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난 나한테 각인한 짝이 있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어.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아. 하지만 결이 너한테 그걸 강요할 생각은 없어. 일본에 가 있는 그 2주 동안 네 마음은 어떤지 한번 잘 생각해 봐 줄래?”
조심스러운 물음 끝에 차우현의 두 눈이 다시 고결의 얼굴로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고결 역시 눈을 들어 올곧게 시선을 맞춰 왔다.
“…네.”
잠시 후, 살짝 벌어진 고결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작지만 또렷했다.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말이었다. 그 대답에 차우현이 두 눈을 휘고 입술을 말아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마치 꽃망울이 툭, 하고 벌어지듯이 터지는 웃음이었다. 고결이 그런 차우현의 얼굴을 뭐에 홀린 것처럼 가만히 응시했다.
“결아. 안아도 될까?”
“…….”
“안아 봐도 돼?”
이번엔 대답 대신 고개만 조금 끄덕거렸다. 차우현이 붙잡고 있던 고결의 손을 놓고서 그대로 어깨를 끌어안았다. 고결은 잠시 머뭇거리다 어색하게나마 우현의 등허리를 슬쩍 붙잡았다. 따뜻했다. 겉옷을 입지 않아 약간 낮아졌던 몸의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거 알아? 각인한 짝이 있을 땐 억제제를 먹지 않아도 페로몬이 안정돼. 서로 떨어져 있거나 관계를 갖지 않아도 최대 백 일까지는. 그러니까 일본 가서도 별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조심해서 잘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다정한 마지막 인사가 건네졌다. 고결은 용기 내 차우현의 허리를 두 팔로 감쌌다. 둘 사이에 존재하던 빈틈이 빠르게 좁혀졌다. 원래부터 하나인 듯 딱 맞물린 몸이 안정적이었다. 고개를 숙인 고결이 차우현의 어깨에 제 이마를 툭 기댔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내가 정말로 형의 말을, 감정을 믿어도 될까. 마음속에서 오래된 지병과도 같은 불안들이 움텄다. 언제나 행복 끝엔, 아니. 그나마 숨 좀 쉬며 살아갈 수 있겠다 싶을 때쯤엔 기다렸다는 듯 불행이 찾아왔기에 더욱더 두려웠다. 하지만 우현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엔 자신이 절대로 버텨 낼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불행이 또 한 번 덮쳐 온다고 해도.
***
남자는 좁고 더러운 골목에 주저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골목길 바로 옆에 있는 치킨집이 그의 일터였다.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게 된 지도 올해로 벌써 3년째였다. 천천히 걸을 땐 티가 많이 나지 않지만 빨리 움직이면 어색하고 구부정한 걸음이 눈에 띄었다.
그는 원래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현장직 사람한테 있어 몸은 재산이었다. 다리를 절게 된 이후로는 자연스레 그를 원하는 곳이 없어졌다. 사실 비단 다리만의 문제는 아니긴 했다. 회사와 척지고 시위까지 하다가 결국엔 잘린 그를 받아 줄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 온 친한 선배의 치킨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배달 및 청소, 응대 등 잡다한 일을 해 한 달에 버는 돈이 약 180만 원 남짓이었다. 두 명이서 살 땐 목구멍에 겨우 풀칠이나 할 수준이던 그 돈이 혼자 남겨지고 나자 제법 넉넉하게 느껴졌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처럼 허전한 제 마음과는 별개로. 순식간에 써진 입안에 남자는 담배를 바닥에 대충 비벼 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상철 씨?”
이름이 불린 건 그때였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골목 끝 쪽에서 웬 남자 하나가 걸어왔다. 볼캡을 푹 눌러 쓰고 있어 얼굴 생김새는 제대로 볼 수 없지만 뭔가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훤칠한 키며 딱 봐도 균형이 잘 잡힌 몸, 길쭉한 팔다리, 작은 얼굴이 보통 사람 같지는 않았다.
“누굽니까?”
눈가를 좁힌 한상철이 불퉁하게 물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남자가 쓰고 있던 볼캡을 벗었다. 볼캡 아래 감춰져 있던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한상철은 남자를 금방 알아봤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차우현. 그 망할 CH그룹의 인간. 차우현 본인한테는 이렇다 할 악감정이 없지만 그렇다고 좋은 감정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으득, 어금니를 악문 한상철이 분노에 찬 얼굴로 차우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차우현은 자신보다 키가 작은 남자를 별 감흥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시발! 너, 이 새…!”
퍽. 차우현이 빠르게 한상철의 복부를 강타했다. 제대로 맞은 명치에 억, 하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크게 숨을 삼킨 한상철이 자신의 배를 부여잡고서 허리를 숙였다. 한상철이 움켜쥐고 있던 옷깃을 살짝 털어 낸 차우현이 덤덤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큰 소리를 내려고 하시길래요.”
“…크으.”
“큰 소리 내서 좋을 게 없거든요. 이 주변에 CCTV가 없는 건 확인했는데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괜찮으세요? 주저 없이 사람을 때릴 땐 언제고 상당히 점잖은 물음이 귓가로 전해졌다. 한상철은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차우현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벽에 힘겹게 등을 기대고 선 한상철이 잔뜩 인상을 쓰고서 차우현을 노려봤다.
“시발. 너 지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
“하나만 묻겠습니다. 복수할 생각이 있으세요?”
“…뭐?”
복수. 오래전 강제로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단어가 차우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피가 뜨겁게 들끓었다. 한상철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 대신에 차우현을 바라보는 두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차우현은 태연하게 그 시선을 받아 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복수할 생각이 있으시냐고요, 차성진 회장한테. 배를 감싸고 있던 한상철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왜, 그런 말을 왜 하는 겁니까?”
한상철의 눈에 어린 의아함이 걷히고 그 자리에 의심이 들어찼다. 차우현이 입술 끝을 당겨 가볍게 미소 지었다. 티 없는 소년 같은 얼굴이었으나 어딘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한상철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차우현의 입매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비록 한상철을 응시하는 깊은 두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았지만.
남자의 이름은 한상철. 그는 원래 CH그룹 반도체 공장에서 지게차를 운전하던 기사였다. 그에게는 김미연이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 역시 한상철과 같은 협력업체의 노동자였다. 김미연은 반도체 생산 라인 중에서도 각종 화학 물질을 보관하고 공급하는 ‘CCSS(Central Chemical Supply System)’에서 일했다. 화학 물질이 담긴 드럼통을 운반하고, 안에 들어간 연결 호스를 빼고 닦거나 청소하는 것이 그녀의 주된 업무였다. 하지만 회사가 그녀에게 지급한 것은 고작해야 마스크와 장갑이 전부였다. 결국 그녀는 입사한 지 고작 2년 만에 폐암이라는 병을 얻고서 세상을 떠나게 됐다.
한성철과 노조 측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건 CH그룹이라고 주장했다. 환기에 꼭 필요한 국소 배기 장치를 제대로 만들어 주지 않았고, 노후한 설비를 계속 이용한 탓에 그녀가 오랜 시간 유해물질과 가스에 노출됐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CH그룹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단 역시 정확한 유해물질의 노출 정보가 없다며 CH그룹의 편을 들어 줬다.
CH그룹은 끝까지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배우자인 한상철한테 유족 위로금이랍시고 현금 500만 원을 건넸다. 한상철은 그 돈을 거절했다. 그리고 CH그룹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한상철이 바라는 것은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아내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랐다. CH그룹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러한 사망자가 더는 나오지 않도록 설비를 유지 및 보수해 주길 원했다.
“저거 치워. 거슬리니까.”
하지만 일개 개인이 대기업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모든 것은 차 회장의 저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1인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한상철은 납치당했다. 얼굴에 검은 천 같은 게 뒤덮이고 그대로 차에 태워져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으니 그건 명백히 납치가 맞았다.
차에서 개처럼 끌려 나와 내팽개쳐진 곳은 어둑한 폐공사장이었다. 그곳에서 한상철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한테 일방적으로 폭행당했다.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생생한 폭력의 현장이었다. 코와 입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나왔고 각목에 맞은 오른쪽 발목은 기이한 모양으로 꺾였다.
“아저씨. 목숨 아까우면 적당히 하자, 적당히. 어? 집에 노인네도 있잖아. 며느리 뒈졌는데 아들까지 뒈져 버리면 그 노인네 혼자서 무슨 수로 살겠어. 보니까 당뇨 땜에 눈도 안 보이는 거 같더만.”
부러진 오른쪽 발목을 힘주어 지르밟으며 한 남자가 말했다. 한상철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절규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CH그룹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할 거지? 응? 남자의 물음에 한상철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미연은 죽었어도 자신은 살아야 했다. 억울하게 죽은 제 부인한테는 미안하지만 몸도 성치 않은 노부 혼자 남겨 두고서 죽을 순 없었다. 결국 한상철은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당신이 왜 나를 도와?”
잔뜩 날 선 말이 튀어나왔다. 한상철은 여전히 차우현을 경계했다. 차우현이 CH그룹의 일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복수를 도와주겠단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해 대니, 그걸 대뜸 받아들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복수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중요한 거죠. 부친인 한동식 씨 한 달 전쯤에 돌아가신 거로 알고 있는데… 이제 주저할 거리도 없지 않나요?”
한상철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말대로였다. 한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제 마음에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