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4)

  

  

  수현은 드디어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사가 미쳤든가. 한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배고픈 표범의 얼굴을 한 채 비스듬하게 서서 바라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때 못 알아챘다면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라도! 정말 하나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기에 수현은 피할 생각도 사태가 발발하고 나서도 대체 이게 뭔가 싶기만 했다. 뽀뽀도 한 번 안 해본 숙맥이면 모를까, 그래도 살면서 사람도 사귀어보고 할 것도 다 해봤음에도.

  수현은 자기가 남자도 수비범위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를 해왔다. 정시우 이사는 숨기지 않았고 얼핏 봐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대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제 착각일 뿐이고, 그 사람은 그저 제가 부하직원으로 조금 마음에 들었을 뿐이고… 하지만 아니었던 건가, 차라리 도끼로 내 발등 찍는 게 백배는 낫겠어! 

  

  

  “이게 뭐야, 진짜.”

  

  

  아, 그래. 술 마셔서 그런가 보다. 이사님도 술 마셨으니까―맥주 반 병도 안 마셨다던 정시우 이사의 말은 머릿속에서 지운지 오래다.― 그냥 잠깐 맛이 간 거다. 원래 스킨십을 좋아하는 걸 수도 있어. 아까 차에서도 계속… 그거 진짜 성희롱이었던 거 아냐? 아냐, 이렇게 되면 정말로 그쪽에서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생각되잖아. 그래, 사고, 사고로 치자. 교통사고. 입술끼리 박치기 한 번 한 거 가지고 뭘. 그 정도 접촉사고는 보험회사 부를 정도도 안 되니까 당사자끼리 합의해서 그냥 넘어가면 된다. 하지만 수현은 진정하지 못하고 마구 머리를 헤집어댔다.

  수현은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상담, 상담자가 필요해.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 하지만 성희롱이라고 하기엔 뒷목 만지는 건 가슴께가 뜨끔뜨끔거릴 정도였고 뽀뽀는, 싫어했다고 하기엔 얼굴 새빨갛게 붉혀가지고 뛰어들어 왔으니 이건 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안 그래도 경험 무진장 많아 보이는 사람인데 그 반응에 싫어서 그랬다고 하면 코웃음만 칠 거다. 그래도 수현은 우선 전화라도 걸어보기로 했다. 시간 확인도 안 하고.

  

  

  “좀 받아라, 응? 내가 지금까지 욕한 거 다 잘못했다고 빌게. 이진명아, 전화 좀…”

  ‘…뭐야, 이 시간에.’

  “이진명아. 나 좀 살려주라, 응?”

  ‘죽을래? 끊어.’

  “야! 나 상사한테 성희롱 당했거든?”

  ‘정시우 이사?’

  “너, 너 어떻게 알아?”

  ‘꽤 오래 참았네. 척보면 척이지. 그냥 받아들여. 이사한테 어쩔 건데. 그리고 성희롱은 무슨. 지도 좋았을 거면서.’

  “야!”

  

  

  뚜, 뚜, 바로 끊어진 전화를 쥐고 수현은 머리를 마구 두드렸다. 몇 번 점심을 같이한 전적이 있는 진명에게도 뻔히 보였을 정도라는 거 아냐. 

  

  

  “아… 개겨서 그런가 보다. 개새끼라고 하고 말대답 따박따박해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싸대기라도 한 방 때릴 걸 그랬나.”

  

  

  그런 거 있지. 잘난 사람들 여자한테 뺨맞고 ‘날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 우리 사귀자.’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짓거리 하는 거. 그런 걸 거야, 아니면 설마 몸? 수현은 옆에서 잡아먹을 사람도 없는데 헉, 소리까지 내면서 몸을 사렸다. 

  

  

  “아냐, 몸은 아닐 거야. 그 얼굴에 여자가 없겠어, 남자가 없겠어. 옷 벗고 달려드는 인간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근데 이사님이랑 그거 하면 좋을 거 같기도… 잘생겼잖아. 잘생겨서 질투가 나기도 하지만 잘생겨서 그거 하면 좋기도 하겠지. 여기까지 생각하다 수현은 마구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꼬이고 꼬여서 이사가 저를 좋아한다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 미국! 미국에서 살다왔다 그랬다.”

  

  

  미국은 개방적인 나라니까 친해지면 뽀뽀 정도는 하겠지, 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친한 친구끼리는 뽀뽀도 하잖아―입술이 아닌 양 뺨에 한다는 건 애써 잊는다―. 그렇지, 친근감의 표시인 거야. 술도 마셨고 기분도 좋고 친근감도 좀 든 거야, 그러니까 가볍게 뽀뽀한 거지. 음, 이사님은 친근감의 표현을 뽀뽀로 하시는 구나. 수현은 자신의 입장에서 정말 말도 안 된다고 보이는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엄청난 상황 왜곡과 합리화를 시작했다. 옆에서 정시우 이사가 봤다면 머리를 마구 쥐어박았을 지도 모르는. 

  

  

  “그래, 이진명이는 몇 번 안 봤으니까 착각 한 거야. 이사님이 왜 날 좋아하겠어. 하하하하.”

  

  

  어색한 웃음소리까지 내면서 웃고 수현은 그때까지 입고 있던 양복을 벗기 시작했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참이었다. 마구 씻고 작은 침대에 누워 수현은 ‘아무 것도 아니다.’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먹던 거 말고 다른 거 먹으면 탈나는 법이야. 토끼는 풀을 먹고 표범은 고기를 먹어야지. 

  

  

  “자야해.”

  

  

  내일 프레젠테이션이란 말이다. 수현은 뇌에 사정사정을 했다. 하지만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자의적 존재가 되어버린 뇌는 수현이 밤을 꼴딱 새우게 만들었다. 

  

  

  

  

  

  

  

  

  

  

  

  수현은 열심히도 도망 다녔다. 평소 같으면 출근 시간 20여 분 전에 출근해서 여유롭게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오늘 해야 할 일도 좀 살펴보고 했을 텐데 칼로 맞춰 출근해서 오전 내내 자리에서 한 번 일어나지도 않았다. 오후에 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놓고.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오늘은 김 주임―진명의 애인―과 밥을 먹어야 한다는 진명의 손을 붙들고 회사 앞 백반 집으로 뛰었다. 등 뒤에 꽂히는 눈빛이 무시무시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정말 잡혔다가는 산채로 잡아먹힐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난리야. 올게 왔구만. 너무 늦어서 이상한데.”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이사 눈이 말이야, 널 언제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이번엔 왜 도끼병 안 왔냐? 예전엔 별 것도 아닌 것에 제 발등 찍어대더니.”

  “그, 그! 또 발등 찍을까봐 그랬지!”

  “꼭 중요할 땐 제대로 못 찍더라. 오, 자반고등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 살을 발라내면서 진명은 콧노래를 불렀다. 그에겐 수현이 어떤 상황에 처했든 이 고등어를 살 하나 남김없이 발라 먹는 것이 더 중요했다.

  

  

  “오늘 밥은 네가 사는 거지?”

  “내가 지금 밥 살 군번이야?”

  “내가 너보다 군번 높거든.”

  “의가사 제대 한 주제에!”

  “어쨌든.”

  

  

  의가사 제대라는 말에 수현을 노려봤다가 진명은 다시 고등어에 열중했다. 

  

  

  “근데 이사님이 날 좋아할 리가 없잖아. 생각을 해 봐. 그 얼굴에, 그 경제력에, 그 성격에, 그 몸매에, 어딜 봐서 날 좋아해?”

  “…취향이 특이한가 보지.”

  “내가 그렇게 특이하다고 말할만한 취향이냐?”

  “그럼 뭐 너 같은 타입을 좋아하나 보지. 근데, 뭘 당했는데?”

  “그게―”

  

  

  뽀뽀라고 말하려니 순간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진명이 들으면 웃기는 새끼라고 욕하면서 코웃음까지 칠 거다. 그게 무슨 성희롱이냐,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키스라고 말하기엔 너무 완벽한 뽀뽀였다. 진짜 입술만 닿았다. 딱 입술만. 게다가 목덜미 만진 건 성희롱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성희롱의 가장 큰 조건은 개인적인 불쾌감인데 그게 없잖아!

  

  

  “…꿈이었을 지도 몰라.”

  “야, 너 또 현실회피하지 말고…”

  “그래. 꿈이거나, 친근감의 표현이다.”

  

  

  진명은 또 시작이다, 라는 눈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일이 닥치면 언제나 현실을 회피하곤 했다. 저럴 때는 딱 모가지에 끈 묶어서 앞에 두고 몇 번이고 머릿속에 주지시켜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싫었어?”

  “…뭐가?”

  “성희롱.”

  “…….”

  “좋았구나― 근데 그게 왜 성희롱이야.”

  

  

  정시우 이사는 느긋하게 수현의 뒤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진명은 그것을 알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심지어는 눈빛교환까지 했다. 내가 좀 찔러서 말 좀 하게 할 테니 잘 들으쇼, 하는 눈빛에 정시우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갑작스럽잖아.”

  “모르지 않았잖아?”

  “근데 말이 안 되잖아.”

  “왜?”

  “그… 이사님인데. 게다가 너무 잘생겼고, 수준도 안 맞고…”

  

  

  수현은 은근히 자기비하가 심했다. 언제나 도끼로 헛다리짚는 건 뒷북을 치기 때문이었다. 남이 좋다고 티를 내면 감은 좋아서 뭔가 느껴지기는 하는데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러다가 수현이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확신할 때쯤이면 이미 상대는 지쳐서 떨어져나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쾅, 도끼는 발등을 찍을 수밖에. 그러다 보니 수현은 그냥저냥 가벼운 연애만 했다. 잠깐 둘 다 좋아하는 거 티내고 잠시 사귀었다가 별 불화도 없으면서 헤어지고 하는. 꼭 수현을 좋아했던 사람들도 고백할 용기는 없는 소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좋은데 그게 뭔 상관이냐?”

  “좋다고 한 적 없어!”

  “에이, 좋으면서.”

  “그, 싫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자고 싶어서 그런 거면?”

  “헉.”

  

  

  진명은 수현의 폭탄 발언에 숨을 들이켰다. 이놈의 이수현, 뒤에 누가 버티고 서있는지도 모르고 폭탄을 밟았다. 진짜로 자고 싶어서 그랬든, 아니든 간에 저런 말을 들으면 누구든 기분이 나쁠 거다.

  

  

  “야, 이진명. 왜 그래?”

  “이수현 씨?”

  

  

  대답은 뒤에서 왔다. 수현은 이번엔 진짜 죽었다고 생각했다. 난 진짜 죽은 거야, 죽었어. 그러면서도 진명을 노려보는 건 잊지 않았다. 넌 알면서도 있었던 거지? 엉? 뒤에 정시우 이사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런 거지?

  

  

  “점심 같이 먹기로 했던 거 같은데요.”

  “이, 이사님…”

  “나도 점심을 못 먹었는데 수현 씨 거라도 좀 먹죠.”

  

  

  수현의 귀에 저 말은 ‘내가 너 찾아다니느라 점심도 못 먹었거든? 좀 맞을래?’라고 들렸다. 옆에 털썩 앉은 정시우 이사가 수현이 멍하니 들고 있는 젓가락을 빼앗아 와서는 손도 안 댄 수현의 고등어를 뜯었다. 

  

  

  “하하하하, 갑자기 배가 부르네.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사님.”

  “이진명 씨라고 했던가요?”

  “예예, 그렇습니다.”

  “나중에 밥 한 끼 사죠.”

  

  

  수현이 모르는 이야기는 김 주임이 진명에게 수현의 행방을 물었다는 것이고, 진명은 김 주임에게 회사 앞 백반 집, 상호까지 정확히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것이고 김 주임은 그걸 정 이사에게 그대로 일러바쳤다는 것이다. 진명은 백반 집을 꽁지 빠지게 빠져나가면서 종교도 없으면서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명복을 빌어주마.

  

  

  “고등어 백반은 사내 식당보다 훨씬 맛있군요.”

  “예… 그렇죠, 하하하…”

  “이수현 씨.”

  “예?”

  “자고 싶었으면 직접적으로 말했을 겁니다.”

  

  

  무, 물론 이사님이 그런 사람이라는 게 보이긴 하지만요… 수현은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아직 제 마음이 어떤지도 잘 모르겠고. 사람이 좋은 것 같긴 한데 이게 그런 쪽인지도 잘. 또 이사님이 남자랑 사귄대, 근데 그게 이수현 씨라지 뭐야, 라는 소문 한 번 돌아봐라. 회사 내에서 문제 되는 건 둘째 치고 그쪽 집안에서 뭔 소동이 나겠냐고. 그래서 지금까지 사내 연애는 한 번도 해본 적도 없고… 까지 생각하다 수현은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정시우 이사랑 연애한다는 것 자체는 거의 아무 거슬림 없이 넘어가지 않았는가! 어째서 뒤에 올 파장만 생각하고 있는 거지?

  수현은 한 눈에 반해서 하악 거리기보다는 오래 사람을 두고 보는 편이었다. 애초에 사람을 보고 이렇게 짧은 시간에 좋다 싫다를 판별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제 직접 이사님은 좋은 사람 같다고 말하질 않나…

  

  

  “그런 말은 내게도 기분이 나쁘군요.”

  

  

  수현의 밥상을 싹 다 비운 정시우 이사가 탁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벌 받는 아이처럼 꼼짝 않고 옆에 앉아 있던 수현은 그 소리에 움찔거렸다.

  

  

  “프레젠테이션 시간 늦지 않게 들어와요.”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수현은 이런 상황에서 너무 상투적인 소원이지만 시간을 딱 10분 전으로만 되돌리고 싶었다. 대체 왜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맨날 ‘시간을 돌리고 싶어요, 흑흑’ 이따위 말을 해대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지금은 공감백배였다. 왜 저질러놓고 맨날 후회하냐, 그랬는데 사람이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니 그렇게 단정 지어 이야기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수현은 정말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딴 말이 나오지 않도록 제 입술을 아예 꿰매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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