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우 이사는 완전한 엘리트 그룹이었다. 잘생겼고 집안 교육으로 매너도 꽤 좋았으며 머리까지 타고난 아주 우성인자의 표본이었다. 하지만 그를 조금 더 깊이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하반신 따로 노는 절륜 짐승’
그는 생긴 것만큼이나 여자든 남자든 줄줄 따랐고 이런 뻔한 소설의 당연한 수순으로 그것도 잘했다. 즐기기도 즐겼다. 세간에는 입으로는 능청스럽게 매너 있는 소리를 다 하면서 허리 아래는 완전 자동인형 뺨치게 쑤셔 넣는다는 이야기―딜도 따위 개나 주라지―가 신빙성 있게 돌았다. 예를 들자면 ‘아픕니까? 천천히 할까요?’하고 물으면서도 허리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사실 이것도 축소된 것에 불과했다. 성인 남성의 표준 크기를 쉽게 넘어서는 그의 아래는 꽤 닳고 닳은 바텀 들도 아파했지만 그는 절대, 한 번 들어간 걸 빼내주진 않았다. 우선 들어가고 나면 그 이후론 쌀 때까지 안 빼주는 거다.
근데 그런 그가 금욕을 하고 있었다! 묶여 일하는 것이 싫어 귀국 후 스트레스를 왕창 받아 회사를 제대로 나가기 전까지 거의 하루에 한 놈씩 아래를 뚫어버리는 게 일이었던 그가. 근 2주 째 아무도 안 끌고 나가는 거다. 그 때문에 이 고급 게이 바의 점주인 시영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 있었다. 바텀 들이 아주 색기 혹은 안달이 가득 차서 그를 쳐다보는 터에 바 안이 무슨 페로몬 향수를 한 들통 엎어놓은 것 마냥 큼큼한 냄새가 감돌았다.
“악!! 제발 아무나 데리고 나가서 자줘!! 자달라고! 아니면 오지 마!”
“시끄러.”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던데… 너 그러다가 아래 썩는다. 어? 정액 차서 썩는다고.”
“헛소리.”
“절륜 짐승이 왜 도를 닦냐고! 짐승이 도 닦는다고 사람 될 수 있는 줄 알아?”
시영은 정말로 정시우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2주 전부터 멍하니 풀린 눈을 하고 와서는 술만 마시다 가는 거다. 지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마시고 간 토끼도 아니고 왜 섹스하러 와서 술만 마시고 가는데?
“저기 봐봐. 완전 네 스타일이지? 늘씬하고 도도해 보이는 스타일 말이야.”
“음…”
“죽이지? 쟤 내가 좀 오래 봐왔는데 괜찮은 애야. 뒤끝 없고 깔끔해. 저렇게 생겨서 침대 위에서는 적극적이고. 어? 어때.”
“별로.”
“그럼…”
“새끼 강아지 같은 거.”
“새끼 강아지?”
“아, 강아지면 강아지고 개새끼면 개새끼라고 했던가.”
정시우 이사는 상기된 얼굴로 빽소리를 지르던 수현의 얼굴을 떠올리곤 술잔을 쥔 채 웃어댔다. 아, 그냥 죽을 때가 됐다보다,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야. 시영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영업용 스마일을 얼굴에 걸었다. 미친놈 쪽으로는 잘 때 머리도 안 두는 게 예의지, 시영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야.”
“왜.”
“가장 효과적인 작업이 뭐냐?”
“뭐? 누구한테?? 어디어디. 네가 작업 걸 인간이 어디 있는데?”
평생 작업을 걸려보기만 했지 걸어본 경험이 없는 정시우 이사로선 작업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이질감이 굉장히 컸다. 왠지 수현에겐 그런 말이 잘 어울리지도 않고. 우쭈쭈쭈 달래서 끌고 오면 될 거 같긴 한데 울어재끼면―말대꾸 하고 그러는 걸 보면 의외로 깡이 세서 그럴 것 같진 않지만― 그것도 곤란하다. 아니면 야금야금 풋인더도어 효과라고 하나하나 스킨십 늘려가고 같이 있는 시간 늘려 가는 방법도 있겠지. 머릿속으론 수만 가지 방법들이 다 떠다녔지만 차마 실행으로 옮기진 못한 그다. 왠지 수현 앞에서 이도저도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아, 역시 세상은 공평해. 얼마나 도도한 철벽이면 천하의 정시우가 작업을 건단 말인가. 이제까지 너 때문에 눈물 콧물 다 쏟아낸 인간들의 원한이 쌓여 되돌아오리니.”
시영은 마치 주문을 걸 듯 손을 맞잡고 눈까지 감은 채 중얼중얼 악담을 퍼부어댔다. 인생지사 공수래공수거, 고진감래 따위의 말도 안 되는 한자성어들을 읊어대다 번쩍 눈을 떴다.
“근데, 누구?”
“…….”
“누구냐고.”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느긋한 웃음을 짓는 멀끔한 얼굴에 시영은 열이 올랐다. 꼭 저렇게 말 안 해주더라, 사람 궁금하게 해놓곤!
“누구냐고 묻잖아!!”
“알아서 뭐하게.”
“구경 가게. 니네 회사 사람이겠지?”
새끼 강아지 과라고? 그래 좋아… 시영은 작은 수첩에 몇 가지 단서들을 적었다. 저러다간 정말 회사 앞에 와서 죽치고 앉아 기다릴 지도 모른다. 그러다 한숨을 푹 쉰 시영이 한탄조로 웅얼댔다.
“그래도 절륜 짐승은 애들 똥꼬 좀 찢어줘야지. 요즘 손님이 없다고 형이 계속 찡얼댄단 말이다.”
시영의 형은 항문외과 의사였다.
“시끄러.”
“무슨 말만 하면 시끄럽대.”
흥, 코웃음을 치고 정시우에게서 홱 몸을 돌린 시영은 다른 손님들과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밤이라 푸릇한 느낌이 나는 날렵한 턱을 쓸면서 잘생긴 이 남자는 뒤를 한 번 슥 훑어보았다. 저요, 저요! 하고 손이라도 들고 싶은지 몸까지 들썩이는 수많은 남자들을 일별하고 그는 턱을 괸 채 흐릿하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타입이 아닌데 계속 눈이 가니 이거 참.
확 집어 삼켜 버리기엔 조금 아까웠다. 입맛만 다셨을 뿐 그는 수현을 곱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회식 때 알아놓았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수현이 깰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이러다 밤을 새울 것 같은 기분에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뭐지… 하고 정신을 못 차리던 수현은 가로등 역광을 받아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 때문에 식겁했다. 힉, 놀라 부들부들 어깨까지 떨어대는 걸 간신히 달래 집에 들여보내고 그는 생각했다. 저 정도면 둔한 것도 우승감이라고.
“토끼몰이 하는 거 같은데.”
이리 뛰고 저리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아니 정시우 손바닥 안이다. 그는 좀 더 수현을 풀어 놓기로 했다. 잘 먹고 잘 뛰논 토끼, 하룻강아지가 맛난 법이다.
수현은 골몰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잘 쥐어 팰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잘 때렸다고 소문이 날까, 이번 소문은 내가 알고 보니 라이트급 복서였다는 소문 정도면 만족스럽겠다. 하지만 상사를 때릴 순 없다. 수현은 부들부들 떨면서 꽉 쥐고 있던 주먹을 간신히 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까지 났다. 점심을 먹고 온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컴퓨터를 이렇게 완벽하게 맛이 가게 만들 수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정시우 이사랑 밥 먹고 오느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먹고 와서 기분이 별로 안 좋은 참에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였다.
“이 대리, 그게 말이야. 내가 이 대리 컴퓨터에서 꼭 써야 할 것이 있어서…”
“…MSN 말이죠.”
“그건 그냥 하다보니까… 그게… 몇 대 때리면 켜지지 않을까?”
“과장님.”
“어?”
“저 정말로 눈에 뵈는 게 없어질 것 같아요.”
수현은 먹통이 되어버린 컴퓨터를 울상으로 쳐다보았다. 그래도 삼일 전에 백업을 해둔 것이 있고 급한 일은 어제 부장님께 다 서류화해서 올렸으니 불행 중에 다행이긴 하지만 그제부터 해둔 프레젠테이션 준비 해놓은 건 그건 다 어찌하지.
“이 대리, 정말 미안해!”
“그럼 프레젠테이션 과장님이 해주실래요.”
“…….”
“그건 싫으시겠죠.”
푹, 한숨을 쉬고 수현은 우선 기술지원부에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제발 하드야, 살아 있어다오. 나 그거 다시 할 자신 없단 말이다.
“무슨 일입니까.”
“아, 이사님. 이 대리 컴퓨터가 말썽을 부려서요.”
“막 다뤘나 보죠?”
아니거든요! 아마 제 컴퓨터 이 회사 내에 있는 것들 중에 제일 빠를 거고 제일 깨끗할 거라구요. 회사 컴퓨터론 MSN도 안 하고… 거, 거의 안 하고 신문 기사도 안 읽고 이상한 동영상도 안 보고 게임도 안 하는데! 하지만 수현은 기술지원부에게 전화를 하느라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기술과장님은 얼마나 말씀이 많으신지 수현에게 평소에 컴퓨터를 막 끄지는 않았나, 이상한 프로그램을 다운 받지는 않았는지 별별 걸 다 묻는 터에 수현은 아니에요, 만 연발했다.
“수현 씨, 회사에서 야동 보고 그러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지금 오겠다는 기술과장의 전화를 탁 끊고 수현은 빽 외쳤다. 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라구요. 하드 다 뒤져봐도 깨끗한 사람이라니까.
“그런데 수현 씨는 어떻게 사람이 밥만 먹고 그렇게 쌩하니 올라갑니까?”
“예?”
“점심을 먹었으면 가볍게 차 정도는 마셔줘야죠.”
“…배가 불러서요.”
“커피도 안 마시고 오후에 안 졸 자신이 있나보죠?”
윽, 수현은 그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뭔갈 먹고 나면 몰려오는 식곤증은 수현이 제일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 수현은 잠이 부족할 경우 굉장히 멍해지는 편이고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래서 야근을 싫어했다. 정규 근무 시간에 열을 올려 최대한 많은 일을 해놓고 야근이라기보다는 추가근무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완전히 밤을 새워가면서 일을 하진 않았다. 쨌든 결론적으로 수현은 식곤증을 참을 자신이 없었다.
오늘따라 정시우 이사가 그윽…은 아니고 푸르둥둥…도 아니고 뭐라 형언할 순 없지만 요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터에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또 계속 그 눈을 풀지 않는 터에 수현은 정시우 이사가 식판을 가져다 놓으려 가는 틈을 타 도망을 쳤다. 사무실로 올라오면 언제든지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알지만 수현은 잠시나마 그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내가 본 바에 따르면 수현 씨는 꼭 오후에 졸던데.”
꾸벅꾸벅 봄볕에 내놓은 병아리처럼. 뭐, 작은 동물은 다 붙여도 어울린다. 수현은 키도 대한민국 남성 평균치는 넘고 몸도 야리야리한 편이 아닌데 왠지 모르게 귀엽다.
“졸 시간도 없어요. 하드 못 살리면 대본 다시 다 써야 하고… 프레젠테이션이 바로 삼 일 뒤인데!”
수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시우 이사가 온 틈을 타 이미 자기 자리로 돌아간 최 과장을 노려보다가 수현은 한숨만 쉬었다. 그래, 이게 다 내 업보지. 내가 전생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수현 씨가 오후 내내 안 졸면 도와주죠.”
“…예?”
“대신 한 번이라도 졸면 벌칙 하나.”
“윽…”
“그래도 일은 좀 도와주죠. 아무래도 하드가 살아있을 것 같지 않으니.”
툭 수현의 컴퓨터를 한 번 두드리고 정시우 이사는 며칠 전부터 얼굴에 그려 넣기 시작한 미미한 미소를 걸었다. 웃으니까 정말 더 매력이 생기는 구나. 너무 잘생겨서 더 이상의 발전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딱딱한 냉미남이 순간적으로 훈풍이 무는 훈훈한 남자로 변신하는데 수현은 저게 더 보기 좋았다. 저렇게 자주 웃으면 밥을 같이 먹는 것도 한결 쉬워질 것 같다. 잡아먹을 것 같은 눈 말고―수현은 의외로 눈치가 빠르다―.
기술과장의 등장으로 툭 팽팽하게 이어지던 분위기가 툭 끊겼다. 수현은 허둥지둥 그의 얼굴에 두고 있던 시선을 돌렸다.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를 시작하는 기술과장 쪽으로 돌아서서도 수현은 뒤통수에 박히는 시선에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윽, 이건 위험해, 수현은 붉어진 목덜미를 긁적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위험해.
정시우 이사는 깔끔하게 이사 회의를 뒤로 미뤘다. 요즘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이 꽤 커져서 저 없이는 회의가 돌아가지 않으니 아예 회의를 뒤로 미뤄버린 거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아직 자료가 다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수현이 조는지 안 조는지 한 시도 놓치지 않고 보기 위함이었다. 누가 알면 욕할 일이다.
그는 매우 즐거웠다. 남이 없었다면 콧노래를 불렀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른 두 해를 살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있었나 하고 인생 자체를 반추해보지만 딱히 짚이는 시기가 없었다. 그 정도로 재미있었다. 파티션 위로 다갈색의 머리통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마저 재미있었다. 분명 수현은 이것저것 서류를 들었다 놓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먹으면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을 거다. 이젠 바람에 구르는 낙엽에도 웃을 지 모를 일이었다.
“이사님.”
뭔가 미묘한 얼굴을 한 과장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점심시간 이후로 이사가 은은한 미소―평소 잘 웃지 않아서 오히려 반어적으로 무서운―를 띤 채 한 곳을 응시하고 있음이 그는 조금 무서웠다. 그것이 수현의 자리임에 자신이 망가뜨린 수현의 컴퓨터를 생각하니 뭔지 모를 오한까지 들었다.
다행히 컴퓨터는 켜지긴 했으나 포맷을 해야 했다. 수현은 머리를 쥐고 실제로 울지는 않았지만 엉엉 우는 소리까지 냈다. 팀원들 전부가 달래주고 격려를 해주었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닥친 일에 비하면 너무너무너무 부족한 것이라 수현은 그것들이 짜증만 날 뿐이었다.
“씨이―”
파티션 너머로 투정이 들려왔다. 정시우 이사는 앞에 과장이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작게 소리까지 내 웃고 말았다. 점점 더 요상하게 표정이 변하는 과장을 돌려보내고 서류를 들춰보지도 않은 채 그는 턱을 괴고 수현의 자리 쪽을 바라보았다. 파티션 때문에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머리통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건 잘만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할 일이 많아서 졸지는 않을 건가 보지.
“흐음… 곤란한데.”
졸아야 되는데. 그래야 그걸 빌미로 뭐라도 해보지. 적어도 밥 먹고 나서 커피 같이 마시기라든가… 볼펜을 손등 위에서 빙빙 돌리던 그는 뚝 움직임을 멈췄다. 너무 순진한 제 생각에 어이가 없었다. 커피 같이 마시기라고? 이 절륜한 하반신 짐승인 내가―스스로도 인정하는 바다.― 꼬꼬마도 아니고 벌칙으로 커피 같이 마시기를 요구한다고? 아무래도 수준이 하향평준화가 되는 것 같다.
꽤 좋은 실적을 내고 있는 TV 광고에 대한 서류를 읽으면서도 정시우 이사의 얼굴은 퉁명스럽기만 했다. 대충 서류를 읽고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수현의 머리통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졸고 있는 거다. 폭 고개를 숙인 채 구벅꾸벅. 그는 의자를 소리 나지 않게 밀어내고 일어났다. 책상을 휘 돌아 수현의 뒤에 자리를 잡고 그는 수현이 언제까지 조나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팀원들은 이수현 대리 오늘 날 잡았다고 불쌍하다는 식으로 속닥거렸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면 뭐라 말이라도 해보겠는데 이사 아냐, 이사… 우리는 힘이 없다. 그들을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
꾸벅 고개를 한 번 크게 숙였다가 이마를 책상에 박고서야 깨어난 수현은 주위 공기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황임에도 정수리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시선은 모를 수가 없었다.
“이수현 씨?”
“예…”
“내가 방금 이상한 걸 본 거 같은데.”
“아하하하하… 이상한 거라니요.”
“고개가, 꾸벅.”
“…….”
“잠깐 나와요.”
“예…”
수현은 마구 자학하기 시작했다. 난, 왜, 어째서, 그 졸음 하나 못 참고 왜! 가기 싫은 마음에, 목줄에 끌려가는 강아지처럼 수현은 질질 발 끄는 소리까지 내면서 느릿느릿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수현이 사무실 문을 닫자마자 사무실 안을 포화되어 있던 것이 펑 터지듯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대리 어떡하냐, 찍혀서 좋을 게 없는데, 정 이사 표정이 심상치 않았어, 그러게 각성제 커피라도 한 잔 마시지, 등등.
“커피.”
“…….”
“블랙?”
“…예.”
아, 불안해. 다짜고짜 화내는 게 낫겠어. ‘근무시간에 조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근무태만이군요!’라고 그냥 몰아붙여주시면 ‘죄송합니다, 흑흑.’하고 빌면 끝인데. 왠지 이 사람은 그럴 것 같지 않아 수현은 더더더더욱 불안했다. 친절한 태도로 커피를 뽑아 주는 건 그 불안에 부채질하는 짓이었다. 불안아, 타올라라, 활활.
“그러게 커피 사준다고 할 때 마시지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아직도 졸립니까?”
“아뇨.”
설마요, 지금도 졸린다고 하면 바로 모가지 치시게요… 수현은 종이컵을 받아들고 머리를 조아리듯 숙였다.
“이수현 씨, 프레젠테이션 요약본 작성은 언제 할 겁니까?”
“그게… 원본이 날아가서 곤란하네요.”
“후반부 파일 나한테 넘겨요. 반은 내가 할 테니까.”
“…예?”
“발표의 반은 내가 한다는 말입니다.”
이, 이사님. 이사님은 이사님답게 근엄하게 자리에 앉아 발표를 들으시면 되는 겁니다. 그 영국인만 잘 커버해 주시면 되는 거라구요. 수현은 점점 정시우 이사와 같이 있어야 할 시간이 늘어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어렵고, 신경 쓰이고, 부담스러웠다. 요상하기만 하고 맞추는 비율은 10프로도 안 되는, 일명‘촉’이라는 게 발동할 것 같았다. 솔직한 말로 촉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헛다리를 짚는 경우가 많아 소용이 없긴 하지만.
“이사님, 꼭 그러시지 않아도…”
“부하직원 힘들 때 돕는 것도 상사가 해야 할 일 아니던가요.”
그건 맞는데요… 사실 이사님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 친절하니까 더 이상하거든요. 보통 서른 넘으면 얼굴에 천천히 인격이란 게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사님은 암만 봐도 친절과는 좀 거리가 멀어 보이지 말입니다. 수현은 의외로 참… 눈치가 빠르다.
“수현 씨가 원래 해야 하는 일은 김 주임이나 박 과장한테 좀 나눠 놓고 오늘 내로 전체글 작성하세요. 그리고 내일은 요악문 작성하고.”
“예…
“마음에 안 듭니까?
“…아뇨.”
신나게 깨지러 나왔는데 이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지, 아님 찜찜하다고 해야 할지. 수현은 저도 모르게 볼을 살살 긁었다. 난감하고 민망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무섭게 사람 불러 놓고는 일 나눠서 해주겠다고 그러고―그것도 이사가― 커피 사주고… 수현은 왠지 오한이 들었다. 이렇게 빚을 만들어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왠지, 왠지, 왠지!! 이 사람은 지옥 끝까지 따라와서 빚 다 갚으라고 독촉할 거 같다.
“아, 한 가지 잊을 뻔 했네요.”
그럼 들어가서 일 보겠습니다, 하고 예의 바르게 돌아서던 수현의 어깨가 움찔했다.
“벌칙은 누적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