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60화 (60/71)

60화

“이 약 먹고서 알파 페로몬에 노출됐을 때 어땠어요? 주영재 씨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고 그랬어요?”

이번에도 주영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갑자기 두 손을 모으더니 싹싹 빌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약효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어떨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차우현은 대답을 종용했다.

“내가 주영재 씨한테 그 약 구해다 먹인다고 한 적 있어요?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어떻게 되는지나 빨리 말해요.”

꿀꺽. 주영재는 무의식중에 마른침을 삼켰다. 제 사정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한테도 이런 얘기까지는 자세히 꺼내 놓은 적이 없었다. 룸에서 일어난 일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두려워서 그랬다.

하지만 지금 주영재한테는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거부할 권리 따윈 없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차우현은 자신에게 쭉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차라리 차우현이 화를 내거나 욕을 한다면 이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감정의 동요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차분한 태도와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더 소름 끼쳤다. 사람 같지가 않았다.

“아, 알파의 페로몬에 엄청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데…. 그냥 히트사이클이 온 수준이랑 비슷….”

말끝을 흐린 주영재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눈을 내리깐 채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차우현의 서늘한 눈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놓고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당장에라도 차우현이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서 아무렇지 않게 숨통을 끊어 놓을 것만 같았다. 본능에서 기인한 두려움이 주영재를 감쌌다. 결국 주영재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해요. 비교가 안 돼요. 그냥… 그냥 섹스밖에 모르는 개처럼 굴게 돼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돼요.”

아무리 그래도 그 약을 먹고 뒤로 두 명을 동시에. 그것도 몇 번씩이나 받아 냈다는 말까지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도 고통은커녕 마냥 좋기만 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까지는 모르겠으나 제게 쏟아지는 알파의 페로몬이 황홀하다는 건 알았다. 통각은 둔해지고 오직 흥분감만이 고취됐다.

마치 온몸이 성감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마저 솜털이 삐죽 설 만큼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더 해 달라고 매달리고, 조르고, 스스로 허리를 돌리며 안겨 들었다. 다음 날, 걸레짝이 된 몸으로 며칠씩을 앓아누워도 그 약을 먹으면 또다시 그렇게 됐다.

그 약이 끔찍한 이유에는 이러한 점도 포함됐다. 약의 효과도 효과지만 전날 밤, 자신이 얼마나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는지, 얼마나 인간과 거리가 먼 행동을 했는지 하나도 잊히지 않고 전부 다 기억난다는 거.

몽롱함에 취해 기억이 흐려지거나 거의 싹둑 잘려 나가기까지 하는 여타 약들과 달리 이건 그런 부작용도 없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약이라고 말한 건 이런 점 때문이었다. 비록 약 자체는 몸에 해롭지 않아도 일단 먹게 되면 몸에 무리가 가는 짓을 하게 된다는 아이러니함이 있긴 했지만.

심지어 그들은 차우현과 같은 우성 알파도 아니었다. 열성 알파의 페로몬에도 그렇게 반응했는데, 그 약을 먹고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맡았다가는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약을 먹고서 알파 페로몬에 노출되면 어떻게 되냐는 차우현의 질문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싹싹 빈 것이었다. 학습된 공포라는 게 있으니까.

“약효는 바로 나타나요?”

“먹는… 양에 따라 달라져요. 많이 먹으면 곧바로 나타나고, 적게 먹으면 그만큼 천천히 나타나고….”

이런 건 왜 묻는 거지. 차우현의 속내가 몹시도 궁금했지만 주영재는 아무것도 되묻지 않았다. 그저 차우현의 눈치를 살피며 착실히 대답을 꺼내 놓았다. 어쨌거나 차우현이 지금 자신의 목줄을 쥔 사람임 틀림없어서였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주영재가 손가락을 힘껏 안으로 말아 쥐었다. 모든 걸 그만두려고 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연예인을 그만두고 나서도 먹고살 수 있을 만한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차우현의 목줄을 쥐고 협박하려고 한 것이었다. 차우현의 손에 제 목줄을 쥐여 준 다음에 개처럼 끌려 내려올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엔 앞으로 살아가야 할, 그리고 살아 내야 할 미래가 너무나도 암담했다. 지금 이 시궁창 같은 인생보다 훨씬 더. 차우현이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신발이라도 핥을 수 있었다. 고작 그런 걸로 자신의 행동을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야 못할 게 없었다.

“지속 시간은요?”

“그것도 양에 따라 다른데…. 보통은 네다섯 시간 정도고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지속 시간도 길어져요.”

하지만 대답을 하면 할수록 의아함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우현이 이렇게까지 약에 관심을 갖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먹을 뻔한 약이라서 확인차 캐묻는 거라고 보기에는 그 질문이 너무나도 상세했다. 마치 그 약을 사용하기 전, 미리 정보를 알아 두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주영재의 두 눈이 커졌다. 잠깐만, 사용? 사용이라니. 아니야. 설마, 차우현이 뭐 때문에 그런 짓을….

“음.”

뭔가 생각하는 얼굴로 낮게 침음한 차우현이 별안간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유려한 얼굴이 꼭 유명 예술가가 그려 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주영재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차우현의 웃음에 순간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웃어? 웃었다고? 도대체 왜? 주영재가 품은 의문은 곧이어 배가 되었다.

“그 역겨운 새끼들이랑 노는 모임에 나도 좀 불러 줄래요?”

충격으로 인해 주영재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고, 감히 그렇게 반문할 수도 없었다.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주영재의 얼빠진 얼굴을 보며 차우현이 더욱더 환하게 웃었다.

“아니. 무조건 불러.”

짧아진 말의 길이만큼이나 두 사람의 거리도 좁혀졌다. 주영재의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차우현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종이컵을 구둣발로 살짝 밀듯이 차 냈다. 종이컵이 무릎을 꿇고 있는 주영재의 앞으로 힘없이 굴러갔다. 툭. 제 무릎을 건드는 종이컵의 가벼운 감촉에도 주영재는 화들짝 놀라며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그 와중에도 차우현은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부드럽고 해사한 웃음이었다. 특유의 그 소년과도 같은 웃음. 주영재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뭐에 홀린 것처럼 그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저건 꾸며낸 게 아니었다.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웃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러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 줄 테니까.”

그 순간 종이컵이 차우현의 구둣발 아래서 처참히 구겨졌다. 콰직. 종이컵이 구겨지는 소리에 주영재는 목이 빠져라 열심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주영재의 본능이 뒤늦게 소리치고 있었다. 저 새끼는 미친놈이었다. 제가 지금껏 만나 온 그 어떤 알파들과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무서운 놈이었다.

애초에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 좋은 척 웃으며 제게 벽을 쳤을 때. 의외로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을 때. 그때 그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눈치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연기가 너무 완벽해서 설마 여태까지 쌓아 온 이미지가 전부 허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주영재는 차우현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던 눈을 아래로 내려 그의 구두를 바라보았다. 주영재의 시선을 느낀 차우현은 친절하게도 발을 치워 제가 짓밟은 종이컵의 형태를 보여 줬다. 처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처절하게 짓밟힌 종이 뭉치가 제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 남자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다음번엔 네가 이렇게 될 거라고.

-8. 각인-

‘별일 없어야 하는데.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간절한 바람이 혀 위에서 몇 번이고 뭉개져 내렸다. 고결은 택시 뒷좌석에서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물어뜯듯이 씹어 댔다. 귀에 댄 휴대폰에서는 몇 번째 듣고 있는지 모를 안내 목소리가 또 한 번 기계적으로 흘러나왔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 고결은 통화 종료 버튼을 터치하자마자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을 따로 설정해 두지 않은 탓에 단조로운 연결음만이 지속됐다. 뚜르르 뚜르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그 소리에 피가 말랐다.

오늘 드디어 주영재의 촬영이 마무리됐다.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전체 회식 때 얼굴을 보기야 하겠지만 일단은 한시름 덜어 내게 된 셈이었다. 그땐 비록 제가 이곳에 없겠지만 고결은 강서형을 믿기로 했다. 자신과 약속도 했으니 서형이 우현을 신경 써서 잘 챙겨 줄 것이었다.

고결은 평소처럼 차우현을 집으로 데려다준 뒤 본가로 향했다. 요즘엔 되도록 우현의 집이 아닌 본가에서 생활했다. 일본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짐을 꾸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인수인계가 끝난 다음 날 바로 출발해야 해서 이래저래 준비해야 할 게 좀 많았다.

“네. 형. 무슨 일이에요?”

우현한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허름한 빌라 앞에 도착해 막 계단을 오를 때였다. 퇴근 뒤에 우현이 따로 연락을 해 오는 일은 많지가 않았다. 고결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얼른 전화를 받았다. 결아.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묘하게 울렸다. 뭐지? 휴대폰이 이상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휴대폰 너머에서 미안함이 담긴 우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나 지금 밖이라, 결이 너한테 얘기해야 할 거 같아서.

“…밖이요? 이 시간에요? 갑자기 왜요? 형 오늘 약속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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