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아니. 그건 아니고…. 아까 영재 씨한테 전화가 왔어. 오늘 강남에 ‘The Black’이라는 클럽에서 자기 친구들이랑 생일 파티 겸 드라마 쫑파티를 한다더라고. 영재 씨는 오늘부로 촬영 끝났으니까. 혹시 시간 되면 잠깐이라도 와서 같이 축하해 주실 수 있냐고 묻길래 그러겠다고 했어. 한 드라마 출연한 사이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리고 저번에 휴대폰 찾는다고 정신없어서 영재 씨가 부탁한 커피 차 인증 사진 못 찍어 준 거 계속 마음에 걸렸기도 했고.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결은 다급히 걸음을 돌려 빌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형, 어디요? 강남에 ‘The Black’이요? 일단 제가 거기로 갈 테니까…. 네? 벌써 룸 앞이라고요? 형. 잠시만. 잠시만요. 고결이 애타게 말했으나 정작 우현은 태연하기만 했다. 결아, 나 일찍 들어갈 거니까 굳이 너까지 올 필요 없어. 갑자기 나온 거라 너한테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한 거야. 그럼 내일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뭐라 더 할 새도 없이 전화가 뚝 끊겼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룸이 시끄러운 건지, 아니면 휴대폰을 진동으로 놔둔 건지 우현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그게 벌써 35분 전의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린 고결은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건물로 곧장 달렸다. ‘The Black’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건물은 그저 새카맣기만 했다. 도심지 한복판에 생긴 거대한 블랙홀 또는 싱크홀 같기도 했다.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고결은 망설이지 않고 입구로 향했다. 앞을 지키고 있던 덩치 큰 가드 두 명이 그를 막아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개중에 한 명이 고결한테 말을 걸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사람을 가늠하듯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고결은 고개 숙여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조금은 헐렁한 검은색 무지 티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바지. 이런 곳에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행색이었다. 어떡하지. 아무리 옛날에 운동을 했다고 한들 이런 덩치들과 싸워서 이기기엔 승산이 없었다. 고결은 일단 우현의 이름을 댔다.
“안에 차우현 씨 계시죠?”
우현의 이름을 거론하자 가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고결은 제 지갑 안에서 명함을 꺼내 가드한테 내밀었다.
“차우현 씨 매니저입니다. 데리러 와 달라는 연락 받고서 왔어요.”
가드가 고결이 내민 명함을 받아 살펴보고는 누군가한테 무전을 했다. 네, 여기 A구역인데요. 차우현 씨 매니저분이 오셔서요. 상대방의 답변을 듣고 있는 건지 귀로 손을 가져다 댄 남자가 고결한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고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시가 바쁘긴 했으나 이만한 장정 둘을 제치고 저 안으로 들어갈 자신은 없었으니까. 우현의 매니저임을 밝힌 마당에 그런 사고를 쳐서 좋을 것도 없었고.
“안녕하십니까.”
잠시 후, 한 남자가 나타나 웃는 얼굴로 살갑게 인사를 했다. 방금 무전을 받은 사람인 건지 가드가 그 남자한테 고결의 명함을 건넸다. 가드가 한 것처럼 명함을 한번 살펴본 남자가 이쪽으로 따라오시라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고결은 남자를 놓칠세라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남자는 자신을 이 실장이라고 소개했다. 이 실장이라는 사람을 따라 건물 안에 입성한 고결을 가장 먼저 반긴 건, 귀가 찢어질 듯한 시끄러운 음악 소리였다. 춤을 추는 곳은 한 층 아래인 지하에 있었다. 위에서 쏟아지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미친 것처럼 몸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1층에 있는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거나 난간에 붙어 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결은 얼굴 앞으로 손을 몇 번 내저었다. 시야가 희뿌옜다. 매캐한 담배 연기 때문에 눈이 다 따가웠다. 이 실장은 그런 것에 익숙한 모양인지 태연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안쪽으로 꺾어져 들어가다 보니 뜬금없게도 대리석으로 된 깔끔한 복도가 나타났다. 엘리베이터도 두 대나 있었다. 어둡고 시끄러운 바깥쪽과는 사뭇 대비되는 공간이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 제가 지나쳐 온 곳이 사실은 토끼 굴이었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멀리서 들리고 있는 희미한 음악 소리가 이곳이 클럽임을 상기시켜 줬다. 아까보다 크기가 많이 줄어들긴 했어도.
이 실장이 품에서 카드키를 꺼내 가져다 대자 마침 1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고결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이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 F로 표시된 4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게 엘리베이터의 버튼 중 가장 높은 층수의 버튼이었다.
생각보다 적은 층수에 고결은 의아함을 느꼈다. 밖에서 봤을 땐 적어도 10층 정도는 되어 보였는데. 정확한 층수는 세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고작 4층밖에 되지 않는 건물은 절대 아니었다. 고결의 시선이 층수 버튼에 고정된 것을 본 이 실장이 먼저 나서서 이 클럽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클럽 구조가 조금 신기하게 이루어져 있어서요. 방금 보신대로 지하 1층이랑 지상 1층은 클럽이고요. 2층부터 4층까지는 룸. 거기서도 4층은 VIP 고객님만을 위한 전용 공간인데, 5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실 수 있습니다. 6층부터 8층은 호텔처럼 꾸며둔 객실이라 5층 로비까지와는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셔야 합니다. 이 엘리베이터로는 4층까지만 갈 수 있고요.”
“…객실이요?”
객실이 있는 클럽이라니. 클럽에 다녀 본 적은 없지만 이런 구조가 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얼떨떨한 고결의 물음에 이 실장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었다.
“네. 손님들께서 쉬어 가실 수 있도록 마련된 장소입니다. 사실 객실까지 올라가서 시간을 보내는 분들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정신을 못 차리시면 계실 곳이 필요하니까요.”
너무 오래 정신을 못 차리면. 그 말이 이상하리만큼 귀에 꽂혔다. 쿵, 쿵, 쿵. 아까 1층에서 들은 음악 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룸 이용 고객님들만 가능합니다. 4층에 계셨던 VIP분들의 경우 저희 측에서 리스트를 가지고 있어 성함이나 얼굴만 확인되면 별도의 결제 없이 바로 들어가서 쉬실 수 있어요.”
결국 이 실장의 말을 풀이하자면 이 건물은 룸에서 떡이 되도록 취한 다음 위로 올라가서 쉬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떡해. 고결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혹시라도 주영재가 벌써 우현을 데리고 위층으로 향한 것은 아닐지 염려스러웠다. 손가락이 안으로 말렸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우현이 형 룸에 있는 거 맞나요?”
“네?”
“위로 올라간 건 아니죠?”
다급한 물음이 이어짐과 동시에 띵, 하는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우현이 어느 룸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고결은 무언가에 쫓기듯 서둘러 복도로 나왔다. 널찍한 복도에는 문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한 명씩 서 있었다. 꼭 문지기처럼. 당황해서 굳어 버린 고결을 지나친 이 실장이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고결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차우현 님, 안에 계셔? 아님 위로 올라가셨어?”
“아니요. 나가신 분 없습니다.”
몸을 튼 이 실장이 제 뒤에 서 있는 고결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네요. 짧게 답한 이 실장이 싱긋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친절한 웃음이긴 했으나 영업성이 짙은 거짓 미소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고결이 얼른 이 실장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는 카드키가 없어도 엘리베이터 탑승이 가능하니 돌아가실 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우현 님이 저희 ‘The Black’에 방문해 주셔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예의 바른 인사가 건네졌다. 고결이 작게 고개를 꾸벅이자 문 옆에 선 남자가 눈치껏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어 줬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온갖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헐떡이는 소리, 억눌린 소리,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 무언가가 끊임없이 부딪히며 마찰하는 소리 등등. 복도 위가 고요한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요란한 소음들이었다. 원래도 하얀 편인 고결의 얼굴이 핏기 없이 희게 질렸다. 하지만 문을 열어 준 남자는 그 소리에 별 감흥이 없는지 처음 얼굴 그대로 무표정했다. 고결이 룸 안으로 들어서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닫았다. 탁.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눈앞에 펼쳐진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하마터면 그대로 정신을 놓을 뻔했다. 룸은 고결이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크고 넓었다. 정중앙에는 기다란 대리석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중요한 건 그 위에서 어떤 남자와 여자가 정신없이 몸을 섞고 있다는 점이었다.
쏟아진 술이 테이블과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데도 두 사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자가 개처럼 납작 엎드린 여자의 얼굴을 테이블에 거의 짓누르다시피 힘껏 눌러 댔다. 그게 불편하지도 않은 건지 여자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교성을 내지르며 혀를 길게 내어 테이블 위에 쏟아진 술을 핥기까지 했다.
“…우욱.”
그때였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듯이 훅 다가온 건. 본능적으로 헛구역질을 한 고결이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예전에도 맡아 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이 악취의 출처를 찾을 여유 따윈 없었다. 고결은 숨을 참은 채 커다란 룸을 빠르게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