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56화 (56/71)
  • 56화

    “우현이 형 동영상을 찍어서 그걸 빌미로 돈을 뜯어낼 심산인가 봐요. 처음엔 그냥 우현이 형을 꼬시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게 자기 마음처럼 쉽지가 않으니까 이젠 아예 약도 생각하는 거 같더라고요.”

    “어후, 시발!”

    고결의 말을 듣자마자 강서형이 허공에다 대고 크게 욕을 내뱉었다. 그 새끼 안 그래도 TV로 볼 때 관상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는 둥, 어쩐지 싸했다는 둥, 어린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눈에 독기가 가득하다는 둥. 주영재에 대한 엄청난 험담이 줄줄 이어졌다. 한참 그렇게 난리를 치다 겨우 진정이 된 강서형이 다부진 얼굴로 고결을 바라보았다.

    “그래, 알겠어. 결이 네 말 다 이해했어. 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현 씨 입에 들어가는 건 내가 주는 음식이랑 자기 침밖에 없을 테니까.”

    과장된 강서형의 말에 고결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저렇게 말해 주니까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내일은 주영재 촬영 없고, 곧 있으면 신도 다 끝나서 우현이 형이랑 만날 일 별로 안 남았어요.”

    “그래? 그거 잘됐네.”

    “형이랑 저랑 같이 있으니까 별일 없겠죠. 형이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그렇지. 전직 유도 선수에 태권도 선수가 같이 있는데 누가 감히 우현 씨를 건들 수 있겠어. 안 그래?”

    허튼짓하면 찍어 차기로 두개골을 갈라 줄 거라며 강서형이 금방이라도 다리를 올릴 것처럼 폼을 잡았다. 태권도를 오래 해서 그런가 잠깐 잡는 폼도 꽤나 그럴싸했다. 고결은 자신도 모르게 오,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반응에 의기양양해진 강서형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다시 한번 폼을 잡았다.

    “제대로 보여 줄까? 나 아직 안 죽었어. 날아 차기랑 이단 옆차기랑 돌려 차기도 해.”

    그대로 두면 정말 보여 줄 기세라 고결은 강서형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아 세트장 방향으로 살짝 떠밀었다. 떠밀려 걸으면서도 강서형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만 제 뒤에 서 있는 고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왜. 진짜로 보여 줄 수 있다니까?”

    “저는 형한테 보답으로 낙법 못 보여 드리니까 우리 그냥 들어가요.”

    고결의 실없는 농담에 강서형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결은 그런 강서형의 어깨를 힘주어 꾹꾹 주물러 주며 차우현의 CF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세트장으로 돌아갔다.

    ***

    “오늘 쟤 안 온다고 하지 않았어? 촬영 없다며.”

    고결의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린 강서형이 목소리를 죽인 채 물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고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우 및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고 메이크업 수정을 받고 돌아오니, 아까만 해도 없던 주영재가 떡하니 촬영장에 있었다. 고결은 스태프 사이에 껴서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주영재한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오늘 분명히 촬영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때마침 고결의 앞으로 그나마 친분이 있는 스태프 한 명이 지나갔다. 바로 이전 드라마도 같이 한 터라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고결은 그 스태프한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 근데 오늘 혹시 촬영에 변동 사항이 있나요?”

    “네? 변동이요?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오늘 주영재 씨 촬영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기 계시길래 혹시 무슨 변동이 있나 싶어서요.”

    스태프한테 향해 있던 고결의 시선이 저 멀리 서 있는 주영재의 쪽으로 옮겨 갔다. 아아. 그 시선을 따라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스태프의 입에서 작은 깨달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주영재 씨 촬영 없는 거 맞고요. 그 뭐라더라? 아, 오늘이 생일이라서 팬들이 커피 차를 보내 준다고 했대요. 그거 인증 사진 찍으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곧 있으면 커피 차 온다니까 가서 드세요. 저 앞쪽에 주차장 있잖아요? 거기로 온다는 거 같았어요.”

    스태프는 친절하게 커피 차가 올 위치까지 일러주고 나서야 다시 길을 떠났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 뒤에다 대고 감사 인사를 전한 고결이 제 옆에 서 있는 강서형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데요?”

    “그럼 우리 오늘 진돗개 1호 발령이야?”

    “음. 글쎄요. 1호까진 아니어도 2호쯤? 일단 조심하는 게 좋긴 하겠죠.”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곁으로 발소리를 죽인 차우현이 자연스럽게 붙어 섰다. 뭘 조심해? 바로 뒤에서 들리는 낮은 물음에 강서형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흡사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았다.

    “어우! 깜짝이야!”

    강서형이 제 가슴 위로 손을 올린 채 황급히 뒤로 몸을 돌렸다. 그 격렬한 반응에 깜짝 놀란 건 마찬가지인지, 당황스러운 눈으로 강서형을 응시하던 차우현이 이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어떡해.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어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만큼이나 근사했다. 강서형은 자신도 모르게 차우현을 무슨 예술 작품 감상하듯 넋 놓고 바라보았다.

    차우현이 잘생겼다는 것 정도야 강서형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눈이 머리 꼭대기에 붙은 사람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잘난 외모의 소유자였으니까. TV로 볼 때도 그랬는데 하물며 이렇게 실제로, 그것도 바로 코앞에서 보는 차우현은 고작 잘생겼다는 단어 하나로 표현하기가 미안할 정도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차우현이 말을 걸면 순간적으로 그 주변의 시간만 느리게 흐르고 마치 금가루 같은 게 흩날리는 듯한 착시 현상 비슷한 것에 빠졌다. 그 어떤 여자 배우를 맡았을 때도 겪어 본 적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사람한테 홀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했다. 설마하니 같은 거 달린 남자한테 홀리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얼굴에 적응하려면 앞으로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에? 아, 아뇨. 아닙니다. 아니, 여기는 왜 이렇게 벌레가 많아? 벌레 때문에 놀란 거였어요. 벌레 때문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강서형이 다급히 수습에 나섰다. 강서형은 절대로 우현 씨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며 허공에다 대고 손뼉을 짝짝 쳤다. 벌레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얼씬 못할 다소 부산스러운 행동이었다. 강서형의 과장된 행동이 우스운 건지 작게 소리 내 웃은 차우현이 고결한테 시선을 뒀다.

    “근데 뭘 조심한다는 거야?”

    “아, 그게…, 벌레요.”

    댈 만한 핑계가 이것뿐이라는 게 절망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서형과 논의 끝에 고결은 주영재에 관한 얘기를 우현한테 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얼마 뒤면 자연스럽게 보지 않게 될 사람이었다. 그 인간이 뒤에서 그런 말을 했다더라. 조심하는 게 좋겠다. 이런 얘기를 해 봤자 괜히 우현의 기분만 상하고 찝찝할 것이었다. 아무리 남은 신이 많지 않다고 해도 같이 연기하는 내내 신경 쓰일 거고.

    “여기에 물리면 위험한 벌레라도 있어?”

    의아하다는 듯 물은 차우현이 손에 쥔 대본을 허공에다 휘휘 내저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지금 당장만 해도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순 작은 날벌레들뿐이었다. 고결은 얼른 머리를 굴려 그나마 그럴싸한 말을 지어냈다.

    “왜, 저쪽에 공원 있잖아요. 거기서 가끔 벌 같은 게 날아오고 한다나 봐요. 스태프분들이 쏘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형, 감독님하고 얘기는 다 끝난 거예요? 갑자기 왜 부르신 거예요?”

    고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대화를 돌렸다. 고결의 질문에 차우현이 대본을 휘두르던 손을 멈췄다.

    “아. 다음 시즌 얘기 때문에.”

    덤덤한 대답이 이어졌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날벌레를 쫓다 말고 하기엔 너무 대단한 얘기였다.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가 상반기 방송가에서 가장 큰 기대를 받고 있는 화제작인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직 3화밖에 방영되지 않은 마당에 벌써 다음 시즌 얘기가 오고 가다니. 물론 촬영은 이미 거의 다 끝내 놓은 상태지만 이건 확실히 흔치 않은 경우였다.

    “시즌이요? 이거 시즌제로 간대요?”

    “확실한 건 아니고 아직 논의 단계이긴 한데, 김 작가님이 풀고 싶은 얘기가 좀 많으신가 봐. 쓰면 쓸수록 욕심난다고. 근데 제작사 측에서도 시즌제에 반응이 긍정적인 모양이야. 감독님이 이거 시즌제로 가도 괜찮겠냐고 물어보셔서, 뭐 그런 얘기하고 왔어.”

    “그래서 형은 뭐라고 대답했어요?”

    차우현을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 가득 기대감이 차올랐다. 여태 우현이 맡은 역할 중 아끼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는 조금 더 특별했다.

    고결이 예상한 대로였다. 우현의 파격적인 연기 변신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매일같이 우현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이면 각종 커뮤니티가 종일 들썩거렸다. 방영 전에는 오늘 회차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방영 후에는 이번 화도 미쳤다고 후기를 나누느라. 우현이 보다 더 많은 사람한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이 기쁘고 행복했다.

    “시즌제인데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되잖아. 이건 어떻게든 일정 맞춰서 찍을 테니까 걱정 마시라고 했어. 대신 너무 급하게만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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