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4)

  

  

  언제나와 같이 프레젠테이션 발표자는 수현으로 결판났다. 수현은 꽉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난 왜 이렇게 가위바위보를 못하는 거지? 보통 공동 작업으로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기에 발표자 선정은 제비뽑기, 사다리타기, 그리고 압도적으로 가위바위보를 통해 이루어지곤 했다. 수현이 가위바위보를 못한다는 걸 안 이후로 직원들은 다른 수단은 강구할 생각도 없다. 무조건 가위바위보로 결판을 낸다. 그럼 거의 80%의 확률로 수현이 발표자로 낙점되곤 했다.

  

  

  “왜 또 나야…”

  “그럼 대리님, 수고해주세요. 파이팅!”

  “이번에 영국에서도 사람 온다면서요… 저 영어 듣기는 해도 말하긴 못한단 말이에요. 질문 하면 어떡해요.”

  

  

  수현은 정말로 그것이 걱정됐다. 어차피 프레젠테이션이야 몇 번 해봤고 또 이젠 아예 제 일로 정해진 것처럼 느껴졌기에 그렇게까지 반발심이 들지 않았지만 이번엔 영국 사람까지 있단다. 영어로 발표 하란 말까지는 안 했지만 그쪽에서 질문을 해오면 답변은 해야 할 텐데… 영어로 발표 요약본 만들어야 하는 것도 눈물 나는 상황에.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외국물 먹은 거 이때 써먹어야죠.”

  “이사님이 알아서 해주신다잖아.”

  

  

  끼어들며 툭 옆구리를 치는 차장님 팔꿈치에 수현은 몸을 뒤틀었다. 아프다고 했더니 우쭈쭈쭈 하고 애 달래는 소리를 낸다. 수현은 어이가 없어 허, 하고 허탈한 소리를 냈다.

  

  

  “차장님 네 애기는 그러면 울음 그쳐요?”

  “그럼!”

  “더 안 울고요?”

  “우리 정윤이는 아빠를 정말 좋아하지. 어쨌든 수현 씨 부탁해, 이사님이 도와주신다니까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겠어.”

  

  

  툭툭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엔 격려가 담겨 있었지만 수현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는 건 해도 쓰는 건 못하는데 요약본은 또 어떡해…”

  “그것도 도와주죠.”

  “…정말이세요?”

  

  

  수현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먹구름 속 한 줄기 빛살. 수현은 그때 정시우 이사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저질 영어로 발표문 작성할 생각을 하니 정말 눈물이 주룩주룩 나는 것 같았는데, 그 영국인이 읽고 풋풋 웃지는 않을까 걱정만 되고.

  

  

  “그럼 요약문 작성할 때 말해요.”

  “제가 작성하고 드리면…”

  “그것보단 수현 씨가 쓸 때 옆에서 바로바로 번역해 가면서 쓰는 게 좋을 테니까요. 미묘한 어감도 조절할 수 있고.”

  “예…”

  

  

  뭐 이사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고 수현은 길기도 긴 발표 내용을 쭉 훑어보았다. 프레젠테이션 파일 만드는 것도 일이겠다. 탁탁 종이들을 정리해 스테이플러로 찍고 수현은 여전히 제 앞에 서있는 그에게 뭐 더 할 말이 있냐는 듯 가만 시선을 보냈다. 단정한 얼굴선이 꼭 한 번 쓸어보고 싶게 생겼다.

  

  

  “열심히 해요.”

  “예.”

  

  

  뭔가 좀 이상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린 수현이 다시 일에 몰두했다. 슬프게도 이상하다고 깊이 있게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야근까지는 아니지만 수현은 며칠 동안 정시 퇴근은 꿈도 꾸지 못했다.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면서 또 제 할 일은 다 해야 했기에 당연히 근무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해 수현은 조금 울상이었다. 오늘도 봐, 다 갔는데 나만 이러고 있잖아. 마지막 오프라인 설문 자료를 클립으로 정리하고 수현은 쭉 기지개를 폈다.

  

  

  “아야야… 완전 굳었네.”

  

  

  열 시가 조금 못 된 시각을 확인하고 끙끙거리면서 수현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수를 좀 하고 퇴근할 생각이었다. 내일부터는 프레젠테이션 요약본을 써야 하니… 근무 시간 외에 쓰면 이사님이 귀찮으실 텐데. 그렇다고 단계적으로 사람 손을 타야 하는 본업을 두고 그걸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세면대에서 제 눈 밑을 꾹 눌러본 수현이 귀신같아, 하고 중얼거렸다. 다크서클이 줄줄 내려오고 있었다. 곧 얼굴을 지나 무릎께까지 내려올 거다. 손을 탁탁 털면서 뒤를 돌던 수현은 악 소리를 질렀다. 

  

  

  “노, 놀랐잖아요!”

  “내가 더 놀라야 할 시점 같은데요.”

  “왜, 왜요? 사람 놀라게 한 건 이사님이면서.”

  “귀신같은 건 수현 씨인데요.”

  

  

  수현은 다리가 다 후들후들 떨리는 것 같았다. 귀신같은 걸 많이 무서워하는 건 아니지만 누가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하는 건 죽을 만치 싫어했다. 공포영화도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깜짝깜짝 튀어나오는 게 싫었다. 부르르 몸을 한 번 격하게 떨고 수현은 꾹 제 눈 밑을 찌르는 손에 더 기함했다.

  

  

  “새끼 강아지처럼 떨긴.”

  “새끼 강아지는 또 뭐예요? 강아지는 개의 새끼라구요. 강아지면 강아지고 개새끼면 개새끼지…”

  

  

  놀라서 그런 건지, 정신이 없어서인지 수현은 평소라면 그냥 듣고 속으로 중얼대고 넘어갔을 이야기도 다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일은 다 끝났어요?”

  “예, 이제 갈 거예요.”

  

  

  조금 정신이 되돌아오고 나자 수현은 제가 이사 앞에서 ‘개새끼’를 연발했다는 걸 깨달았다. 뭐 욕한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강아지는 개새끼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수현은 말을 받았다. 

  

  

  “짐 챙겨서 나와요.”

  “예… 예?”

  “데려다 줄 테니까.”

  “아뇨,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아직 지하철도 다니고…”

  “수고하는 부하를 위해 이 정도는 해줘야 배려심 있는 상사겠죠.”

  “…비꼬시는 건 아니죠?”

  

  

  그렇게 단정하고 진심어린 얼굴로 비꼬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왠지 비꼬는 말투와 얼굴로 해야 어울릴 거 같은 말이었다. 수현은 그가 혹시나 비꼬는 거라면 굉장히 억울할 것 같았다. 물론 처음에는 되게 이리저리 꼬아서 보기도 하고 쪼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정말 좋은 상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럴 리가요.”

  “…짐 챙겨 올게요.”

  “주차장으로 내려 와요.”

  

  

  상사한테는 고개 끄덕이지 말고 말로 대답해야 하는 것도 순간 잊고 수현은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 흔들었다. 곧게 잘린 앞머리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잰 걸음으로 화장실을 빠져나온 수현이 컴퓨터를 차근히 끄고 갈색 가죽 가방에 서류들을 챙겨 넣었다. 예전엔 그냥 컴퓨터를 전원 버튼을 눌러 막 껐는데 그때 하드를 제대로 한 번 날려 먹은 이후론 아무리 급하고 빨리 가고 싶어도 컴퓨터는 다 일일이 다 끄곤 했다. 마지막은 모니터 전원까지 꾹.

  어째 오늘은 주차장 김 씨 아저씨가 안 보이네, 아직 차가 없어 주차장과는 그리 인연이 없는 수현이었지만 주차장 김 씨 아저씨와는 꽤 친했다. 면접 때 길을 잃은 수현을 친절하게 면접장소까지 데려다 준 것도 그였고, 이후 신입사원 오티 때도 그의 도움을 받았었다. 

  

  

  “타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수현의 앞에 은색의 새끈한 외제차가 한 대 섰다. 차 한 번 섹시하구나. 문 네 개짜리 세단이지만 두 개짜리 스포츠카처럼 매끈하게 유선형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처음도 아닌데요, 뭘.”

  “하하… 그렇네요.”

  

  

  이거 봐, 쪼잔하다니까. 분명 셔츠에 침질한 것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혹시 알아? 그 셔츠 빨지도 않고 놔둔 채 이 바득바득 갈지도? ‘이수현, 네놈이 감히 네 셔츠에 침질을 해놓고 자는 척까지 했지, 엉?’ 이럴 지도 몰라. 수현은 아무 쓰잘데기 없지만 아주 즐거운 상상에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뭐가 웃깁니까?”

  “예? 아뇨, 그냥…”

  “같이 웃읍시다.”

  

  

  수현은 괜히 넥타이만 만지작거리면서 이 사태를 어찌 빠져나가야 할지 골몰했다. 그냥 꾹 입 다물고 있을까, 하지만 이 은근 쪼잔한 이사님은 계속 캐물을 것 같단 말이야.

  

  

  “아, 이사님. 프레젠테이션 요약본 말인데요, 내일부터 쓸 건데 괜찮으세요?”

  “…뭐, 안 될 거야 없죠.”

  

  

  너 말 돌리는 거지, 라는 듯이 가득가득 담긴 묘한 눈길을 두루뭉술하게 넘겨버리고 수현은 웬만해선 잘 쓰지 않는 눈웃음을 택했다. 막다른 길목에서 마법과도 같은 점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눈웃음.

  

  

  “그런데 제가 할 일이 있어서 정규 근무 시간에는 힘들 것 같은데… 역시 제가 다 작성하고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럼 끝나고 하죠.”

  “예? 야근 하자는 말씀이세요?”

  “야근까지는 안 해도 될 거고 오늘 정도까지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회사에서 추가 수당 잘 나오지 않나요?”

  

  

  추가 수당이야 잘 나오죠, 잘 나오긴 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구 그럼 이사님이랑 저랑 둘이서 그 사무실에서 머리 맞대고 요약본 작성해야 한다는 소린가요…

  

  

  “싫습니까?”

  “아뇨. 그게 저도 편하긴 하죠, 하지만 이사님 불편하실까봐…”

  “안 불편합니다.”

  

  

  아, 예… 단호하다싶을 정도로 간결한 대답에 수현은 깨갱 꼬리를 말았다. 안 불편하다는데 계속 불편하시죠, 불편하시잖아요, 하고 찔러댈 필요는 없으니까. 그랬다가 정말 불편하니까 네가 다 알아서 해!! 이러면 인생이 바로 막장 되는 거다. 수현은 절대 영어로 그 글을 써낼 자신이 없었다.

  

  

  “춥습니까?”

  “아뇨… 좀 졸려서요.”

  

  

  에어컨 참 씨게도 틀어 놓으셨수다. 팔을 문지르면서 수현을 가물가물 감기려는 눈을 애써 떴다. 완전히 눈을 감았다가 화들짝 놀라 얇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가 다시 스르륵 눈이 감았다. 얇은 쌍꺼풀이 없어질랑말랑했다. 졸려 눈이 부은 탓이었다. 

  

  

  “수현 씨?”

  “예…”

  “졸려요?”

  “예…”

  

  

  약간 발음이 샌다. 녜…처럼 들리는 대답에 마침 빨간불에 차를 세운 그가 조수석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이수현 씨, 잡니까?”

  “…….”

  “자요?”

  “…….”

  “잠이 옵니까?”

  “…….”

  “이걸 확 집어 삼켜 버릴 수도 없고.”

  

  

  그냥 삼켜버릴까? 수현은 제 앞에서 맹수가, 흑표범이, 입맛을 다시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새끼 강아지, 아니 강아지, 아니 개새끼… 절충해서 하룻강아지 수준인 수현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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