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66화 (66/71)

66화

꼴에 자신도 우성 알파랍시고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섹스 스캔들이나 임신과 같은 사고를 친다 해도 딱히 큰 상관은 없었다. 그런 거야 돈 좀 쥐여 주고 입막음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제 주제를 모르고 말을 안 들어 먹을 땐 그냥 없애 버리면 되는 거였고. 그저 각인만 하지 않으면 됐다. 딱 그거 하나만 하지 않으면 됐는데…그랬는데 감히….

“이 정신 빠진 새끼!”

이번엔 얼굴로 서류철이 날아왔다. 퍽. 차우현의 얼굴과 부딪힌 서류철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팔랑팔랑 낱장의 종이들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종이에 베인 건지, 아니면 서류철의 철제 부분에 긁히기라도 한 건지 오른쪽 볼이 따끔거렸다. 차우현의 볼 위로 가느다랗게 피가 맺혔다. 하지만 차우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그저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책상 위만 내려다보았다.

“저 그 애랑 각인한 거 후회하지 않아요. 식도 올리고 혼인신고도 할 겁니다.”

고결이 너무 혼란스러워하고 아직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비록 지금은 각인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지라도 차우현은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엔 고결과 각인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결혼도 성공할 테니까.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었다.

각인 다음 날, 정신을 차린 고결은 곧장 차우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하단 말과 함께. 고결은 차우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며 꾸역꾸역 눈물을 참았다. 아마 자신은 울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그림이었다. 차우현은 그런 고결의 팔뚝을 붙잡아 다정하게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괜찮다고.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렸어야 했는데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그게 되지 않았다고. 각인까지 해 버렸으니 나야말로 할 말이 없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그렇게 사과하면서.

차우현의 입에서 나온 각인이라는 말에 고결은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각인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자체를 모르니, 자신이 뭘 당했는지도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에 차우현은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밀어 보여 줬다. 알파와 오메가가 각인을 하고 나면 같은 신체 부위에 특별한 표식이 생겼다. 손, 발, 배, 허벅지, 엉덩이, 허리, 목 등등 표식이 나타나는 부위는 다양했다. 차우현과 고결의 경우는 왼쪽 손목 안이었다.

“우리 각인했어, 결아.”

“…….”

“네가 내 짝이고, 내가 네 짝이야. 이젠.”

차우현은 멍하니 굳어 있는 고결의 왼팔을 끌어다 자신의 왼팔 옆에다 뒀다.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표식이 나란히 자리 잡은 두 개의 팔. 고결은 그 표식을 한참이나 응시하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퍼뜩 고개를 들곤 다급하게 물었다. 각인을 깨거나 무를 방법은 없는 거냐고. 차우현은 고결한테 자신이 아는 유일한 각인 해제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 줬다. 있어. 우리 둘 중에 한 명이 죽으면 각인은 자연스럽게 풀려.

결국 고결의 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눈가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형,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내가 대체… 대체 형한테 무슨 짓을….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고결을 차우현은 말없이 따스하게 안아 줬다. 고결이 충분히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미안해하길 바랐다. 그 감정들은 고결이 절대로 자신을 떠날 수 없게끔 만드는 아주 훌륭한 양분이 되어 줄 것이었다.

“하.”

차 회장이 코웃음을 쳤다. 왜? 사랑하니 없던 용기라도 생기냐? 빈정거리는 물음이 따라붙었다. 그래 봤자 차 회장의 눈에 차우현은 버러지일 뿐이었다. 자신의 의견에 처음으로 반발하고 있지만 정작 제 눈은 쳐다보지도 못하는. 차우현이 지금 이 순간조차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차 회장은 알지 못했다. 원래 한 번 생긴 고정 관념이라는 건 쉽게 깨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그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 온 견고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래. 태민이도 그랬지. 그런데 그렇게 용기 낸 결과물이 뭔 줄 아느냐?”

“…….”

“개죽음이다.”

주름진 차 회장의 얼굴 위로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차태민도 제 손으로 죽였다. 차우현이라고 그러지 못할 거 없었다. 하지만 차태민과 차우현은 달랐다. 차태민은 베타였지만 차우현은 우성 알파였다. 적어도 차태민보다는 더 쓸모가 있었다. 그 쓸모도 다하지 않았는데 죽여 버리기엔 아까웠다.

“그래도 넌 아직 쓸모가 있으니 봐 주마. 대신에 개죽음을 당하는 건 다른 놈 몫이겠지. 그래야 각인도 풀릴 테니.”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손을 뻗어 차 회장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차우현은 격해지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여기서 지금껏 숨겨온 제 본모습을 보여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여전히 이빨은커녕 누굴 할퀼 손톱조차 없는 존재처럼 굴어야 했다. 그래야 차 회장이 안심하고 자신의 목덜미를 당당히 드러내고 다닐 테니까. 그때 오랫동안 숨겨 온 이빨로 차 회장의 목덜미를 단번에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놔야 했다.

이미 구체적인 계획은 머릿속에 다 구상해 놓은 상태였다. 다만 이 계획은 자신한테도 위험 부담이 있어 가능한 한 실행하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차 회장이 이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어쩔 수 없었다. 위험 부담을 안고서라도 그 계획을 실천으로 옮겨야 했다.

“설마 각인만 하면 끝일 거라고 생각한 거냐? 그걸 어떻게든 기사화하면 그걸로 다 될 줄 알았어? 그러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안 거야? 그래?”

하하하. 차 회장이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곤 서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

“멍청하긴. 네놈이 그래서 안 되는 거다.”

쯧. 짧게 혀를 찬 차 회장이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차우현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기사 낼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마. 한성물산이랑 얘기 끝나는 대로 네놈 식부터 올릴 거니까.”

67%. 확실히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그렇게 만족스러운 수치는 아니었다. 혹시 몰랐다. 자신과 한도연이 그랬듯 기적적으로 90%에 가까운 확률을 가진 우성 오메가가 나타날지도. 그래서 한성물산과의 혼사를 미루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차우현이 뒤에서 이런 돼 먹지 못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됐으니, 더 이상의 유예는 없었다. 헛된 기대는 애초에 뿌리 뽑아 싹조차 피울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살고 싶으면 그때까지 설치지 말고 납작 엎드려서 지내. 끝까지 내 심기 거스르면 너도 그냥 없애 버리는 수가 있어. 네 필요라고는 우성 알파라는 그 형질 하나뿐인데 그것마저 이용하지 못하게 되어 버리면 내가 널 살려 둘 의미가 없지.”

쇳소리가 섞인 탁한 음성이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운운했다.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 이 세상에서 치우는 일쯤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차 회장이 두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곤 제 앞에 서 있는 차우현을 가늠하듯 쓱 훑었다. 몸은 많이 자랐을지언정 여전히 한심하고 볼품없는 놈이었다. 내리깔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꺼풀에 가려진 눈동자는 분명 잔뜩 겁에 질려 있을 것이었다. 어릴 때에도 그러했듯이. 이 정도쯤 말했으면 이 멍청하고 지질한 놈이 알아서 겁먹고 몸 사리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정작 차우현은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그 누구보다도 차분하게 자신의 계획을 되짚고 있었다. 살려 둘 의미가 없다라. 그건 차우현이 차 회장한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걸로 결심은 굳혀졌다. 차우현은 일부러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어릴 적, 차 회장의 앞에 불려 오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본 차 회장의 미간이 단숨에 찌푸려졌다.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

냉엄한 축객령이 떨어졌다. 차우현은 아무런 말 없이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서재를 빠져나왔다. 누가 들을까 염려돼 미리 사람을 물리기라도 한 건지 서재 주변은 조용했다. 고용인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복도를 홀로 걷는 차우현의 깊은 두 눈이 분노로 일렁거렸다.

***

캐리어 가방은 입만 벌리고 있게 된 지 오래였다. 고결은 캐리어 가방을 활짝 열어 두고서 그 앞에 앉아 제 손목을. 더 정확히는 왼쪽 손목에 문신처럼 새겨진 표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 준 축복이라는 말. 그땐 잊는 것보다 기억하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좀 알 것도 같았다.

술기운에 혹은 약 기운에 기억이 흐려졌다면 차라리 좀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현실 도피적인 생각을 했다. 비겁하게도. 그래 봤자 눈앞에 닥친 현실은 달라질 게 없는데. 제가 먼저 우현에게 달려들었고, 간절하게 부탁했고, 내가 누군지 알고도 이러냐는 질문에 대답까지 했다. 차우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각인을 한 건 우현이라고 한들 앞서 나열한 사실들은 절대로 바뀌지 않았다.

“하아….”

고결이 버석한 얼굴을 문지르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목덜미로 아프도록 우현의 치아가 파고들고, 배 안으로는 뜨거운 것이 천천히 흘러 들어오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선연한 감각을 되새기고 있자니 작게 소름이 돋아서 고결은 얼굴을 가리던 손으로 자신의 뒷덜미를 쓸었다. 각인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몰랐다. 이제야 룸에 있던 사람들이 왜 목에 두꺼운 가죽 목걸이 같은 것을 차고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만약에 형이 나한테 하는 게 각인이라는 걸 알았다면 피했을까? 어떻게든 못 하게 막았을까? 순간 저 깊은 안쪽에서 질문 두 가지가 불쑥 솟아올랐다. 목을 문지르던 손을 힘없이 아래로 내린 고결이 제 왼 손목에 새겨진 각인 표식을 엄지로 살짝 문질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