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4)

  

  

  

  

  “이 단어는 persistence로 바꾸죠.”

  “…예.”

  

  

  수현은 끙끙거리면서 요약본 작성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불안해했던 대로 정시우 이사랑 사이좋게 머리 맞대고 작성하는 수순에 이르렀다. 영어 단어야 뭘로 바꾼다고 한들 내가 알게 뭐냐, 내가 읽을 것도 아닌데. 그냥 알아서 쓰세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친절한 어투로 이것저것 얘기하는 사람한테 퉁명스러운 소리를 낼 순 없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듯이.

  

  

  “수현 씨, 굉장히 꼼꼼하군요.”

  “…그냥 느리다고 해주세요.”

  “조금 느려도 한 번에 해치우는 게 낫죠. 두 번 세 번 똑같은 거 반복하느니.”

  

  

  꼼꼼한 거 알면 말 좀 걸지 말아주실래요, 수현은 ‘똑같은 거 반복…’까지 적었다가 백스페이스 바를 콱콱 눌렀다. 옆에서 누가 계속 말을 걸면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받아 적게 된다. 그래도 얼마 안 남았다. 남은 ppt는 약 7장. 요약본도 반 페이지 정도만 더 채우면 끝이다, 끝, 끝… 수현은 행복감에 몸서리쳤다. 

  수현이 야근에 야근을 거듭하지 않게 해준 일등 공신은 불행하게도 정시우 이사였다. 컴퓨터를 날려버린 과장님이 도와주긴 했지만 정시우 이사가 해준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아니 곰발의 피… 솔직히 한 게 없다, 과장님은. 그래서 수현은 살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뭔가 보답을 해야 할 텐데 하고. 이런 쪽에서 좀 순진한 축에 드는 수현은 빚지고는 못 사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밥을 사자니 이.사.님 입맛에 맞는 건 수현의 경제적 능력으론 좀 무리였다. 사내 식당 다니는 걸 보면 그냥 싼 거 사줘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거랑 보답용 식사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술을 사자니 왠지 추태를 보일 것 같아―이미 추태란 추태는 다 보였지만― 꺼려졌다. 수현은 스스로 술을 마시면 제가 어느 정도로 뵈는 게 없어지는지 잘 알았다. 남들은 추태라고 하지 않았지만 한여름에도 춥다고 붙어대고 저도 모르게 애교 부리고… 스스로 평가해보건대 술 먹고 꼬장 부리는 것보다 더 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커피도 사주는 족족 다 마시고 있잖아. 졸 때마다 벌칙이 하나씩 더해진다는 것에 수현은 벌칙이 뭔지도 모르면서 오후 시간에 졸지 않으려 별 수를 다 썼다. 점심 먹고 사주겠다는 사내 카페테리아의 비싼 커피도 주저 없이 넙죽 받아 마셨고 중간 중간에도 카페인 중독자처럼 열심히 커피를 마시고 뾰족한 샤프로 손끝을 찔러보기도 했으나 벌칙은 누적되기만 했다. 삼 일 째인데 벌칙이 세 개였다, 흑흑.

  

  

  “근데요, 이사님은 왜 여기서 일하시는 거예요?”

  “여기서, 라뇨.”

  

  

  수현은 언제부턴가 자신의 말투가 굉장히 편안해져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근데요, 라니. 얼마 전 같으면 술 마시기 전엔 꿈도 못 꿀 소리다.

  

  

  “사실 다른 부서 이사님들은 다 따로 일하시잖아요. 또 광고홍보부라고 해도 우리 팀만 있는 게 아닌데…”

  “여기가 1팀이지 않습니까.”

  “물론… 큰 마케팅 거리는 다 여길 거치긴 하지만 권력이 집중되는 기분이라서요.”

  

  

  일도 더 많아지고. 정시우 이사가 오기 전엔 각 팀별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일들이 다시 이쪽을 거쳐서 올라가게 되어서 일감이 배로 늘어난 터였다. 수현은 이 밤까지 일하게 된 주범이 제 옆에 앉아서 막힘없이 영문으로 요약본을 작성하는 이 멋진 남자라는 사실에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같은 남자임에 질투심이 안 드는 건 아니다. 지금 와서 질투해봐야 참 쓰잘데기 없는 거라서 그냥 무시하곤 있지만… 계단을 오를 때마다 보이는 페레가모 구두가 굉장히 탐났다는 건 비밀로 해둔다. 재킷에 붙어 있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태그를 볼 때마다 기분이 요상해졌다는 것도. 뭐 이 사람에게 그 정도 옷은 평상복이겠지. 일회용으로 입고 버릴 지도 모른다.

  

  

  “그래서, 싫습니까?”

  “아뇨… 싫은 건 아니구요.”

  

  

  수현은 말끝을 흐리면서 홱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으윽, 저런 식으로 사람 떠보듯이 물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려 죽겠다. 타닥타닥 급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수현은 슬금 눈을 옆으로 돌려 눈치를 봤다. 그러다, 그대로 정통으로 마주쳐진 눈에 수현의, 안 그래도 열이 올랐던 얼굴이 팍, 화산 폭발을 했다. 다행히 정시우 이사는 그런 수현의 얼굴을 모른 척 해주었다.

  

  

  “이수현 씨.”

  “…예?”

  “밤에 뭐합니까?”

  “가서 자야죠.”

  

  

  대체 이런 건 왜 묻는 거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마지막 한 문단을 쓰기 위해 모니터를 노려보던 수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밤에 뭐하냐니, 애인 없어 텅 빈 가슴 일부러 찔러대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는?”

  “…그냥 쉬죠.”

  

  

  정말 놀리는 거야? 수현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놀린다고 보기엔 너무 진지한 정시우 이사의 얼굴에 수현은 지금 저 놀리시는 건가요, 하고 물을 수 없었다. 밤에, 주말에 뭐하는지가 뭐가 중요한가요. 지금 저한테는 이 요약본을 다 쓰는 게 최고 목표입니다. 이것만 다 쓰면 만렙! 찍는 거라구요.

  

  

  “오늘 저녁엔?”

  “저녁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었는데요…”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에 수현은 한숨만 내쉬었다. 집에 가서 씻고 자기도 바쁘다. 뭐 오락프로그램 하나 정도 보면서 맥주 한 캔을 뜯어 마실 정도는 되겠지만. 

  

  

  “그럼 밤엔?”

  “집에 가서 씻고… 어제 구워먹다 남은 오징어랑 맥주 한 캔 뜯을까 하구요.”

  “같이 마시죠.”

  “예… 예?”

  “술 마실 거란 소리 아닙니까.”

  “이사님, 그 맥주는…”

  “맥주 비싼 걸로 사주죠.”

  

  

  맥주는 딱히 술이라서 마시는 게 아니라 그냥 갈증 나고 그러니까 밤에 개운하라고 마시는 건데요, 라고 잇고 싶었던 수현의 말을 허리도 아닌 모가지에서 턱 잘라버린 정시우 이사가 빨리 쓰라고 수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옆구리가 심하게 약한 수현은 파드득 놀라 의자를 확 밀어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예민한가보죠?”

  “그… 간지럽네요.”

  

  

  얇은 셔츠 위를 슥슥 문지르면서 수현은 다시 슬금 컴퓨터 앞에 와서 앉았다. 수현은 왠지 쓰기가 싫어졌다. 다 쓰면, 목덜미를 붙잡혀서 술집으로 끌려가게 될 거다. 그냥 밤을 새우는 게 나을 지도… 

  싫지는 않은데, 음, 싫지는 않아. 친절하고 매너 좋고 돈도 많고 잘생기기까지 한 이사님이거든. 질투심은 좀 들지만 보고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얼굴이라고, 특히 웃으면 남자 얼굴 보고도 가슴이 뛸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흐뭇한데. 그런데, 왜 이렇게 바싹바싹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드는 걸까. 바람 앞의 촛불… 아니 휑한 초원에 버려진 초식동물처럼…

  

  

  “다 썼어요?”

  

  

  목덜미를 슥 쓰는 손에 수현은 힉, 하는 소리까지 내면서 놀랐다. 목덜미 반쯤을 덮은 머리카락을 우연인양 헤치고 손가락이 맨살에 닿았다 떨어졌다. 안 그래도 예민해져 있던 수현은 까끌한 지문까지 다 느껴지는 것 같아 소름이 다 돋았다.

  

  

  “예민하네요.”

  

  

  좋지, 예민한 거.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얼굴에 걸린 알 수 없는 미묘한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요리방법을 고르고 있다는 것도 아마 먹히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거다.

  

  

  

  

  

  

  

  

  

  

  

  수현은 앞에 놓여진 비싼 수입 병맥주를 쥐고 헤실헤실 웃었다. 싫다는 둥 말은 많아도 우선 마시고 나면 기분은 좋아진다. 얼굴 풀어지는 건 예사요, 몸 풀어지는 것도 금방이다. 맥주도 급이 있구나, 냐항, 소리를 내면서 수현은 홀짝홀짝 잘만 마셨다. 안주도 비싼 과일 안주다. 물론 맥주엔 치킨, 치킨엔 맥주, 일면 치맥이라는 진리중의 진리가 있기는 하지만 과일 안주는 비싸니까 만사 오케이다. 

  달디 단 파인애플을 한 조각씩 집어먹으면서 수현은 꽤 편하게 정시우 이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살짝 씩 묻는 개인적인 이이기도 술술 풀어낼 만큼. 직접적으로 묻는 게 아니라 살살 달래가면서 정보 하나 내어주고 그쪽 정보 하나 달라는 듯이 말하면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누나들과 어머니가 지방에 있다는 가족정보도 슬쩍 빼내고 이젠 연애사까지 끌어낼 참이다.

  

  

  “수현 씨는 연애 안 하나 봐요?”

  “아… 연애. 이사님은요?”

  “바빠서.”

  “저두요.”

  

  

  히힛, 푹신한 의자에 조금 뒤집어진 뒷머리를 빗으면서 수현은 목을 울려 웃었다. 냉큼 저두요, 하고 말한 게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단순하게도.

  

  

  “바쁘다고 연애 못하는 건 아니죠.”

  “이사님도 바빠서 연애 못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바쁜 거랑 수현 씨가 바쁜 건 좀 다르지.”

  “그냥 뭐… 딱 꽂히는 사람이 없어서요. 반하면 바쁘고 뭐고 상관없죠.”

  “어떤 타입이 꽂히는데요?”

  “…소개라도 시켜주시게요?”

  

  

  설마, 내가 미쳤냐. 정시우 이사는 속내를 숨기고 얼굴에 표정을 그렸다. 아주아주 온화하고 너에게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을 다 소개시켜 줄 수 있다는 듯이. 열반에 든 부처의 표정이 저렇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요.”

  “음… 여자라…”

  

  

  수현은 꽤 오랫동안 골몰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연애라고 부르긴 좀 미흡하지만 사귀던 사람이 있긴 했는데 딱히 타입이라고 집어낼만한 것이 없었다. 특히 외모적으로는 다들 너무 들쑥날쑥했다. 

  

  

  “다정한 거?”

  “다정?”

  “좀 착하고… 잘해주고… 뭐 이런 거요.”

  

  

  착하고 잘해주고 다정한 거… 성질 죽여야 한단 소리군.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열심히 들이킨다. 하지만 누워서 마신 김칫국조차도 체하지 않고 사레도 안 들릴 자신이 정시우 이사에겐 있었다. 침대 위에서만 저런 거 안 바란다면야… 뭐 침대 위에서도 충분히 잘해줄 수 있다. 눕혀놓고 한 시간 동안 물고 빨라고 해도 할 자신이 있다. 전희를 별로 하는 편이 아닌데 왠지 끌린다. 

  진짜 꽤 좋다. 얼굴도 단정하니 곱고, 귀여운 거야 구구절절 다 말했으니―술 마시면 더할 나위 없고 술 안 마셔도 깽깽 까탈스러운 것마저도 귀엽다― 끝이고, 착하고… 모양 예쁜 입술이 포옹, 벌어지는 것도 귀엽다. 말랑할 혀끝도 꼭꼭 한 번 씹어 봤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이사님, 좋아해요. 부끄부끄.’ 하고 한마디 하면…

  

  

  “…이사님?”

  “뭡니까.”

  “이사님은요? 라고 물었는데요.”

  

  

  뭐가… 대화의 맥조차 잊을 정도로 생각에 빠져있던 정시우 이사가 다시 확 넋을 붙잡아 왔다. 잘못했다가는 거기까지 세울 뻔 했다.

  

  

  “너무 여러 가지라서.”

  “뭐… 어차피 제가 이사님께 여자 소개시켜 드릴 것도 아니구요.”

  

  

  묘하게 시무룩해진 수현이 밑에 약간 남아 찰랑이는 맥주를 쭉 들이켰다. 날름 입술에 톡 떨어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핥아먹고 수현은 방울토마토 꼭지를 뜯어 입에 넣었다. 평소엔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서―이상한 분위기는 정말 초식동물처럼 잘만 알아낸다― 지금은 아주 햇빛을 살라먹은 양 이글이글 타오르는 노란 눈빛엔 반응조차 하지 않는 수현이었다. 

  

  

  “벌써 1시! 이사님 집에 가야…”

  “…….”

  “…겠는데요.”

  

  

  정시우 이사의 눈을 보고 멈칫했던 수현이 다시 스르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눈에 뵈는 게 없다. 히히힛 웃기만 바쁘다.

  

  

  “…가죠.”

  “제가 계산 할게요, 이사님.”

  

  

  씩씩하게 계산대로 향해 가던 수현은 뒷덜미를 붙잡혀 우악스럽게도 끌려 가게 밖으로 밀쳐졌다. 이번이 약소하나마 빚을 되갚을 찬스라고 생각하고 계산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수현으로선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이사 생각을 좀 해주기로 했다. 이사 체면에 말단 대리한테 얻어먹는 게 좀 쪽팔리기도 했을 거다. 이잇, 하고 열을 내던 수현은 문을 열고 나오는 정시우 이사의 모습에 다시금 웃음을 띠웠다. 상사는 곧 죽어도 상사니까.

  

  

  “저, 택시타고 가겠습니다.”

  “차 놔두고 택시는 무슨 택시. 타요.”

  “이사님 술도 드셨고…”

  “미안하지만 난 맥주 반 병도 안 마셨습니다.”

  “그… 시간도 늦었고…”

  “어차피 가는 길입니다.”

  “피곤하시고…”

  “더 피곤하게 하지 말고 타요.”

  

  

  아, 예… 수현은 느릿느릿하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왠지 풀죽은 토끼 귀가 보이는 것 같아 정시우 이사는 들리지 않게 속으로 큭큭대며 웃었다. 저런 게 참을 수 없이 자극한단 말이지, 막 속에서 좋다는 감정이 뭉글뭉글 솟게끔. 

  

  

  “이사님, 되게 좋으신 분 같아요.”

  “…진심입니까?”

  “처음엔… 낙하산 같아서 좀 그랬는데 일도 많이 도와주시고 부사직원도 잘 챙겨주시고.”

  

  

  처음엔, 하고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몰라 말을 길게 끌다가 수현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일명 부칭―부정 후 칭찬―을 썼다. 이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칭찬만 기억하기 마련이다.

  

  

  “낙하산이라…”

  

  

  정시우 이사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그! 처, 처음만요. 정말 제일 처음만.”

  

  

  손톱 만큼이었다니까요? 이사님 몸뚱이에서 손톱 만큼이면 얼마나 작은 건지 아시죠? 그러니까 그렇게 조금! 조금이라니까요. 수현은 금세 푸르딩딩해진 정시우 이사의 눈빛에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정시우 이사는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듯 다시 운전에 열중하는 척 했지만 흘끔흘끔 저를 훔쳐보면서 눈치를 살피는 수현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수현 씨는 머리가 꽤 기네요.”

  “아, 머리 자르러 가야 하는데 시간이 안 나네요.”

  

  

  하하, 웃으며 말을 잇던 수현은 제 뒷목을 턱 잡는 커다란 손에 화들짝 놀랐다. 술을 마셔서 더 예민해진 신경이 파닥파닥 날뛰었다. 느긋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뒷목을 주무르는 손에  공간이 좁아 피하지도 못하고 떼라고 하지도 못한 채 수현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현의 뒷목은 성감대였다. 저건 우리 부장님보다 높은 이사님 손, 이사님 손이다. 그러니까 아무 느낌 없어야 정상이다, 정상이다, 정상이다… 근데 눈앞에 있는 건 멀끔하게 잘생겼다는 말로도 부족한 얼굴일 뿐이고!

  

  

  “피곤하죠?”

  “아뇨, 괜찮습니다.”

  “상사 비위 맞춰주는 것도 피곤할 테고.”

  “괜찮은데…”

  “일도 피곤한데. 그죠?”

  

  

  아, 그러니까 피로 풀어주려고… 근데 왜 만지는 게 되게 좀 그렇지? 안마는 목덜미를 떡 주무르듯이 세게 세게 주물러줘야 뭐 풀리기라도 하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애무라고 부를 수밖에 없구나. 뒷머리카락을 약하게 잡아당기고 뒷덜미를 살살 쓸 때마다 솜털까지 오소소 일어나는 기분이다. 늙고 배불뚝이 아저씨면 성희롱이라고 생각해도 될 만한 행동인데 우선 얼굴이 저러니 그런 생각은 할 수가 없다. 저 사람이 대체 뭐가 부족해서, 나를!

  

  

  한 손으로 운전하면서 정시우 이사는 수현의 뒷목을 아주 제 것인 마냥 만져댔다. 스스로도 좀 놀랐다. 그렇게 열심히 만져댈 생각은 없었는데 손을 대고 보니 떼어지질 않았다. 변태 중년도 아니고 뒷덜미에 환장하다니. 차를 세우고 나서야 정시우 이사는 수현의 뒷목에서 손을 떼어냈다.

  

  

  “피로 좀 풀렸나요?”

  “…예.”

  

  

  피로가 풀릴 리가 있냐, 수현은 안 그래도 피로했던 몸을 긴장시키고 있느라 진이 다 빠졌다. 

  

  

  “들어가서 쉬고 내일 봅시다.”

  “예. 이사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에서 내려 문을 닫기 전에도 한 번 꾸벅 인사를 한 수현이 몇 발 걷다 다시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서 있는 차를 보곤 흠칫 놀라 후다닥 발을 옮겼다. 

  

  

  “이수현 씨.”

  “…예?”

  

  

  오피스텔 입구에서 턱하니 제동이 걸렸다. 수현은 뻐거덕하는 움직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차에서 내린 정시우 이사가 까딱 손짓을 했다. 이리와, 하는 거 같긴 한데 무슨 강아지 부르는 것마냥.

  

  

  “벌칙 하나 감해줄까요?”

  

  

  근데 그 벌칙이 뭡니까, 이사님. 수현은 고개를 한 번 갸우뚱했다. 벌칙 자체가 뭔지를 모른다, 여전히. 알려준 적도 없고 수현은 딱히 알고 싶지 않았고. 그러니 마음가짐이 제대로 안 되어서 계속 졸았던 걸지도. 

  

  

  “벌칙이 뭐예요?”

  “뭘까요.”

  “음…”

  

  

  수현은 고민해 봤지만 제가 저 정시우 이사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한 풀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약간 들어간 알콜에 평소보다 조금 더 젖은 눈을 하고 올려다보는 수현의 얼굴에 정시우 이사는 키가 큰 것이 이래서 좋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꽁꽁 둘러싸서 어디 숨겨놨으면 좋겠다. 불쑥불쑥 드는 위험한 생각들이 아주 이젠 대놓고다.

  

  

  “알려줄까요?”

  “하나 감해주신다면서요.”

  “뭔지 알려주면서 감해주면 되지.”

  “그래도 두 개나 남는데…”

  “그건 나중에 수현 씨가 열심히 하면 감해줄게요.”

  

  

  그러니까, 대체 뭔데. 수현은 계속 말만 하고 알려주지 않는 정시우 이사가 조금 얄미워 샐쭉이 눈을 흘겼다. 하지만 곧 공황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잘생긴 얼굴이 좀 가까워진다 싶더니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듯한 마찰음이 들렸다. 이건 뭐지, 수현은 멍해진 얼굴로 다시 멀어지는 얼굴을 보고 있었다.

  

  

  “침질까지는 안 하고. 침질은 수현 씨가 먼저 했지.”

  

  

  셔츠에. 수현은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시우 이사가 제 뺨을 툭툭 칠 때까지도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수현은 정신이 들었다. 제자리에서 허둥지둥 파닥파닥 거리다 수현은 오피스텔로 날 살려라 하고 뛰었다. 뒤에서 울리는 웃음소리에 오피스텔 입구 계단에서 발까지 걸릴 뻔 했다. 이게 뭐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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