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소파 위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남자가 어떤 남자 위에 올라타듯 앉아 스스럼없이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입에는 다른 남자의 성기를 문 채였다. 그 반대편 소파에서는 한 남자가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면서 낮게 신음하고 있었다. 바로 앞에는 남자와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그 남자의 성기를 게걸스럽게 핥고 있었다.
이 난잡한 섹스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심지어 사람들 중 절반은 목에다 두꺼운 가죽 목걸이까지 차고 있었다. 말이 좋아 목걸이지 맨몸에다가 그것만 하고 있으니 그냥 목줄로밖에 안 보였다. 사람을 동물 취급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난교가 아니라 수간의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결은 알파와 오메가의 각인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찬 가죽 목걸이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한 서로를 위한 안전장치라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이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갑자기 등장한 고결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고결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자신들 외의 사람이 이 공간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발정기가 온 동물처럼 거칠게 몸을 움직이며 제 욕망을 풀어내기에 급급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상관이 없는 듯했다.
‘…형은, 형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분명 안에 있다고 했는데.’
기분 나쁘게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고결은 치미는 토악질을 억지로 참아 가며 벽에 잠시 등을 기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맞은편 벽 틈에서 희미하게 불빛 같은 것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고결이 가늘게 눈가를 좁혔다. 방 안이 어둑해서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맞은편 벽에 손잡이가 붙어 있었다. 안에 다른 공간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저곳에 우현이 있을 것 같은 아주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고결은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가 있는 힘껏 문을 젖혔다. 바깥쪽보다 크기만 조금 작을 뿐, 똑같은 구조를 가진 룸이 나왔다. 역시나 그 안에는 고결이 그토록 찾던 우현이 있었다. 그것도 주영재와 함께.
“주영재 씨!”
고결이 소리치듯 크게 주영재의 이름을 불렀다. 두 눈을 감고서 소파 위에 기대듯 늘어져 있는 우현의 셔츠 단추를 주영재가 풀고 있었다. 재빨리 그 앞으로 다가간 고결이 주영재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주영재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하.”
고결의 얼굴을 확인한 주영재의 입에서 기가 차다는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결의 시선이 벌써 절반 가까이 풀린 우현의 셔츠로 향했다 다시 주영재의 얼굴로 옮겨 갔다. 고결은 무의식중에 반대편 손을 단단히 안으로 말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반질반질한 얼굴에다가 냅다 주먹을 꽂아 버리고 싶었다.
“여기는 또 어떻게 알고 왔대? 설마 차우현 폰에 위치 추적 앱이라도 깔아 놨어요?”
주영재가 대놓고 빈정거렸다. 고결은 대답 대신에 주영재의 멱살부터 붙들고 봤다. 성인 남자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운 몸이 아무런 반항도 없이 순순히 끌려왔다. 갑작스러운 고결의 행동에도 주영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결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도발했다.
“왜요? 치려고? 그래. 어디 한번 쳐 봐. 차우현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기사화돼서 연예 뉴스 장악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꼴 보고 싶으면.”
그 뻔뻔한 말에 고결은 어금니가 아리도록 이를 악물었다. 바짝 선 저작근이 지금 고결이 얼마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분노를 참고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나야 어차피 이번 드라마로 겨우 얼굴 알린 조연이라지만 차우현은 얘기가 다르잖아. 나보다는 차우현이 잃을 게 훨씬 많지 않나?”
주영재가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분노에 눈이 먼 고결은 전혀 알지 못했다. 시종일관 당당하고 여유롭게 보이는 주영재의 손이 사실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주영재는 지금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걸고서 일생일대의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이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 지금 제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 이 남자를 제대로 속이지 못하면 자신은 더 이상 TV에 얼굴을 비치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차우현이 친절하게도 그날 일이 녹음된 음성 파일을 들려주며 협박했으니까.
“…너 우현이 형한테 뭐 먹였어.”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낮고 스산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금방 겁을 집어먹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주영재는 제 눈앞에 있는 고결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술도, 약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잔뜩 취한 척 제 옆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차우현의 존재가 가장 두렵기 때문이었다. 차우현은 술을 입에 머금었다가 뱉어 내는 철두철미함까지 보였다.
“글쎄… 술?”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빙글빙글 웃는 주영재의 낯짝에 대고 고결이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주영재가 보란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쉽게도 정말 술만 먹였어. 저 앞에 있던 사람들 봤지? 저 중에 한 명이 우리 드라마 제작사 좀 높은 사람이거든. 그 사람이 차우현한테 계속 술을 줘서 거절 못 하고 주는 족족 다 마셨어.”
주영재는 차우현이 자신한테 미리 일러 준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려는 듯 고결이 주영재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에 피식 웃음을 흘린 주영재가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고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로 옮겨 갔다. 양주병과 깨끗하게 비워진 하나의 잔. 그리고 반쯤 내용물이 차 있는 잔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내가 먹이려고 했던 건 저거야.”
“….”
“근데 차우현이 저걸 먹기도 전에 이렇게 되어 버려서 일단 이대로 동영상 좀 찍을까 했지. 나는 차우현이랑 진짜로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서.”
주영재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던 고결이 멱살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그 이상 뭘 할 순 없었다. 고결은 주영재를 소파에 퍽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내동댕이치는 것으로 분을 삭였다. 그 과격한 행동에도 주영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구겨진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주영재가 덤덤하게 말했다.
“근데 내가 저기에다가 탄 약 꽤나 힘들게 구한 거라서 말이야. 알파한테나 효과가 있는 거긴 한데 너라도 마시고 가. 아까우니까.”
고결은 차우현의 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 위로 올린 다음 그대로 힘을 줘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차우현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싼 고결이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럴 이유도, 의무도 없어.”
“아니, 있어. 그것도 충분히.”
소파에서 일어난 주영재가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우현을 부축하느라 아직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한 고결이 그런 주영재를 짜증스럽게 응시했다.
“내가 기껏 짜 놓은 판을 네가 다 망쳐 놨잖아. 술 한 잔 먹이는 정도는 화풀이 축에도 못 낄 거 같은데?”
주영재가 테이블 방향으로 거만하게 턱을 까딱거렸다.
“저것만 마시면 얌전히 보내 줄게.”
주영재가 쐐기를 박았다. 주영재를 때려눕히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주영재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 보복을 하려고 들지 몰랐다. 거기다 밖에는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의 제작사 사람이 있었다. 이미 시즌 2 얘기까지 오고 간 상황이었다. 정신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괜한 소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었다. 으득, 고결이 이를 갈았다. 고결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술잔으로 향했다.
알파한테나 효과가 있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알파한테만 효과가 있다는 건지. 아니면 알파나 오메가가 아닌 베타한테는 효과가 없다는 말인 건지. 주영재는 자신을 베타로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고민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우현보다는 자신한테 생기는 게 백 번 천 번 나았다. 고결은 우현의 허리를 감싸고 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잔을 들어 단숨에 제 입으로 털어 넣었다. 고결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내부가 어두웠지만 그 움직임만큼은 주영재의 눈에 확실하게 들어왔다. 주영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약이 든 술을 어떻게든 고결이 마시도록 하는 게 주영재가 부여받은 임무였다. 이걸로 제 역할은 다 끝났다.
주영재가 기다렸다는 듯 문 앞에서 비켜섰다. 도수가 높은 술인 건지 목구멍이 싸했다. 고결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헛기침을 삼키며 서둘러 차우현을 데리고 룸 밖으로 나갔다. 아까와 같은 듯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다들 짐승처럼 몸을 섞고 있긴 한데 그 짧은 시간에 상대가 바뀌어 있었다. 테이블에 있던 여자가 소파에, 소파에 있던 남자가 바닥에 있는 식이었다. 고결은 최대한 우현을 제 쪽으로 바짝 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런 더러운 공간에 우현이 잠깐이라도 노출된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후우….”
차우현을 데리고 방을 빠져나온 고결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역겹다 못해 폐가 찔리는 듯한 통각마저 동반하던 지독한 악취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묵직하고도 진한 향이 코를 감쌌다. 고결은 여전히 향수 냄새라 믿고 있는 우현의 페로몬이었다. 차우현은 조금씩, 천천히 페로몬을 개방했다. 차우현이 아는 고결이라면 분명 출구가 아닌 객실로 올라갈 것이었다. 그러한 차우현의 예상은 아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고결은 망설임 없이 5층의 버튼을 눌렀다. 콜택시를 부르고 그게 올 때까지 우현을 객실에서 쉬게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인사불성이 된 우현을 데리고서 택시를 잡아탈 자신 따윈 없었다. 그랬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진이 찍혀 언제, 어디서, 어떤 소문이 돌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