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어지간히 급하게 온 건지 숨이 찬 주영재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후. 그 상태로 작게 숨을 내뱉은 주영재가 자세를 바르게 고치곤 차우현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얘기는 전해 들었는데 휴대폰 찾는 거 저도 도와드릴까 해서 일부러 왔어요. 아까 보니까 매니저님은 차에 계시는 거 같더라고요.”
“네, 아마 그럴 거예요. 제가 밴 안에다가 휴대폰을 둔 것 같기도 해서 거기 좀 찾아 봐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휴대폰은 찾으신 거예요?”
“아니요, 아직. 혹시 여기 있을까 했는데 없네요.”
가까이 다가온 주영재가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중 하나를 차우현한테 내밀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였다. 그걸 본 차우현은 속으로만 비웃음을 흘렸다. 주영재는 자신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신다는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노리고 있는 목표물에 대한 학습이 이렇게 부족해서야. 이런 주제에 뭘 하겠다고 그렇게나 귀찮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멍청하게 제 속내를 다 비쳐 보이면서. 뭐, 결론적으로는 주영재가 그렇게 행동해 준 덕분에 이 계획도 짜게 됐지만.
“선배님 커피도 제가 가져왔어요. 여기요, 드세요.”
“고마워요. 일부러 내 것까지 챙겨 줘서.”
차우현은 언제나 그랬듯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주영재가 내민 커피를 건네받았다. 차우현을 바라보는 주영재의 눈동자에는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이 옅게 서려 있었다. 끝까지 멍청해서 다행이었다. 저 기대감을 곧 엉망진창으로 짓밟아 줄 생각을 하니 이 짓도 조금은 재미있게 느껴졌다. 불쾌함과는 별개로.
“잘 마실게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정작 차우현은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플라스틱 통 같은 것을 꺼냈다. 선배님, 그게 뭐예요? 주영재가 궁금하단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새까만 속내와는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물음이었다. 차우현은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열며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이거요? 제가 예전부터 사용하고 있는 약품인데…. 아, 그런데 영재 씨가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원래 전 제 매니저가 주는 거 아니면 이런 식으로 일일이 다 확인하거든요. 혹시 모를 일을 예방하는 차원에서요. 영재 씨한테만 이러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면 안 돼요. 알겠죠?”
“…확인, 이라뇨?”
확인.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등장에 주영재는 순간 목이 콱 막히는 기분마저 느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차우현이 그런 주영재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제가 데뷔하고 나서 정말 별일을 다 겪어서요. 그게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해요. 영재 씨도 저처럼 별별 일 다 겪으면서 여기까지 온 거일 테니까.”
주영재는 이제 아예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차우현이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연우’라는 이 배역을 얻기 위해 해 온 일들을. 그리고 지금 하려고 하는 일까지 전부 다. 오래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폐가 빠듯하게 조여 들었다. 아까만 해도 기대감이 어렸던 주영재의 눈동자에 깊은 불안함이 담겼다. 차우현을 응시하는 주영재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건 마약류 외에도 흥분제나 수면제 등 거의 모든 약물에 다 반응하는 액체예요. 제가 마시려는 음료 안에 약물이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으면 화학 작용으로 색이 변해요. 굉장히 짙은 파란색으로요. 한 방울만 떨어트려도 물감이 퍼지듯이.”
신기하죠? 차우현의 물음에 주영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우현은 손에 쥔 작은 플라스틱 통을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주영재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이런 기술이 발명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니면 진즉 무슨 일을 당해도 당했을 텐데.”
그때였다. 주영재가 다급하게 팔을 뻗은 건. 하지만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 있던 액체는 이미 커피 안으로 떨어진 후였다. 깜짝 놀란 주영재는 아예 차우현의 손에 들린 커피잔을 그대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탁, 종이로 된 잔이 바닥을 뒹굴며 검은색 액체가 널리 퍼져 나갔다. 향긋한 커피 향이 조용한 복도를 채웠다. 지금 이 긴장되는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
왜? 어째서? 당혹감으로 일그러진 주영재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분명 한 방울만 떨어트려도 색이 변한다고 했는데, 정작 바닥에 쏟아진 결과물은 그렇지 않으니 의아할 만도 했다. 홀린 것처럼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주영재를 보며 차우현이 혼잣말을 하듯 작게 읊조렸다.
“저런….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그제야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주영재의 눈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차우현은 아무렇지 않게 제 손에 들려 있던 작은 플라스틱 병을 보여 줬다. 차우현의 손에 들린 것은 안약이었다. 어느 약국에서나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사실 이거 안약이에요. 제 매니저가 안약을 꼭 가지고 다니거든요. 제가 눈이 피곤할 때가 많아서.”
안약 뚜껑을 닫아 도로 주머니에다 집어넣은 차우현이 덤덤히 말을 이어 나갔다. 감정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섬뜩했다. 뒷덜미의 솜털이 삐죽 서는 게 느껴질 정도로.
“근데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차피 주영재 씨가 방금 행동으로 다 시인한 거나 다름없는데.”
안 그래요? 차우현의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영재가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것도 무릎까지 꿇고서. 주영재는 더러운 줄도 모르고 차가운 바닥에 납작 몸을 엎드렸다. 아까부터 제대로 내쉬지 못한 숨에 어깨와 등이 가쁘게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그 작은 등을 차우현은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주영재는 할 줄 아는 말이 저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사과만 반복했다. 그러다 감정이 북받친 건지 아니면 이 상황이 두려워서인 건지 흑,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주영재의 목소리가 눅눅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너무… 흐윽, 너무 벗어나고 싶었어요. 배역이 간절하긴 했는데. 흡, 그래서 받아들이긴 했는데…. 흐, 설마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는 몰랐어요. 흑, 거기서 그 역겨운 새끼들이랑 더는… 진짜 더는 못 하겠어서. 그래서….”
울먹이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차우현은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그래서요? 전부 다 주영재 씨 선택이었잖아요. 나한테 그런 말을 왜 하죠? 내가 주영재 씨의 상황을 이해해 줘야 하나요? 주영재 씨가 나한테 뭐라고?”
차우현의 차가운 말에 주영재의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차우현은 귀찮다는 얼굴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여전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한테 지금 이 모습을 들켰다간 좋을 게 없었다. 짜증 나네. 입에다 저 컵을 쑤셔 넣어 버리면 좀 나으려나. 차우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주영재는 묻지도 않은 말을 나불나불 잘도 늘어놓았다.
“근데… 근데 그거 선배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약은 아니에요. 지, 진짜예요! 그렇게까지 나쁜… 그런 거 아니에요. 무, 물론 흥분제 일종이긴 한데…, 그냥 좀 오메가의 체취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약이에요. 몸에 무리가 간다거나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중독성도 없고요.”
거기까지 말한 주영재가 별안간 숙이고 있던 고개를 휙 쳐들었다. 차우현을 애절하게 올려다보는 주영재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오, 오메가 페로몬을 맡으면 단순히 흥분만 되는 게 아니라 기분이 엄청나게 좋아진대요. 막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그 약 먹은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약 정도로 생각하시면….”
그러니까 단지 날 황홀하게 만들어 주려고 했던 것뿐이니 용서해 달라 이건가. 차우현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위로 올라갔다. 멍청한 건 알고 있었는데 할 말, 못 할 말도 구분할 줄 모르는 머저리 수준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못 할 말이 차우현의 구미를 확 끌어당겼다.
“열성 오메가도 우성 정도로 느끼게끔 만들어 주나 보죠?”
차우현의 물음에 주영재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은 대답까지 덧붙이면서. 결국 본인의 페로몬만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 약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얘기였다.
아무래도 방금 주영재가 말한 그 역겨운 새끼라는 작자들은 놀 때 약을 먹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우성 오메가랑 놀면 될 걸 왜 그렇게 귀찮은 짓을. 잠시 품었던 그 의문은 머리를 살짝 굴리자 금방 해소되었다.
우성 알파만큼은 아니라지만 어쨌거나 우성 오메가도 그 수가 적은 편에 속했다. 열성 오메가에 비하면야. 거기다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다들 이미 결혼 시장에 매물처럼 올라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우성 알파의 대를 잇고자 혈안이 된 사람들한테 우성 오메가는 없어선 안 될 존재였으니까. 그러니 자신의 값어치를 위해서라도 몸조심을 하려고 들 것이었다. 약점을 잡히거나 한 게 아닌 이상 굳이 그런 모임에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한테 남은 선택지라고는 열성 오메가뿐이었다. 마음껏 데리고 놀고 유린하다 그 대가로 배역 하나 던져 주면 되니 뒤처리도 편했다. 그러니 본인들도 약을 먹어 가면서까지 열성 오메가를 데리고 노는 걸 것이었다. 오직 추잡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그럼 이 약을 오메가가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주영재 씨, 이 약 먹어 본 적 있어요?”
흠칫. 주영재는 대답 대신 몸만 벌벌 떨어 댔다. 그럼 그렇지. 알파만 먹는 게 아니라 다 같이 먹고서 노는 거였나 보네. 주영재의 반응에 차우현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