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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69화 (69/71)

69화

“원래는 분신자살까지 생각하셨던 분이.”

차우현을 바라보는 한상철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기로 했으나 사실은 단 하루도 잊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밤마다 불쌍한 제 부인이 꿈에 나왔고, 그렇지 않으면 폐공사장으로 끌려가 실컷 얻어맞는 꿈을 꿨다. 그때마다 오른쪽 발목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 끔찍한 통증에 잠에서 깼다. 그러면 아버지가 듣지 못하도록 숨죽여 몰래 울었다.

분하고 고통스러웠다. 잘못은 그 사람이 했는데 왜 나만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번은 차 회장의 집 근처로 찾아갔다. 기름 두 병과 라이터 하나를 들고서. 이 정도 소란을 피우면 언론에서 제 억울한 사연을 보도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순간의 충동으로 한 일이었다. 이 일에 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반쯤 넋이 빠진 한상철의 물음에 차우현은 친절히 대답해 줬다.

“봤거든요. 그날 본가 근처에서 서성이는 거.”

마침 차 회장의 부름으로 잠시 본가에 들른 날이었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 차 회장은 차우현을 집으로 불러들이곤 했다. 대개 CH그룹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라거나 하는 식의 얘기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차 회장은 연예인 차우현을 CH그룹의 이미지 향상에 이용해 먹으려 했다. 흔히들 말하는 얼굴마담인 셈이었다.

차를 몰고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서는데 저 멀리 웬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행색이라 눈에 띄었다. 차우현은 차의 속력을 줄이고서 남자를 응시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지켜보고 있긴 하지만 남자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명백히 자신의 본가였다. 남자의 양손에 들린 페트병은 누가 봐도 물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흥미가 일어서 차우현은 아예 차를 잠깐 세워 두고 남자를 몰래 지켜보았다.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집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나중엔 터덜터덜 힘없이 동네를 벗어났다.

고작 1.5L짜리 페트병 두 개에 담긴 기름으로는 으리으리한 저 집에 불을 지를 수 없었다. 문 하나도 제대로 태우지 못할 것이었다. 아마 자기 몸에 부으려고 한 거겠지. 생각은 쉽게 거기까지 이어졌다. 차우현은 그날 자신이 본 남자에 대해 알아봤고, 그렇게 한상철의 사연을 알게 됐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어쨌거나 분신자살까지 하려던 사람이라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제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열흘 뒤에 CH그룹의 창립 50주년 행사가 열려요. 내가 정한 디데이는 그날이에요. 당신이 복수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필요한 준비는 다 내가 해 줄 거예요.”

“…….”

“한상철 씨는 오래된 염원을 실행하기만 하면 돼요.”

차우현한테는 확신이 있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원래 복수심처럼 격렬한 감정은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당장은 뭘 어찌할 수가 없으니 일단은 묻어 두고서 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묵혀 둔 것들은 대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이제 그 빛을 차 회장한테 보여 줄 시간이었다. 이 남자도. 그리고 자신도.

“대신에 내 부탁 하나는 무조건 들어 줘야 해요.”

“…부탁이 뭔데요?”

“한상철 씨가 수락하면 그때 말해 드릴게요.”

차우현이 그린 듯 유려하게 미소 지었다. 한상철과 차우현의 시선이 허공에서 꽤나 오랫동안 부딪혔다. 그 눈싸움 아닌 눈싸움의 패자는 한상철이었다. 아래로 눈을 내리깐 한상철이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한 방법이에요?”

“네. 한상철 씨가 잘 해내 준다면요.”

말투는 가벼웠으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주먹을 꾹 말아 쥔 한상철이 눈을 들었다. 마주 보는 얼굴이 아까와는 달랐다. 단호하고 단단했다. 비로소 결심을 굳힌 사람의 얼굴이었다.

“…할게요. 잘 해내 볼게요.”

한상철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차우현이 한쪽 입술 끝만 살짝 끌어올렸다.

***

CH그룹의 창립 50주년 행사는 그랜드 호텔의 대연회장에서 열렸다. 기업인뿐만 아니라 경제부 기자와 정치인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50주년 행사인지라 평소보다도 훨씬 더 규모가 컸다.

행사는 차 회장의 개회사 및 축사로 시작됐다. 차 회장이 자리로 돌아가서 앉자 장내가 조금은 어두워졌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스크린 위로 미리 만들어 둔 창립 50주년 기념 영상이 재생됐다.

그동안 웨이터들은 각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음료와 간단한 먹거리 등을 서비스했다. 한 손에 널찍한 트레이를 든 남자가 천천히 차 회장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 바로 옆에는 차우현도 함께 앉아 있었다. CH그룹의 얼굴마담인 차우현이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빠져서야 안 됐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면 차 회장은 차우현을 꼭 자신의 근처에 뒀다. 차우현은 반듯한 자세로 앉아 스크린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회장님. 와인 드시겠습니까?”

차 회장은 웨이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됐다는 의미였다. 그 손짓을 봤음에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근데요, 회장님. 제가 회장님께 꼭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목표 지점이 마치 확대라도 해 놓은 것처럼 아주 크고, 또렷하게 보였다. 한상철은 들고 있던 트레이를 뒤엎고 그 아래에 받쳐 뒀던 택티컬 나이프를 단숨에 최 회장의 목에 세로로 꽂아 넣었다. 잘 훈련받은 군인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나이프를 들고서 꽂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자신한테 차우현이라는 남자가 찾아와 복수를 도와주겠다고 말한 뒤로 하루에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지금 이 장면만을 상상하고 그렸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한상철은 잊지 않고 칼을 사선으로 비틀었다. 투둑. 칼날에서 무언가 걸리고 끊어지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10일 날 그랜드 호텔에서 창립 기념행사가 열릴 거예요. 한상철 씨는 그 전날 객실 손님으로 미리 호텔에 들어가 계세요. 행사 날 제가 구해 드린 유니폼을 입고 시간에 맞춰 3층 대연회장으로 가시면 돼요. 워낙에 사람이 많아서 다들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이쪽에서 음식이 나오니까 여기에 서 계시면 자연스럽게 트레이를 넘겨줄 겁니다.”

차우현의 친절은 단순히 객실을 예약할 돈을 주고, 유니폼을 구해 주고, 연회장의 구조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택티컬 나이프를 준 것도, 목을 세로로 찔러야 한다고 알려 준 것도, 그 상태로 칼을 비틀어야 더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도 모두 차우현이었다.

“꺄아아아악!”

차민정의 높은 비명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차우현이 강한 힘으로 한상철을 밀쳤다. 그로 의해 차 회장의 목에 꽂힌 칼이 자연스럽게 뽑혀 나왔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불시에 급소를 찔린 차 회장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검붉은 피가 카펫을 빠르게 적셨다. 차 회장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차우현과 한상철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아, 그리고 제 부탁 잊지 않으셨죠?”

머릿속에서 차우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재생됐다. 잊지 않았다. 차우현이 말한 것은 단 하나도 잊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상철은 그대로 칼을 집어 들어 차우현의 복부를 찔렀다. 허억. 뜨끔한 통증에 차우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칼에 찔린 부위를 손바닥으로 감싼 차우현이 곧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연회장은 또 한 번 혼란에 빠졌다. 칼을 쥔 한상철한테 그 누구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방금 차우현이 칼에 찔린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봤으니 더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자신도 차우현과 같은 꼴이 될까 봐 몸을 사리며 뒤로 물러서기 바빴다.

“나도 찔러야 해요. 반드시.”

그렇게 말하며 여유롭게 웃던 수려한 얼굴이 지금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것으로 약속은 지켰다.

“크…, 허, 흐윽….”

차 회장이 낮게 신음했다. 카펫 위로 흥건하게 고인 피가 이젠 머리와 어깨까지 흠뻑 적셨다. 시야가 까매졌다 다시 하얘지길 반복했다. 차 회장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무릎걸음으로 차 회장한테 다가간 차우현이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목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마치 그 부위를 지혈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 신고… 신고해요.”

“…….”

“신고하라니까요! 빨리! 어서요!”

차우현이 주변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제야 하나둘씩 허둥지둥 휴대폰을 들었다. 문가에 있던 사람들은 아예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 도움을 요청했다. 차 회장이 흐릿한 눈으로 차우현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인 차우현이 차 회장과 눈을 맞추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아셨죠.”

차우현의 속삭임에 차 회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뻔했다. 저 유약한 놈이 뭘 할 수 있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를 불러다 대놓고 겁박했겠지. 그게 자신의 명을 재촉하는 일인지도 모르고, 머저리처럼.

“크, 네… 네놈, 커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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