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선배님. 커피 차 왔다는데 선배님만 괜찮으시면 지금 저랑 같이 가실래요?”
“아. 그럴까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입꼬리를 살짝 당겨 올린 차우현이 자연스럽게 주영재와 발을 맞춰 걸었다. 강서형은 눈치껏 반걸음 정도 떨어져서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별안간 차우현이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행동에 주영재와 강서형 역시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어렸다.
“어…, 어떡하죠? 저 휴대폰이 없는 것 같은데….”
차우현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고 있는 주머니 위를 더듬거렸다. 그런 차우현의 행동에 강서형은 그저 올 게 왔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차우현이 물건을 잘 두고 다니고 잃어버린다는 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별 감흥이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원래 물건을 잘 깜빡하고 다니는 편이라서요.”
“어휴, 괜찮습니다. 휴대폰이야 찾으면 되죠.”
차우현의 사과에 강서형이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표정을 푼 차우현이 얼른 주영재한테 사과했다.
“영재 씨. 미안해요. 저 사진은 이따가 찍고 일단 휴대폰부터 좀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네? 아… 그, 휴대폰은 매니저님께서 찾아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 건 매니저가 하면 되지 굳이 너까지 나설 필요가 있느냐. 이 말을 주영재는 최대한 공손하게 전달했다. 억지로 웃느라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제 물건 잃어버린 건데 어떻게 그래요. 당연히 같이 찾아야죠.”
“아….”
“사진은 이따가 찍어요. 정말 미안해요.”
고개를 작게 꾸벅인 차우현이 일말의 미련도 없이 등을 돌렸다. 시발. 주영재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며 입속말로 조용히 욕을 읊었다. 다 받아 주는 척하면서 매번 이런 식으로 은근히 사람 엿 먹이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당하려니까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매니저가 물건 좀 대신 찾아 줄 수도 있지. 어차피 뒤치다꺼리해 주라고 있는 놈들인데. 저 머저리 같은 새끼.
“영재야! 빨리 와!”
그때 다시 한번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간다고! 작작 좀 불러! 평소 같으면 그렇게 짜증을 담아 소리쳤을 텐데, 그러기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주영재는 애써 화를 삭이며 매니저의 앞으로 뛰듯이 다가갔다.
“휴대폰 어디에다 뒀을 것 같은지 혹시 짐작 가는 곳은 있으세요?”
“음. 밴에다 둔 것 같기도 하고, 결이한테 맡겨뒀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일단 제가 결이 씨한테 전화해 볼게요.”
“근데 결이 지금 남 실장님이랑 통화 중인 거 아니에요?”
“아, 맞네. 그러네.”
Z가 급하게 일본으로 출국했다는 건 서형도 고결한테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 남 실장한테서 전화가 온 건 분명히 그 내용 때문일 것이었다. 전화를 걸면 받기야 하겠지만 한창 일 얘기 중일 텐데 방해를 하자니 좀 그랬다. 그게 아무리 짧은 용건이라고 해도. 아마 그래서 우현도 고결의 통화 상대가 남 실장이라는 점을 굳이 짚어 준 걸 것이었다.
“일단 괜찮으시면 서형 씨가 밴에 한번 다녀와 주시겠어요? 저는 혹시 모르니까 아까 감독님하고 얘기 나눴던 곳에 다시 가 볼게요. 어디에다 잠깐 올려놨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전 일단 밴에 갔다가 거기에 없으면 그때 결이 씨한테 전화해 볼게요.”
“네, 죄송해요. 부탁 좀 드릴게요.”
차우현의 예의 바른 인사에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시냐며 손사래를 친 강서형이 밴이 주차된 곳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강서형이 멀어짐에 따라 차우현의 얼굴에 어려 있던 미안함도 빠르게 걷혔다. 차우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주영재를 유인해 낼 미끼를 찾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휴대폰을 잃어버린 적 따위 없었다. 휴대폰은 지금 걸치고 있는 재킷 안주머니에 잘 들어 있었다. 그러니 강서형이 자신의 휴대폰을 발견하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강서형은 결국 고결한테 연락을 할 거고, 두 사람은 잃어버린 적도 없는 자신의 휴대폰을 찾는 데 혈안이 될 것이었다.
두 사람이 그러고 있는 동안 차우현은 주영재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말이 좋아 대화지 사실은 함정이었다. 차우현한테는 확신이 있었다. 주영재가 분명히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줄 거라는. 차우현이 알기로 이제 주영재가 나올 신은 거의 다 끝난 상황이었다. 다음에 죽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니 바짝 애가 타 있을 것이었다. 전보다 잦아진 연락의 빈도수만 봐도 지금 그가 얼마나 초조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때마침 저 앞에서 여자 스태프 세 명이 걸어왔다. 찾고 있던 미끼의 등장이었다. 차우현은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여자 스태프들을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차우현을 발견한 여자 스태프들이 반갑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우현 씨. 왜 여기 계세요? 지금 주영재 씨 커피 차 왔다고 해서 다들 거기 있는데. 우현 씨도 가서 뭐 좀 드세요.”
“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휴대폰을 잃어버려서요. 지금 찾고 있어요.”
“어머. 정말요? 어디서 잃어버린 거예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촬영장에서 벗어난 적 없으니까 여기 어디에 있긴 하겠죠? 그래서 지금 병원에 다시 가 보는 중이었어요.”
“병원이요?”
“네. 아까 감독님이랑 2층에 있는 자판기 앞에서 얘기 나눴었거든요. 그때 의자 위에다 올려두고 온 것 같기도 해서요.”
“그러셨구나. 그럼 저희도 찾는 것 좀 도와드릴까요?”
필요치 않은 호의였다. 차우현이 이 여자들한테 바라는 건 따로 있었다. 차우현은 원래도 곡선을 그리고 있던 두 눈을 더 가늘게 휘며 고개를 내저었다.
“감사한데 괜찮아요. 지금 제 매니저도 같이 찾아 주고 있거든요. 아, 그런데 세 분 지금 커피 차 가시는 거면 영재 씨한테 제 얘기 좀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영재 씨한테요? 어떤 얘기요?”
“아까 영재 씨랑 커피 차 앞에서 인증 사진 찍기로 했는데, 제가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약속을 못 지켰거든요. 영재 씨랑 같이 커피 차로 가다가 중간에 휴대폰 잃어버린 걸 알아채서요.”
거기까지 말한 차우현은 얼굴에 띠고 있던 다정한 웃음을 거둬 내고서 어렵지 않게 미안한 표정을 꾸며 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네요. 혹시 영재 씨한테 저 휴대폰만 찾으면 바로 거기로 가겠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차우현의 부탁에 여자 스태프들이 기다린 것처럼 동시에 긍정의 대답을 꺼내 놓았다.
“그럼요. 그럴게요.”
“네, 걱정 마세요. 꼭 얘기할게요.”
“저희가 영재 씨 보자마자 얘기할 테니까 우현 씨는 걱정 말고 휴대폰 찾으러 가 보세요.”
여자 스태프들이 차우현을 지나쳐 사이좋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우현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앞에 있는 병원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미끼는 보내 놨고 이제는 그걸 문 주영재가 제게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됐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병원 로비로 들어서자 촬영 준비를 하고 있던 몇몇 스태프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 왔다. 다들 이미 커피 차에 다녀온 건지, 아니면 누군가 대신 가져다준 건지 손에 플라스틱 잔을 하나씩 들고 있는 채였다. 컵홀더에 붙여진 주영재 얼굴의 스티커가 그 음료가 커피 차에서 온 것임을 알려줬다.
“어? 우현 씨. 저희 아직 준비가 덜 돼서 촬영 시작하려면 좀 더 있어야 하는데….”
장비를 나르던 스태프 중 한 명이 차우현한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난데없는 커피 차의 등장에 촬영 준비가 원래 예정되어 있던 시간보다 조금 늦어진 터였다. 차우현은 알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 옅게 미소 지었다.
“네. 저는 위에서 대본 연습 좀 하고 있으려고 일부러 일찍 왔어요.”
“아, 그러셨구나. 근데 우현 씨는 커피 차 안 다녀오셨어요?”
차우현의 손에 들린 거라고는 대본이 전부였다. 스태프의 물음에 차우현은 자연스럽게 주영재의 이름을 거론했다.
“아. 제 거는 영재 씨가 가져다주기로 해서요. 그럼 저는 위에 올라가서 대본 연습 좀 하고 있을게요.”
손에 든 대본을 살짝 흔든 차우현이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복도 가장 안쪽 끝에는 자판기와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 장소를 고른 것이었다. 다들 커피 차에서 마실 걸 받은 마당에 굳이 자판기가 있는 2층까지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늦어진 촬영 준비 때문에 바빠서 1층 로비를 떠날 수도 없을 거였고.
2층 복도 중앙은 뻥 뚫려 있어서 1층 로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다. 차우현은 잠시 멈춰 서서 아래를 응시했다. 자신이 있는 2층 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스태프들의 까만 머리가 보였다. 차우현은 그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다 유유히 자판기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내 미리 녹음 기능을 켜 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배님!”
자판기 앞에 얼마쯤 서 있었을까. 자신을 부르는 밝은 목소리에 차우현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양손에 커피를 든 주영재가 차우현의 쪽으로 거의 뛰듯이 다가왔다. 차우현은 두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자연스럽게 놀란 표정을 만들어 냈다.
“영재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제가 휴대폰 찾고 나서 커피 차로 가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