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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57화 (57/71)
  • 57화

    차우현의 대답에 고결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입꼬리를 당기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찌나 활짝 웃었는지 왼쪽뿐만 아니라 오른쪽 볼에도 보조개가 슬쩍 들어갔다.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그 보조개에 차우현 역시 덩달아 예쁘게 두 눈을 휘었다. 순간 참기 힘든 갈증 같은 것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결의 오른쪽 볼에 있는 보조개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오른쪽 볼에도 보조개가 들어가도록 웃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차우현은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좋았다. 고결의 보조개를 볼 때마다 저 볼우물에 갇혀 죽어도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제게만 허락된 유일함이자 특별함인 것 같아서 쓸데없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들떠 있었다.

    ‘착각했지. 바보처럼.’

    차우현은 속으로 조소했다. 저 보조개가 자신한테만 주어지는 근사한 선물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까 저건 유일함을 약속한 선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린 보물이었다. 다른 사람은 절대 볼 수 없도록 저 혼자만 아는 곳에 숨겨두고 봐야 할. 이제라도 그 사실을 깨달아 다행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우현 선배님!”

    고결의 양 볼에 팬 보조개는 금방 자취를 감춰 버렸다. 스태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주영재가 차우현을 발견하곤 이쪽으로 뛰듯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친밀함이 담긴 그 목소리에 차우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아, 영재 씨.”

    차우현의 알은척에 주영재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오. 조금 길게 늘어지는 말끝에서 자연스럽게 애교가 묻어났다.

    “저 오늘 생일이라 팬분들이 커피 차 보내 주신댔거든요. 이제 곧 올 테니까 가서 맛있는 거 드세요.”

    “고마워요, 영재 씨.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받으려고 드린 말씀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선배님이 축하해 주시니까 기분 엄청 좋네요.”

    입 동굴이 보일 정도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앳되고 귀여웠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는 강서형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다 못해 썩어들어 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쟤 눈에는 우리가 아예 안 보이나 보다.”

    강서형의 귓속말에 고결은 어색한 얼굴로 작게 고개만 내저었다. 그러지 말라는 말 대신이었다.

    “저 그래서 그런데…. 선배님. 혹시 괜찮으시면 이따가 커피 차 앞에서 같이 인증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당연히 되죠.”

    주영재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차우현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그 순간 점퍼 주머니에서 긴 진동이 느껴졌다. 고결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남윤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연락이 온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남 실장님?”

    힐끔, 고결의 휴대폰 액정을 본 강서형이 물었다. 고결이 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강서형이 다시 한번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가서 전화 받고 와. 여긴 내가 맡고 있을게.”

    안심하고 나만 믿으라는 듯 강서형이 씩 웃어 보였다. 고결은 고맙다는 의미를 담아 강서형과 잠시 눈을 맞추다 차우현한테 양해를 구했다.

    “형. 저 남 실장님한테 연락이 와서요.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응, 결아. 다녀와.”

    그제야 줄곧 차우현한테만 고정되어 있던 주영재의 시선이 고결의 쪽으로 옮겨 갔다. 그때 그 일 이후로 주영재는 따로 고맙다거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 오지는 않았다. 그냥 아무 일 없는 듯 똑같이 굴었다. 그건 고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인사를 듣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었기에 그런 주영재의 태도가 기분이 나쁘다거나 섭섭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고결은 짧은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주영재도 고결을 향해 고개를 살짝 까닥거렸다. 고결은 세 사람을 뒤로한 채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그나마 조용히 통화를 할 수 있을 만한 곳으로 바쁘게 걸어갔다.

    “네. 실장님.”

    -어. 결이 씨. 지금 잠깐 통화 괜찮아?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고결이 자리 잡은 곳은 병원 뒤쪽에 조성된 인공 공원이었다. 주변이 나무와 잔디로 둘러싸여 있는 데다가 중간엔 분수대도 있어 짬이 날 때면 스태프들이 쉼터로 자주 찾는 곳이었다. 비록 분수대가 운용되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병원 운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른 새벽 아니면 아예 늦은 밤에만 촬영이 진행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작중 우현이 맡은 ‘현재’의 직업이 외과 의사인지라 병원 그림은 필수였다. 거의 매 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현재’의 개인 사무실과 진료실 등은 세트로 지어 놨지만 병원 외관과 로비 그림이 필요할 때는 이렇게 직접 와서 찍었다. 메디컬 드라마라면 또 모를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세트로 만드는 건 제작비 낭비였다.

    -애들은 잘 도착했대. 아까 연락받았어.

    그렇게 말하는 남윤의 목소리에서 숨기지 못할 피곤함이 묻어났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특성상 남윤처럼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육체의 휴식 보장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한그루 엔터테인먼트처럼 소속된 연예인들이 많으면 그만큼 돌발 상황이 생길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작게는 스케줄 변경에서부터 크게는 신문 사회면에 나올 법한 일까지. 돌발 상황의 종류와 규모는 다양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부서가 칼퇴근은 고사하고 주말 출근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근데 실장님 퇴근은 하신 거예요?”

    휴대폰 너머에서 대답 대신 힘없는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고결은 그 웃음에 담긴 말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했겠니?’란 의미였다. 아, 못 하셨구나. 자신도 지금 이 시간에 밖에 있으면서 고결은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지금 내 퇴근이 문제가 아니야. 그쪽이 문제지. 완전 아비규환이다. 아비규환이야.

    하아. 남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의 계획과는 다르게 Z는 오늘 일본으로 출국했다. 예정된 것보다 거의 2주 넘게 이른 출국이었다. 스케줄 변경이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해외 스케줄을 이런 식으로 앞당기는 건 흔치 않았다.

    차우현이 다녀간 뒤로 긴급회의를 소집한 한 대표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그저 Z의 출국을 앞당길 것을 지시했다. 리얼리티 영상이든, 자체 예능이든 다 좋으니 일단 출국해서 뭐든 찍고 있으라면서. 그것도 최대한 빨리.

    갑자기 내려온 지시에 직원들은 흔히들 말하는 ‘멘탈 붕괴’에 빠졌다. 의기투합해서 반대 의견을 표시하긴 했는데 곧바로 기각당했다. 그 강압적인 처사에 직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급히 콘텐츠를 짜야만 했다. 회사 생활이라는 게 어딜 가든 그랬다.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지금 당장 떠날 수 있는 스태프 인원을 추리고, 예매해 둔 비행기 표를 앞당기고, 지낼 숙소를 알아보는 일이 콘텐츠 회의와 함께 진행됐다. 모두 거의 회사 지박령이 되어서 일에만 매달렸다. 다만 Z로 옮겨 갈 예정이긴 해도 아직 차우현을 담당하고 있는 고결은 그 업무에서 빠졌다. 다들 고생하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런 힘도 되어 주지 못하는 게 고결은 못내 미안했다.

    -결이 씨도 인수인계 기간 끝나면 그냥 곧바로 일본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지금 거기가 한 사람이 아쉽고 급한 상황이라서. 그래도 괜찮을까?

    “네, 그럼요. 괜찮습니다.”

    남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히려 빨리 가면 갈수록 좋았다. 낯선 땅에 가서 하루하루 일에 치여 살다 보면 그나마 우현의 생각이 덜 날 것이었다. 그 얄팍한 기대감을 알 리가 없는 남윤은 고결의 말에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워. 그럼 결이 씨 미리미리 짐 좀 싸고 있을래? 어차피 다음 주면 인수인계도 끝이잖아. 비행기 표는 내가 알아서 날짜 옮겨 놓을게. 그날 결이 씨 말고도 스태프 몇 명 더 같이 갈 거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다며 남윤이 체념 조로 중얼거렸다. 말하고 나니 지금 이 상황이 더 어이없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고생이 많으세요. 거기에 대고 고결이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다소 뻔한 위로뿐이었다. 그래도 그 위로가 듣기 싫지는 않은 건지 남윤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고생은 뭐 나만 하나. 지금 시간에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결이 씨도 고생이지. 어휴, 그럼 나는 이제 눈 좀 붙여야겠다. 이러다가 과로로 죽겠어.

    “이제 퇴근하시는 거예요?”

    -아니. 퇴근은 못 할 거 같고 그냥 회사에서 자려고. 어차피 집에 가 봤자 연락 계속 올 텐데 그럴 바엔 회사에서 자다가 연락 오면 받고, 일할 거 있음 하고 그러는 게 더 나아.

    그럼 결이 씨도 수고.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건지 남윤이 지친 인사를 끝으로 먼저 전화를 끊었다. 네, 들어가세요. 이 다섯 글자를 말할 시간도 없었다. 고결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잠시 바라보다가 서둘러 공원을 벗어났다.

    ***

    “영재야! 커피 차 왔어!”

    커피 차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린 건 고결이 전화를 받으러 감과 거의 동시였다. 차우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주영재가 매니저의 목소리에 몸을 반쯤 뒤로 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서 이리 오라는 듯 가볍게 손짓하는 매니저가 보였다. 어, 알겠어. 잠깐만! 큰 소리로 외친 주영재가 다시 몸을 돌려 기대에 찬 눈으로 차우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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