픈 본능이야, 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기는 개뿔이.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아침 인사는 귓등으로 흘리고 커피가 반쯤 담긴 종이컵을 문 채 자기 책상 위만 탁탁 정리해댔다. 그 소리가 꽤 요란했는지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왔지만 수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커피주세요.”
수현이 앞니로 물고 있던 종이컵을 톡 빼낸 정시우 이사가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홀딱 다 마셔버렸다. 커피 달라고 했잖아! 빈 종이컵만 돌려받은 수현은 아주 상큼하게 돌아서는 단정한 뒤통수에 종이컵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럼 내 기분이 참 상쾌해질 텐데 말야. 하지만 수현을 꽉 주먹을 쥐어 종이컵을 우그러뜨리는 데에서 자신의 욕망을 멈췄다.
아주 이젠 키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정시우 이사 덕에 어제 집에 돌아가는 길도 순탄하지 못했다. 집 앞에 차가 서자마자 후다닥 바로 내리려는 저를 붙잡아 잡아먹을 듯이 키스하곤 입맛을 다시던 얼굴을 떠올리니 수현은 온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긴장한 듯 꼴깍 침을 삼키자 이마에 뜨끈한 체온이 와 닿았었다.
“이 대리, 출장은?”
“…괜찮았습니다.”
“별로 괜찮지 않았던 모양인데?”
“아니에요. 별로 문제되는 것은 없었어요, 부장님.”
“그러면 다행이고. 보고서는 오늘 오후까지 올려.”
“예.”
저한테는 부장님밖에 없어요, 그런 눈빛을 퐁퐁 쏟으면서 수현은 부장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이것저것 말을 붙이고 커피 뽑아다 드릴까요, 하고 오랜만에 애교도 부렸다. 집안에 남자라곤 자기밖에 없고 거기에 막내이기까지 한 수현은 사근사근하게 구는 게 몸에 배여 있었다.
“이 대리님, 저도 커피요.”
“알았어요, 박 과장님은요?”
“나도. 블랙으로.”
“예예.”
사무실 막내도 아니지만 사서 커피심부름도 한다. 수현은 사무실에 비치된 커피 값 깡통에서 동전을 살살 골라 집었다. 자판기 앞에 서서 동전들을 딸깍딸깍 밀어 넣다가 수현은 등 뒤를 덮치듯 해오는 무언가에 손에 쥐고 있던 동전들을 짤그랑 다 떨어뜨렸다.
“이, 이사님! 간 떨어질 뻔 했잖아요…”
“어디 봅시다.”
“뭘요?”
“간 떨어졌나, 안 떨어졌나.”
“그게 진짜로 떨어진다고 하는 말인가요!”
“나무 위에 간 걸어 놓고 다니는 토끼인가 보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동전을 줍는 수현의 앞에 같이 무릎을 굽혀 앉은 정시우 이사가 성의 없게 동전을 몇 개 주워주었다. 그가 건네는 동전을 받아든 수현이 일어나려고 했지만 어깨가 꽉 눌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뭐하시는 거예요, 하고 눈꼬리를 치켜 올리자 정시우 이사는 쪽, 입술을 부딪쳐왔다. 이, 이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뭐하는…
“모닝 키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이젠 하지 말란 소리도 안 하네.”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 하실 거잖아요.”
“난 수현 씨가 싫어한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하지 말라는 것도 말뿐이잖아.”
“그거야 이사님이고…”
수현은 순간 딱딱하게 굳어진 잘생긴 얼굴에 오한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것처럼 오만하고 차가운 느낌에 머리카락이 다 쭈뼛 설 거 같았다. 뭘 실수한 걸까, 수현은 여전히 정시우 이사가 제게 거는 작업―이라는 자각은 있다―을 감정에서부터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참 답답할 노릇이었다. 정말로 말로 해주기 전에는 모를 모양이다. 알아도 모른 척 하든가.
“이사니까, 상사니까 싫어도 참았다?”
“아뇨, 그런 건…”
“해달라는 대로 안 하면 불이익이라도 있을까봐? 승진이나 평판에?”
“이사님.”
수현은 또 제 나름대로 기분이 상했다. 이사고 상사라서 거부를 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싫은 걸 참지는 않았다. 정말로 역겹고 싫었으면 뒷생각은 하지도 않고 다 뒤집어엎었을 거다. 그러니 당연히 불이익을 받을까봐 그런 것도 아니고 어떤 이익을 생각하고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뭐라고 말한 것도 아니잖아.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어, 뭐 사귀자고 한 적이 있어? 한 번 자보려고 그런 거 아니냐는 말에 화를 내긴 했지만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어떻게 알고?
“두 분 뭐하세요?”
수현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근육이 움직여 허벅지에 자잘한 경련이 일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커피를 뽑아가려는 목적도 잊고 수현은 이 곤란한 상황에서 구원의 손을 뻗어준 김 주임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사무실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이 대리 왜 그래? 뭐 쫓아와?”
“아뇨…”
“커피는?”
“아…, 죄송해요. 다시 뽑아다… 조금 나중에 뽑아 드려도 될까요?”
“옛날 애인이라도 만났나? 이 대리가 인기가 좀 많긴 하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수현은 지친 듯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이게 뭐야, 정말. 차라리 옛날 애인이면 난감하지라도 않지,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일단 자기 마음속에서 떨어져나가고 나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수현의 성정에 과거 애인 같은 건 한 톨의 시선도 줄 존재가 되지 못한다. 현재진행형인 게 문제라구요,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