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67화 (67/71)
  • 67화

    확신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소중하게 맘속에 품어 온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할 기회를, 필요에 의해서일지언정 그 사람을 독점할 절호의 기회를 제 손으로 쳐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냥 휩쓸려 버렸을 수도 있었다.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자위하면서.

    우웅. 웅. 우웅. 갑자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의 액정이 밝게 빛나는 게 보였다. 고결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우현이 형’.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고결의 두 눈이 커졌다. 고결은 전화가 끊길세라 서둘러 받았다. 심장이 작게 뛰었다.

    “여, 여보세요?”

    -결아. 뭐 해?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바보처럼 말을 더듬은 것을 후회할 겨를도 없게끔 만드는 목소리였다. 익숙하면서도 더없이 특별한 그 목소리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각인이 만들어 내는 효과 중에 하나인 걸까. 고결은 습관처럼 또 한 번 제 왼쪽 손목의 표식을 바라보았다.

    “아, 그냥 짐 싸고 있었어요.”

    -아직 짐 다 못 싼 거야?

    “아니요. 거의 다 싸긴 했는데 아직 조금 남아서요.”

    -그렇구나. 혹시 그거 이따가 해도 되는 거면 잠깐만 집 앞으로 나올래?

    “…네? 집 앞이요?”

    -응. 나 지금 결이 너희 집 앞인데.

    집 앞이라고? 형이? 우리 집 앞에? 머리보다 몸이 더 빨리 반응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머리는 아직 굳어 있는데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는 상태였다. 고결은 겉옷도 챙겨 입지 않고 그 상태로 부랴부랴 방을 나섰다. 눈에 보이는 슬리퍼를 대충 신고서 낡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자 기다란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인기척을 느낀 그 인영이 고결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결아.”

    고결을 발견한 차우현이 입꼬리를 당기며 잔잔하게 웃었다. 그 얼굴이 꼭 살랑거리는 봄바람 같았다. 포근하고, 보드랍고, 간질거렸다. 심장이 그새 위치를 옮겨 가기라도 한 건지 왼쪽 손목에서 두근거리는 박동 같은 게 느껴졌다. 벅찬 기분에 고결은 잠깐 숨을 참았다.

    “형.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그냥. 결이 너 내일이면 일본 가니까 그 전에 얼굴 보고 싶어서.”

    약속한 인수인계 기간이 모두 끝났다. 고결은 내일 일본으로 출국해야 했다. 각인을 한 지 이틀이 지났지만 우현과는 아직 뭐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현은 우현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현실을 살아 내야 했다. 그러니까 우현한테는 할당된 스케줄이 있고, 자신한테는 해야 할 일이 있단 소리였다.

    이대로 계속 회사에 남아 매니저 일을 해도 되는 것인지 혼란스럽긴 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제 인생에 끼어든 각인이라는 것은 뒤늦게 발현한 형질만큼이나 막막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재난과도 같았다. 준비할 새도 없이 들이닥쳤다는 점이.

    “그리고 너한테 줄 것도 있고.”

    차우현이 그제야 뒷짐 진 손을 풀었다. 그의 손에는 웬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쇼핑백 안에서 작은 상자를 빼낸 차우현이 그걸 열어 고결의 앞으로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고결이 손목시계가 든 상자와 차우현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뭐예요?”

    “손목시계.”

    “아니, 시계인 건 아는데 이걸 갑자기 왜….”

    차우현은 말없이 상자에서 손목시계를 꺼낸 다음 고결의 왼손을 붙잡았다. 시계를 채워 주는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메탈로 된 손목시계는 헐겁지 않고 살짝 타이트했다. 시곗줄에 의해 각인 표식이 절묘하게 가려졌다. 아. 그제야 시계 선물의 의미를 알아챈 고결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도 차고 있어.”

    차우현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왼팔을 들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우현의 말대로였다. 그의 손목에는 자신과 똑같은 디자인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고결이 어딘가 좀 멍한 눈으로 차우현을 응시했다. 그런 고결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차우현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결이 너한테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마음 같아선 회사 그만두고 그냥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정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 알아.”

    고결을 위하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차우현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차우현은 우선 고결을 일본에 가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국내도 아닌 해외에서 일을 치는 건 차 회장으로서도 제법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일본은 치안이 좋지 않은 나라도 아니니 더더욱. 일본에 가면 고결은 일정을 소화하는 내내 스태프 및 Z 멤버들과 함께 다닐 것이었다. 여러모로 한국에 있는 것보다는 일본으로 가는 것이 더 안전했다.

    거기다 예정된 Z의 일본 프로모션 일정은 약 2주 정도였다. 차우현이 생각하고 있는 디데이인 CH그룹의 창립 50주년 행사 역시 2주쯤 뒤였다. 고결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쪽이 계획을 실행하기가 더 용이했다. 일을 수월하게 해 내기 위해서라도 고결을 잠시 제 곁에서 떼어 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고결은 상황이 모두 마무리되고 입국할 것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가 됐을 때.

    “형은 나 원망 안 해요? 나 때문에… 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입안을 한 번 꾹 깨문 고결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우현을 바라보는 새카만 두 눈에 초조함과 슬픔이 어렸다.

    집안, 학벌, 직업 등등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나 변변치 않은 존재였다. 우현은 자신보다 훨씬 더 좋고, 멋지고, 잘난 사람을 충분히 만날 수 있었다. 그럴 만한 능력도, 자격도 있었다. 그런데 그 기회를 제가 앗아 갔다. 이제 우현은 제 옆에 묶여 있어야만 했다. 그것도 죽기 전까지, 평생. 고작해야 하룻밤의 실수 때문에.

    이건 무척이나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이었다. 자신이야 우현을 아주 오래 전부터 좋아해 왔다지만 우현한테 있어 자신은 어디까지나 친한 동생이고, 아끼는 후배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도 그리고 지금도 우현은 자신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는 자신을 다정하게 달래 주고, 자신 옆에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단 달콤한 얘기까지 꺼내 놓았다. 덜컥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 버리고 싶게끔.

    “내가 널 어떻게 원망해. 각인을 한 건 난데.”

    “…그것도 다 나 때문이잖아요. 내가, 내가 먼저 그러지만 않았어….”

    갑자기 자신의 왼손을 붙잡는 차우현의 행동에 고결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차우현이 고결의 손을 힘주어 단단히 고쳐 잡았다. 커다란 손은 따뜻하고 또 부드러웠다.

    “결이 네가 전에 나한테 물은 적이 있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형이 책임감 느낄 필요 없다고.”

    기억났다. 자신이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준, 심지어 몰래 억제제까지 먹고 있던 우현한테 그렇게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느냐고. 우리 같이 길을 찾기로 하지 않았냐는 우현의 대답에는 형이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말도 했다. 지금 역시 그랬다. 그때와 같은 생각이었다. 어깨를 다쳐 유도를 그만두게 된 것도, 각인을 하게 된 것도 전부 다 제 탓이었다. 거기에 우현의 책임이나 잘못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결이 너랑 각인하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내가 지금껏 너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느낀 그 감정이 사랑은 아니었을까.”

    사랑. 차우현의 입에서 나온 믿을 수 없는 단어에 고결은 숨을 삼켰다. 머리가 멍했다. 흉곽이 크게 부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비단 삼킨 뒤 다시 내뱉지 못하고 있는 숨의 탓인 건지, 아니면 불시에 또 크기를 키워 버린 제 마음 때문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야 알았어. 그게 단순히 책임감이나 죄책감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크고, 무겁고 또 애틋한 감정이라는 걸.”

    그제야 고결이 삼킨 숨을 조용히 몰래 내뱉었다. 하마터면 케케묵은 제 마음을 고백할 뻔했다. 나야말로 형을 사랑하고 있다고. 형이 상상도 못 할 아주 예전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형을 사랑해 왔다고. 하지만 그랬다간 우현이 배신감을 느낄까 두려웠다. 이 모든 일을 자신이 의도한 것이라고 오해할까 봐, 그래서 자신을 비난하고 미워할까 봐 무서웠다. 이렇게 엄청난 짓을 저지른 주제에 이기적이게도 우현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형이 착각하는 걸 수도 있어요.”

    고결은 제 마음을 고백하는 대신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우현의 말을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었다. 함부로 믿어 버리기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말이었다. 대뜸 믿었다가 나중에 돌아올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단순한 착각일지 몰랐다. 우현은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 저에 대한 안쓰러움이나 동정 같은 감정을 사랑으로 오인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형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서, 그래서 그걸 착각….”

    “결아.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어투가 상냥하면서도 동시에 단호했다. 차우현이 고결한테 최초로 전한 진심이자 진실이었다. 눈을 내리깐 차우현이 제가 붙잡고 있는 고결의 마른 손을 바라보았다. 고결의 시선 역시 아래로 내려갔다. 크기만 조금 다른 손목시계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비록 우리 시작은 이렇게 했어도 나는 결이 너랑 끝까지 잘 가 보고 싶어. 결이 너만 괜찮다고 해 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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