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4)

  

  

  수현은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내내 실수 연발이었다. 엄청난 것들은 아니었지만 자잘하게 말을 더듬거나 단어를 잘못 말하기도 했다. 그건 꼭 정시우 이사와 눈이 마주치고 난 다음에 벌어졌다. 정시우 이사는 지금까지의 시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수현에게 형형한 안광을 보였고 수현은 그 눈빛에 몇 번이고 화들짝 놀랐다. 

  

  

  “수현 씨, 왜 그래?”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잘못된 건 없으니까 죄송할 것 까지는 없고. 또 이사님이 깔끔하게 마무리하셨으니까.”

  “예…”

  

  

  그 이사님이 문제였는데요. 수현은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정시우 이사의 탓으로 돌릴 순 없었다.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린 건 저였으니까. 

  

  

  “수현 씨, 다음 주에 출장인데 괜찮겠어?”

  

  

  안색이 좋지 않은 저를 걱정해주는 부장님의 다정한 말에 수현은 감동을 받았다. 언제나 부하 직원에 대한 배려를 멈추지 않는 분, 이러니 제가 좋아할 밖에요.

  

  

  “부장님, 흑흑.”

  “그래도 가야지, 그쪽 광고대행사는 수현 씨가 처음으로 거래한 곳이잖아.”

  “그렇죠… 가야죠.”

  

  

  이번엔 가지 말라 그래도 갈 겁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잠시라도 이 회사를 떠나 있는 것이 도움이 될 거다.

  

  

  “이사님이랑 같이 가도 괜찮지?”

  “예… 예? 이사님이요?”

  “같이 가고 싶다고 하시던데. 대행사와는 어떻게 일하는지 잘 모르신다고.”

  “꼭 같이 가야 하나요? 부장님, 꼭인가요?”

  “이사님인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

  “부장님…”

  “수현 씨, 이사님이랑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건 아닌데요…”

  

  

  수현은 이제 울상까지 짓고 있었다. 수현의 얼굴에 만연히 드러난 표정에 부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 망설였지만 방법은 없었다. 이사가 하고 싶다고 말했으면 그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별로 큰일도 아니고 겨우 출장 같이 가겠다는 요구를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명분도 뭣도 없다.

  

  

  “사이가 틀어졌으면 이번 기회에 바로 잡게. 혹시 아주 큰 문제가 있으면 꼭 말하고.”

  

  

  단호하지만 위로도 함께. 수현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체념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까라면 까고 기라면 기어야지 방법이 있나, 조직사회에서 더 이상의 배려를 바라는 건 무리다. 수현은 부장님의 부담을 줄여드리기 위해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하다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정시우 이사를 발견하고 후다닥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피하기만 해서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지금으로썬 피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한 번 자고 싶어서, 였을 지도 모른다. 정시우 이사는 그 점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아니, 오히려 처음에는 그냥 귀엽기만 했지. 한 눈에 반했어요, 따위의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밖에는 답이 없다. 처음부터 계속 쳐다보게 되지 않았던가, 일부러 불러서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하고 괜히 툭툭 건드려보기까지 하고. 일부러 만날 접점을 만들기 위해 별짓을 다했던 거 같다. 그게 왜였을까.

  

  

  “…쪽팔려.”

  

  

  말로 하긴 왠지 쪽이 팔린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그걸 말로 하는 건 또 좀 그렇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옆에 두고 보면 좋겠다는 거였다. 아무 것도 안 하고 보고만 있어도 꽤 즐거우니까.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서 좋다는 생각을 해본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서 이게 대체 어떤 기분인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을 정도니. 

  딱 하나 확실한 건 좋다는 거다. 연애하면 더 좋을 거 같고. 사내 연애라,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좀 놀아봤어도 제대로 된 연애는 스무 살 이후로 해보지 않은 정시우 이사는 아주 오랜만에 겪는 감정에 아주 흥분된 상태였다. 하지만 가라앉혀야지, 수현의 사고방식을 봤을 때 갑자기 들이대거나, 험하게 굴거나, 확신을 주지 못하면 계속 도망가기만 할 것 같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정말 살살 어르는 것이다. 감정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밥 한 끼에 진명이 주절주절 늘어놓은 수현의 연애사는―정시우 이사는 이런 것도 친구라고 가지고 있는 수현이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우울했다. 수현은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걸 알아채는 것이 늦은 것이다. 자기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좀 부족했다. 대체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 정도 외모에, 그 정도 성격에, 그 정도 능력에, 딱히 모자란 구석이 보이지 않는데. 

  

  

  “이사님.”

  “…가죠.”

  

  

  수현은 제 눈치를 살살 봤다. 정시우 이사는 그것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루 묵고 내일 저녁에 올라오는 짤막한 일정임에 손에 든 짐은 가벼웠지만 마음의 짐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KTX 표를 끊고 수현은 수트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주말 내내 고민해봤지만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예 터놓고 말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긴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우선 이사와 대리라는 직위차도 그랬고, 사람 자체가 가지는 위압감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지만 분명 제게 어떤 것이든 감정이 있는 정시우 이사 쪽인데 왜 이렇게 제가 전전긍긍하는지 수현은 제대로 된 근거를 들어 설명하지 못했다. 좋아하고 있는 걸지도… 어떤 답이 나올지 두려워서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 정시우 이사는 외모는 제 타입이 아니지만―수현은 편안하게 생긴 스타일을 좋아했다― 충분히 친절하고 다정했다.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수현은 사람 겉만 보고 홀딱 넘어갈 만큼 물렁한 인간은 아니었다.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이사님 간다고 해서 특실로 표를 끊었음에도 정시우 이사는 불편한 듯 몸을 몇 번 뒤척였다. 그렇지, 저 다리 길이를 하고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레이 색 슬림한 라인의 바지에 감싸여진 긴 다리를 슥 한 번 훑고는 수현은 황급히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 같이 하면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전달하고 내일은 대행사측의 포르폴리오를 확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재계약은 당장 하는 건 아니고 돌아와서 팀원들 간의 상의 하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일박 이일로 해야 할 일정 같지는 않은데.”

  “일찍 출발했으면 당일로 다녀올 수 있었겠지만 오전에 다른 일이 있었으니까요.”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꽤 신경 쓰였지만 수현은 의연한 척 서류만 뒤적거렸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수현은 꽤 귀여웠다. 이 상황도 전혀 나쁘지 않은데, 물론 수현이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정시우 이사는 팽팽 돌아가는 그 머릿속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여러 수현의 반응들이 좋았다.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라서. 

  가볍게 시작된 거라고 해도 끝까지 가벼울 리는 없다. 소복소복 무게도 없이 쌓이는 눈에 가지가 꺾이는 것처럼 의외로 마음이 가볍지 않다. 정시우 이사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것 같지만, 아주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도 너무 오랜만에, 아니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할 마음에 꽤 당황하고 있었으니까. 

  

  수현과 연애를 한다면 꽤 즐거울 것이다. 즐겁기만 할까, 온갖 좋은 기분에 대한 형용사는 다 갖다 붙여도 좋을 것이다. 연애에 대해서는 전혀 환상도 뭣도 없는데 수현과의 연애엔 온갖 환상이 다 생긴다. 맥주냄새와 파인애플 향이 나는 입술에 새털처럼 가볍게 입을 맞추고도 좋지 않던가. 그때 조금 더 바랐던 건 수현이 당황해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눈을 둥글게 반달로 만들고 웃으면 더 좋겠다는 것이었다.

  꽤 순수한 제 환상과 바람에 정시우 이사는 날렵한 턱을 살살 쓸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성적 함의가 듬뿍 담긴 생각도 하지만 대부분은 달달하고 보송보송한 생각들이다. 정말로 연애가 하고 싶은 것처럼. 

  

  

  “저… 이사님, 뭣 좀 드실래요?”

  

  

  파는 건 버석거리는 과자와 약간의 음료수뿐이데. 흠, 잠시 고민하던 정시우 이사는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과자를 골랐다. 수현이 꽤 들뜬 얼굴로 주전부리를 이것저것 고르는 것이 보기 좋았다. 미리 냉큼 계산을 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수현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면서 하하, 어색하게 웃기 바빴다. 이 싸늘한 침묵을 어떻게든 타파하는 것이 그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즐길 수밖에.

  

  

  “요즘엔 기차가 너무 빨라져서 기차여행의 묘미가 좀 없네요.”

  

  

  시속 300km에 육박하는 속도로 달리는 KTX는 벌써 대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수현은 테이블을 내리고 과자들을 대충 풀어놓았다. 점심을 제대로 못 먹은 지라 배가 고팠다. 수현은 지금 어색하고 말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배가 고프다거나 뭔가 욕구 충족이 되지 않으면 거기에만 집중하는 것이 당연하다.

  

  

  “예전에는 대전역이나 천안역에서 우동 먹는 재미도 있었는데.”

  “…그렇습니까?”

  “이사님은… 그다지 해보셨을 거 같지 않지만요.”

  

  

  기차는 타봤을까, 가까운 거리는 다 차로 이동했을 거고 먼 거리는 대부분 비행기를 이용했겠지. 걷기 시작할 때부터 기사가 따라다녔을 지도. 버스비가 얼마인지 모를지도 몰라. 수현은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성장환경에 살짝 입술을 삐죽였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초코칩 쿠키만 집어 먹었다.

  

  

  “그런 거 좋아합니까?”

  “주면 먹어요.”

  “음… 좋아하진 않고?”

  “딱히 싫어하지도…”

  “뭐가 그렇게 미적지근합니까. 좋지도 않지만 싫지도 않고, 그 못생긴 쿠키랑 동급인가.”

  

  

  톡 쏘아붙이는 듯한 목소리에 수현은 우물우물 씹던 걸 멈추고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못들을 말을 들은 것 같아, 뭔가 항상 상상을 벗어나는… 저 얼굴에서 나올 리 없다고 생각하는 말들이 툭툭 잘도 나온다. 항아리모양 바나나우유가 잘 뜯어지지 않아 신경질을 내다가 수현은 카트 끄는 예쁜 아가씨가 놓아주고 간 빨대를 푹 꽂았다. 초록색 은박지를 뚫고 들어간 빨대는 노란색이었다.

  

  

  “…죽는 줄 알았네.”

  

  

  빨대로 음료 빨아먹는 취미는 없지만 꽂아놓은 거 빼고 또 뜯을 생각은 없어 수현은 쪽쪽 가느다란 빨대로 우유를 열심히 먹었다. 뭔가 참다가 터져 나오는 소리에 수현은 옆을 휙 돌아보았다가 귓가를 새빨갛게 붉혔다. 무표정하던 정시우 이사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평일 낮이라 사람이 별로 없어 더 시끄러웠던 건지 앞자리에 앉은 할아버지와 아가씨가 뒤를 돌아보곤 황당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삼십 대 남자 둘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꼴이 보기 좋진 않았을 터.

  

  

  “…이수현 씨.”

  “다 웃으셨어요?”

  

  

  뿌루퉁한 수현의 목소리에 정시우 이사는 또 금방이라도 웃음이 나올 듯한 얼굴을 했다. 수현은 그 와중에도 빨대를 입술에 붙인 채 연한 노란색 액체를 쪽 빨았다.

  

  

  “맛있습니까?”

  “안 드셔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그럼 한 번 먹어봅시다.”

  “예… 에? 사드세요!”

  “다시 언제 올 줄 알고.”

  “곧 올 거예요.”

  “줘 봐요.”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는 좁은 기차 좌석에서 수현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커다란 손아귀에 어울리지도 않는 노란색 바나나우유 병이 잡혔다. 저게 저렇게 작았던가, 아이 얼굴만 한 우유가 무슨 요구르트 병 같이 작아 보인다. 설마 빨대로 빨아먹진 않겠지, 자기 얼굴에 대한 자각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는… 데.

  

  

  “바나나 맛은 안 나는 군요.”

  “그, 그걸 빨대로…”

  “수현 씨도 마셨지 않습니까.”

  “저랑 이사님이 같나요…”

  “다를 건 또 뭡니까.”

  

  

  제 입맛에는 느끼하기만 한 우유를 다시 수현에게 넘겨주고 정시우 이사는 의자에 편안하게 기댔다. 내내 저를 피하고 허둥대던 수현이 다시 꽤 편안하게 대하고 있었다. 어차피 피할 곳도 없으니 마음 편하게라도 가자 싶은 거겠지, 보일 듯 말 듯 볼을 부풀린 채 저를 흘긋 째려보면서 남은 우유를 끝까지 빨대로 마시던 수현이 눈이 마주치자마자 후다닥 고개를 완전히 돌려버렸다. 붉어진 귓불을 잡아 문지르자 화들짝 놀라했다.

  

  

  “말랑거릴 것 같아서.”

  

  

  당황한 수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선수 친 정시우 이사는 애써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면서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싫은 건 아니고 그렇다고 좋아하는 건 아닌데 천칭저울이 좀 기울어 있는 것 같긴 하다. 정시우 이사는 수현이 저를 피하는 것도 꽤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아예 신경도 안 쓰는 게 더 가망이 없는 거지, 피하고 깜짝깜짝 놀라는 건 분명 신경줄 하나를 은근슬쩍 걸쳐두고 있다는 뜻 아닌가.

  

  

  “…건드려놓고 자기는 자고.”

  

  

  엉덩이까지 들썩거리면서 억울한 목소리로 투덜대는 수현 때문에 정시우 이사는 자는 척마저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어깨를 떨며 웃는 그의 어깨를 수현은 퍽, 온갖 앙금을 다 담아 내리쳤다. 이사라는 것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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