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리님, 점심 어디서 드실 거예요?”
“사원 식당에서요.”
“중국 음식 먹고 싶지 않으세요?”
“외부 음식은 반입 금지입니다.”
“에이, 이 대리님, 너무 괴리가 심해요. 어제 노래방에서는…”
“더하면 화낼 거예요.”
씁, 눈을 올려 뜨면서 매섭게 노려보는 수현의 눈초리에 겁은 별로 나지 않았지만 인간적인 배려를 해주기로 한 김 주임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럼 이사님이랑 같이 드시면 되겠네요. 이사님도 사원식당 가신 댔거든요.”
“…예?”
“에이, 뭘 놀라세요. 어제 이사님이 대리님 뒷정리까지 하셨는데.”
수현은 지워버리고 싶은, 묻어버리고 싶은, 절대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김 주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쿡쿡 찔러왔다. 어제 수현은 노래방에서 부장님이 표현한 대로 날라다니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더 하라고 하지 않아도 한 번 시작되면 수현은 열심히도 놀았다. 노래 부르고 춤은 물론이거니와 폭탄주 제조까지 척척이었다. 이사님의 은총으로 주문한 건전한 노래방에서 제일 비싼 술인 잭 다니엘과 맥주를 고르게 섞어 마시고 수현은 노래를 부르다 필름이 뚝 끊겼다.
일어나보니 새카만 가죽 시트가 보였고 몸을 울리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제가 기대고 있는 이 따뜻한 것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다. 수현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고 술을 마시면 더했다. 대학교 때도 여름이건 겨울이건 술만 마시면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옆에 파고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꼬장 부리는 주정보단 훨씬 양호해서 별로 욕을 먹진 않았지만 가끔 난감한 일이 생길만한 버릇이긴 했다.
수현은 몸을 조금 뒤척거리다가 깨달았다. 이런 고급스러운 차는 단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것이었다. 부장님 차는 여전히 옛날 소나타였고 이번에 차를 뽑은 최 과장님 차는 꽤 고급이긴 했지만 이렇게 부들부들한 가죽시트는 아니었다. 그럼, 그럼 이 차는! 옆에 있는 이 사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예?”
“…아닙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수현은 마치 유령처럼 일어나 느릿느릿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내가 그냥 그러고 집에 갔으면 이렇게 쪽팔려 하지 않아, 이렇게 민망해 하지도 않고, 머리 박으면서 자학하지 않는다구. 수현은 정시우 이사의 셔츠에 침질을 해놓은 제 경악스러운 행태에 끝까지 술에 취한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술 마셔서 그래요, 그렇다고 믿어주세요, 수현이 지금 바랐던 건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 바람이 먹혀들었는지 이사는 수현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축축해서 기분 나빴을 텐데, 게다가 멋들어진 그 셔츠 안에 아무 것도 안 입으셨을 테니 더 찜찜하셨을 텐데 참아주셔서 감사해요, 수현은 그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야야야, 이수현!”
등을 휘갈기는 힘에 수현은 그대로 벽과 포옹을 하고 말았다. 매정한 벽은 수현이 안아온 힘 그대로 튕겨냈지만. 이마를 호되게 박은 터에 신경질 가득한 눈으로 돌아보던 수현은 윽, 하는 침음과 함께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아무래도 나… 마가 낀 것 같아.
“어제 회식에서 한 판 당겼다며? 신작 메들리가 나왔다는 말이 있던데.”
“하하하하… 설마.”
“내가 말했지, 내 귀는 뭐라고?”
“…김 주임 직통.”
“정답.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수현은 제 어깨에 팔을 두르는 친우, 대학교 때부터 끈질긴 인연으로 묶인, 진명의 얼굴을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놈은 왜, 대체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괴롭힐 것인가. 다른 건 몰라도 이놈이 김 주임하고 사귀는 것만은 무조건 막았어야 했다. 어떻게든. 그것이 극악한 사태를 낳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난 왜 그대로 두었을까.
“근데 어째 넌 저번 주에 피바람 불 때는 멀쩡하더니 지금 얼굴이 다 상했냐?”
“…몰라도 돼.”
수현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차라리 일감이 많은 게 좋다. 저번 주는 새 TV광고 때문에 거의 야근을 매일 한 수준이었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았던 거 같다.
“니네 이사는?”
“그냥 그렇지 뭐.”
“잘생겼던데.”
“…어.”
“그럼 마스코트 자리 뺏기는 건가?”
“…마스코트는 얼굴로 하는 거 아냐.”
“하긴 그 이사가 살랑살랑 춤은 못 추겠지.”
어쩜 저렇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같을꼬. 수현은 젓가락을 이마에 확 찔러버리고 싶다는 듯 진명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정시우 이사가 살랑살랑 어깨를 흔드는 춤을 추는 걸 상상해보았다. 아… 밥맛이 없어지려고 한다.
“내가 추는 건 괜찮고?”
“넌 귀여우니까!”
아, 그래… 언제부터 내 이미지가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분명 입사했을 때 내 이미지는 꽤 날카롭고 단정하고 담담하고 그런 편이었던 거 같은데. 수현은 어제부터 이어진 자학을 다시 시작했다. 벌써 땅은 들어가 눕고도 남을 정도로 팠다. 흙만 덮으면 끝.
“나도 덩치 있는 남잔데.”
“그럼, 덩치가 있진… 않지만 남자지. 하지만 귀여운 건 성별을 따지지 않아.”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어.”
“술의 문제가 아닌데. 넌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는 날 바싹 세워서 경계하지만 조금만 풀어지면…”
“귀여워지죠.”
진명의 말을 끊고 들어온 것은 이젠 조금 익숙해질랑말랑 하는 목소리. 수현은 툭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진명도 조금 놀란 듯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곧 그는 당황한 기색을 싹 지웠다. 처세와 화술의 달인다웠다.
“이쪽은…?”
“영업부 이진명 대리입니다. 정시우 이사님이시죠?”
진명과 가볍게 악수를 하고 그는 수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수현은 고개를 국그릇에 파묻을 것처럼 숙이고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썼다.
“숙취는 없습니까?”
“아? 예? …예.”
처음의 ‘아?’는 ‘내게 하는 질문인 건가요.’의 ‘아?’, 두 번째 ‘예?’는 질문 내용에 대한 ‘예?’.
“다행이군요. 집에 갈 때까지 못 깨길래 걱정했는데.”
“예… 죄송합니다.”
“뭐가요?”
“…예?”
“뭐가 죄송합니까?”
“아, 그게…”
수현은 숟가락을 쥔 채 안절부절 못했다. 어려워, 어렵단 말이다. 부장님하고 직급 차이는 하나밖에 안 나는데 위압감은 수억 배는 더 되는 거 같다. 그냥 묻는 건데, 은근히 웃는 얼굴로 묻는 데도 왠지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이건 물론 수현이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는 척 한 것도 셔츠에 침질 해놓은 것도 콕콕 찔려서.
“자는 척 한 게?”
이 남자, 설마 작두 타나. 수현은 정곡이 찔려도 제대로 찔려 윽, 하고 짧은 신음성을 냈다. 수현은 당황하고 이사는 질문하는 틈을 타 식판을 깨끗하게 비운 진명이 톡톡 배를 두드리면서 일어났다. 수현은 그나마 방패막이라도 되어줄 수 있는 그가 깔쌈하게 손까지 흔들며―다음에 또 뵙죠, 하는 인사까지 남기고― 사라져 버리자 완전히 절망했다. 티가 안 날 리가 없지, 안 났을 리가 없어.
“어디까지 하나 두고 봤는데 끝까지 자는 척 하더라구요?”
“저… 이사님, 그게…”
“뭐, 그건 됐고. 분명 김 주임이 수현 씨에게 말했다고 하던데 그냥 가버리는 건 뭡니까.”
“뭘요?”
“사원 식당에서 밥 먹는 거 말입니다.”
“아…”
물론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우리가 언제 밥 같이 먹자고 약속한 사이던가요.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복사하고 코팅까지 해줘도 같이 안 먹을 판에.
“섭섭했어요.”
“섭섭…”
뭔가 못 들을 소릴 들은 것 같은데, 수현은 귓속을 후비적거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간신히 주먹까지 쥐어 참아냈다. 기가 허해졌나봐, 이젠 헛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 저런 얼굴로 섭섭… 따위의 말을 한 건 아니겠지.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면서.
“내일부터는 같이 먹죠.”
“예… 예?”
“싫은가요?”
“아, 아뇨.”
막 싫어 죽겠는 건 아니지만 어느 평범한 직장인이 상사랑, 그것도 위로 위로 위로 고개를 완전히 꺾어 봐야 하는 상사랑 밥을 먹는 걸 좋아할까. 그나마 수현은 지금까지 상사랑 격렬하게 부딪쳐본 경험이 없어서 이정도의 저항만 있는 거다. 보통 직장인에게 상사가 저런 제안을 했다면 아무리 포커페이스에 얼굴 숨기는 게 능한 사람이라고 해도 바로 똥 씹은 얼굴을 할 건 자명했다.
쪼잔해, 은근 쪼잔한 거 같아. 매너 좋고 성격 좋다는 평가서는 다 무효야. 아직 도장 안 찍었으니까 무를 수 있다고.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수현은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자는 척 좀 했다고―옷에 침질한 건 잠시 잊기로 한다― 뭐라 그러고 저 안 데리고 밥 먹으러 왔다고 뭐라 그러고…
“…현 씨, 이수현 씨?”
“…예?”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모릅니까.”
“그냥 잠시…”
그렇게 봐도 어쩔 수 없어요, 댁이 쪼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할 순 없잖아요. 수현은 눈만 데굴 굴려 시선을 피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죠.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제가 삽니다.”
예에… 어찌 그 말을 거역하겠습니까. 자포자기한 수현은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커피가 입으로 들어갈지 코로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젊고 추진력 있고 잘생기기까지 한 정시우 이사는 집단 속에 잘도 융화됐다. 고르게 섞인 미숫가루처럼. 수현은 부장님이 한 잔 따라준 녹색, 갈색, 회색이 적절하게 섞인 미숫가루를 마시면서 그 생각을 했다. 어째서, 성격까지 좋은 거지? 좀 쪼잔하긴 하지만… 솔직히 그건 흠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리고 제 쪼잔하다는 의견에 김 주임도, 박 과장님도, 경리 아가씨도, 최 과장님도, 차장님도, 부장님까지도 고개를 저었다. 아주 화통하다는 완전 대립된 그들의 의견에 수현은 침묵의 나선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부장님마저도… 어떻게 자기보다 나이가 한 바퀴 차이나는 어린 상사를 두고도 아무렇지 않으실 수 있는 거지, 수현은 좌절했다.
“수현 씨?”
“…예?”
탁탁 마우스 클릭을 하다 수현은 제 이름이 들린 것 같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티션 위로 갈색의 머리꼭지가 상승했다.
“저 부르셨어요?”
“저번 주 시청률 분석표 어디 있습니까.”
“그거 부장님께 올려드렸는데…”
“우선 나한테도 한 부 줘요. 급하니까”
“예, 잠시만요.”
파일을 열어 인쇄 버튼을 누르고 수현은 다시 자리에 앉았… 앉으려고 했다. 커피 한 잔 마시자는 말이 없었다면. 커피 되게 좋아하네, 속으로 투덜대며 수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반쯤 굽혔던 무릎을 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오늘은 커피를 마시지 못해 약간 입이 심심했다. 미숫가루는 아침, 이제 후식으로 커피를 마셔야 할 참이었다.
깨끗하게 마신 미숫가루 컵을 들고 일어난 수현이 파티션 너머의 부장님에게 잘 마셨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가뭄에 콩 나듯 볼 수 있는 수현의 눈웃음에 부장은 허허, 하고 웃고 말았다. 가끔 저렇게 웃으면 수현은 되게 애교 있어 보이면서도 여우같아 보였다. 뭔가 부탁하면 안 들어주고는 못 배길 만한 웃음.
“…잘 웃네요.”
“예? 아…”
수현은 뺨을 살살 긁으면서 멋쩍어했다. 예전부터 눈웃음을 잘 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어떻게 보면 야살스러워 보인다는 말이라 별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라서 되도록 눈으로 웃지 않으려고 하는데 편하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감 없이 나오곤 했다.
“이사님도 잘 웃으시는데요.”
뭐 워낙 잘생기셔서 무표정으로 있으나 조금 웃으나 화를 내나 잘생긴 건 변하지 않지만. 어떻게 보면 마이너스일 수도, 아무리 표정이 변해도 매력은 언제나 최대치니. 더 발전할 수 없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기도 하지. …발전할 게 너무 많다는 것도 슬픈 일이긴 하지, 흑.
“저는 블랙으로 주세요.”
“…달게 먹었던 거 같은데.”
그렇다. 그가 사내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샀을 때는 제일 비싼 걸로 먹었다. 이름도 길고 길어서 기억도 안 나는. 무척이나 달고 달아서 종래엔 헛구역질까지 나던. 그것이 그저 약간의 심술이었음을 수현은 말할 수 없었다.
“그냥 때때로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뭐.”
대충 무마하고 수현은 따뜻한 종이컵을 받았다. 회사 자판기 커피는 가격 대비 최대의 효과를 낸다. 그 덕에 사내 직원들에게는 커피 안에 각성제를 타는 게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었다. 정말로 의심이 깊었던 한 직원이 커피의 내용물을 크로마토그래피로 추출해 보았지만 각성제 성분은 발견되지 않았다고는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 커피에 정말로 각성제 성분이 있는지 없는지는 의문이다. 수현은 그저 크로마토그래피까지 해볼 생각을 한 집착성 짙은 그 직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낼 뿐이었다.
수현은 자판기 종이컵을 든 것마저도 그림이 되는 남자를 입에 종이컵을 문 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 든 종이컵은 무슨 백금 칠이라도 해놓은 것마냥 빛나는 것이냐.
“바꿔 마실래요?”
“예?”
“수현 씨 것이 더 맛있어 보이네요.”
어어, 헐겁게 쥐고 있던 종이컵이 빠져나가고 바로 그 틈으로 다른 종이컵이 들어왔다. 조금 더 쉬다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정수리 부근을 톡 손끝이 치고 지나갔다. 키 크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똑같은 거잖아.”
커피를 홀짝 한 모금 삼킨 수현이 뭐가 다른 건가 싶어서 종이컵을 좌우로 위아래로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 커피가 그 커피, 그 종이컵이 그 종이컵. 뭔가 뇌리를 스치는 이상한 기분에 수현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신 차려, 이수현. 도끼병으로 착각할 상대가 따로 있지. 다른 거 뽑아준 줄 알았나 보다. 아마 자기도 지금에서야 다른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황당해 하고 있을 거야, 애써 합리화를 하고 수현은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홀짝 다 마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