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피를 토하느라 차 회장은 짧은 문장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차 회장은 몰랐다. 뱀. 아니, 뱀도 되지 못할 한낱 지렁이 새끼가 알고 보니 강 아래서 기척을 숨긴 채 승천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무기였다는 걸. 오늘이 바로 그 승천의 날이었다. 하늘이 울리게끔 천둥 벼락을 내리치며 이 썩은 땅을 갈아엎을 때였다.
“평생을 내려다보며 살던 버러지들 손에 죽게 되는 기분이 어떠세요?”
“네…, 네가 감히….”
색색, 듣기 싫게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차 회장의 탁한 눈동자가 자꾸만 위로 넘어가려고 했다. 경동맥을 제대로 찔린 사람은 20초도 안 돼 사망에 이르렀다. 일흔 가까이 된 노인이 이 정도 버텼으면 오래 버틴 것이었다. 차우현은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니까 왜 결이를 건들려고 하셨어요.”
“…….”
“그러지 않으셨으면 저도 이렇게까진 안 했을 텐데.”
뒤늦게 들이닥친 호텔 보안요원들이 세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상철은 손에 들고 있던 택티컬 나이프를 바닥에다 던지고 순순히 투항했다. 보안요원들이 달려들어 재빨리 한상철을 제압했다. 그사이 차 회장의 눈이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 차우현은 익은 생선을 연상케 하는 불투명한 흰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피범벅이 된 손으로 차 회장의 눈꺼풀을 덮어 줬다.
‘안녕히 가세요. 회장님. 아니, 아버지.’
마지막 인사는 속으로만 조용히 건넸다.
아, 드디어 모든 게 끝이었다.
***
‘형 아직 집에 도착 안 했으려나?’
오늘 우현이 CH그룹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고결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13분이었다. 행사 시작 시간이 1시인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쯤이면 거의 다 끝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귀국한 고결은 집에 들러 캐리어 가방만 넣어 둔 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우현의 집으로 향했다. 지난 2주간 우현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우현과 알게 된 이후로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가 생각을 정리하는 데 방해가 될 거라 생각한 건지 그 2주 동안 우현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조금 서운했는데 제 손목에 둘려 있는 시계처럼 그 역시 우현의 배려라 생각하니 금방 기분이 나아졌다.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으면서 각인을 가릴 수 있는 시계를 선물해 준 건 우현의 배려였다. 어디까지나 저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택시 뒷좌석에 앉아서 고결은 매끄러운 시곗줄을 만지작거렸다. 일본에서의 시간은 바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바쁜 와중에도 고결은 우현이 말한 대로 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고민 끝에 다다른 결론은 우현한테는 미안하지만 아직은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제가 우현의 짝이라는 것을 알릴 자신도, 회사를 그만둘 자신도. 이 감정이 사랑인 것 같다던 우현의 말을, 그 마음을 믿을 자신도.
우현이 느끼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또 다른 종류의 책임감. 혹은 자신이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탓에 그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제 페로몬에 계속 노출된 탓에 억제제까지 먹어야 했던 우현이었다. 어쩌면 페로몬이 몸뿐만 아니라 심리에도 영향을 끼쳤을지 몰랐다. 두려움에 뛰는 심장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흔들다리 효과처럼.
언제까지일진 모르겠으나 일단은 지금 이대로 지내고 싶었다. 자신은 Z의 매니저로 일하고, 우현은 서형과 함께 일하면서. 이건 아마 우현이 기대한 답이 아닐 것이었다. 우현이 이런 저를 이해해 주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지만 그래도 용기 내 말해야 했다. 우현이 2주 동안이나 기다려줬으니 더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을 들려줘야 했다. 사실 시간을 더 끈다고 해서 제 마음이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바로 우현을 찾아온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린 고결은 자연스럽게 고급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집으로 올라가기 전 습관처럼 우현의 앞으로 온 우편물들도 챙겼다. 역시나 제가 없는 동안 이쪽엔 시선조차 주지 않은 건지 고지서가 조금 쌓여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우편물을 하나씩 대충 살펴보던 고결의 얼굴이 작게 구겨졌다.
본래 우현한테 오는 거라고는 몇몇 고지서가 전부였다. 팬레터나 선물 같은 것은 전부 회사로 받기 때문에 여기로 올 일이 없었다. 그런데 우편물 사이에 웬 편지가 하나 껴 있었다. 하얀색 편지 봉투에는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여기로 와서 직접 넣었다는 소리인데…. 혹시 스토커 그런 건가? 아니면 사생? 고결의 인상이 조금 더 사납게 변했다. 어쩌면 안에 이상한 게 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혈서나 칼날 같은. 과격한 팬 중에 종종 그런 물건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는 얘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대로 우현한테 전해 주기에는 위험했다.
띵.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고결은 넓은 복도를 걸어가며 편지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편지지도 아닌 그냥 A4용지가 들어 있었다. 피 같은 건 비치지 않는 걸 보니 혈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현이 준 여분의 카드키로 도어록을 해제한 고결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거실은 조용했다. 혹시 몰라 안방의 문도 열어 보았으나 우현은 없었다. 우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소파에 앉은 고결이 하얀 편지 봉투에서 가로로 길게 접힌 A4용지를 빼냈다. 혹시 몰라 봉투 안을 살펴봤으나 따로 더 든 것은 없었다. 종이를 이리저리 구부려 봐도 칼날처럼 위험한 게 나오지는 않았다. 고결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A4용지에 적힌 글씨를 읽어 내려가는 고결의 얼굴이 점점 희게 질렸다.
「차우현 씨.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에 나는 경찰한테 잡혀 있겠죠. 당신은 병원에 누워 있을 거고. 아마 수술을 받아야겠죠? 모쪼록 무탈하길 빕니다. 내가 찌를 텐데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당신이 나를 찾아와서 차 회장을 죽이자고 했을 때,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걸 후회하지 않아요. 나는 이제야 비로소 미연이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됐습니다. 어차피 내 목숨은 그날 차 회장의 집 앞에서 불에 태워져 한 줌의 재가 돼야 했어요. 그런데 그 목숨을 유지한 대가로 이렇게 복수를 하게 됐으니 잘된 일이죠. 아주 기쁜 일이고요.
부디 잘 지내길 바랄게요. 나도 잘 지낼 테니.」
종이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눈에 들어오는 글자들이 생경했다. 분명히 한국말이 쓰여 있는데 알 수 없는 나라의 언어를 접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음과 모음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쿵쾅거렸다.
애꿎은 종이만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렸다. 별거 아닌 그 진동에도 고결은 어깨까지 움찔거려 가며 깜짝 놀랐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낸 고결이 액정을 확인했다. 남 실장한테서 온 연락이었다. 고결은 엄지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여보….”
-결이 씨! 지금 어디야? 우현 씨 피습당했다는 얘기 들었어?
여보세요, 라고 말하기도 전 휴대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습이라는 단어에 기분 나쁘게 쿵쾅거리던 심장이 아예 멈춘 것처럼 고요해졌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잘게 헐떡이며 고결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순간 시야가 울렁일 만큼 아득한 현기증에 휘청거렸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달려 나간 고결이 운동화를 꺾어 신고서 앞으로 내달렸다.
-차 회장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우현 씨는 칼에 찔려서 지금 병원이라는데…. 수술은 다 끝났나 봐. 근데 우현 씨가 면회를 거부하고 있어서 우리도 못 가고 있거든? 혹시 결이 씨라면 들여보내 주지 않을까 싶어서. 결이 씨가 좀 가 봐. 어? 최대한 빨리.
택시를 타고 CH병원으로 가는 동안 고결은 휴대폰으로 기사를 살펴봤다. , <대기업 CH그룹의 어두운 일면, 한 노동자의 처절한 복수극>, <배우, 차우현 CH그룹 창단 50주년 기념행사에서 피습… 공식 입장은 아직>, <한상철 ‘죽은 아내의 복수 하고 싶었다’ 응원하는 네티즌 글 잇따라>, <‘한상철은 무죄다’ 국민 청원 글 등장, 반응 뜨거워>, . 가장 위에 뜬 기사부터 차례대로 훑어본 고결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한상철은 자신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왜 이런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상세히 밝혔다. 물론 자신의 복수를 도와준 이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모든 일은 한상철이 철저하게 꾸미고 계획한 것으로 포장되었다.
3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추악한 진실에 대중들은 크게 분노했다. 차우현이 바라던 바였다. 그는 차 회장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CH그룹의 몰락을 바랐다. CH그룹이란 차 회장한테 있어 그냥 회사가 아니라 자부심이자 명예였다. CH그룹은 차 회장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흠집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견고한 명성에 흠집을 내는 것이 차 회장한테 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복수일 것 같아서.
물론 고작 이런 일로 CH그룹이 아예 무너질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쉽게 분노하지만 또 그만큼 쉽게 잊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개중에서 누군가는 끝까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CH그룹에 등을 돌릴 것이었다. 자신이 절름발이로 만든 협력업체 노동자의 손에 CH그룹의 회장이 죽었다는 불명예스러운 사실도 변치 않았다. 계속해서 전해질 것이었다.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언론을 통제하고 기사를 막았을 CH그룹이건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차 회장이 죽고 차우현은 피습당했으며 그 자리에서 그걸 목격한 사람만 수십이었다. 그냥 그대로 묻어 버릴 수 없는 중대 사안이었다. 들끓는 여론에 CH그룹이 선택한 건 침묵이었다. 하지만 내부는 결코 평화롭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리판이었다. CH일가는 한데 모여 이 사안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