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55화 (55/71)
  • 55화

    “아. 내가 얘기 안 했나? 나 예전에 한미영, 오수진 맡았었어. 그 뒤로는 쭉 베타 연예인만 맡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강서형이 별안간 인상까지 찌푸려 가며 진절머리를 쳤다.

    “어후, 말이 좋아 매니저지 사실은 거의 가드나 다름없었어. 완전히 경호원 대용이었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냥 지켜보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사주 경계를 하고 다녔다니까.”

    강서형의 얘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억이 났다. 고결이 알기로는 강서형도 자신과 같은 운동선수 출신이었다. 비록 종목은 태권도와 유도로 달랐지만. 큰 대회에서 여러 번 상도 받을 만큼 유망주였는데, 강서형 역시 부상 때문에 태권도를 그만두게 됐다고 했다. 모든 걸 걸고 죽도록 해 온 운동을 어느 순간 등지게 되는 사람은 대부분 부상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 사실 알파 연예인한테 별로 좋은 감정 없거든. 그때 하도 미친놈들 많이 봐서. 그것 때문에 그 뒤로는 쭉 베타 연예인만 맡은 것도 있고. 약간 좀 뭐라고 해야 하지? 아, 질렸다고 해야 하나? 그래, 질렸다는 말이 맞겠다. 지치기도 했고.”

    강서형을 바라보는 고결의 두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알파 연예인한테 좋은 감정이 없다면서 굳이 우현의 매니저를 자처한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것도 상관없을 만큼 남 실장님이 엄청나게 좋은 조건을 내건 걸까. 생각하는 게 얼굴로 고스란히 드러나기라도 한 건지 강서형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도 우현 씨 맡겠다고 한 건 물론 돈이 제일 커. 연봉을 많이 올렸거든. 근데 단순히 그거 하나 때문만은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그때랑 다르게 미친놈들한테 이상한 짓 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우현 씨는 우성 알파니까. 그렇다고 우현 씨가 미친 짓 저지를 사람도 아니고.”

    안 그래? 강서형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결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살짝 굳어진 얼굴로 신중하게 할 말을 골랐다. 강서형의 기대감을 깨트리려니 미안한데, 어차피 앞으로 우현의 매니저를 할 거라면 알아둬야 할 사실이었다.

    “근데… 사실 우현이 형도 크게 다를 건 없어요. 주변에 노리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렇다고 오메가 배우 맡으셨을 때처럼 막 경호하듯이 그럴 것까진 없고…. 어차피 웬만한 페로몬으로는 우현이 형한테서 절대 반응을 끌어낼 수 없으니까요. 그 대신에 음식, 특히 음료수 같은 건 누가 주든지 다 거절하세요. 팬들이 주는 것도요.”

    “마시는 거? 왜?”

    “그게, 가끔가다 약 같은 거 타서 주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흥분제나 뭐 그런 거요.”

    “뭐? 이거 완전 미친 새끼들 아니야?”

    흥분제라는 단어에 강서형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한미영과 오수진을 맡았을 때 일부러 대놓고 페로몬을 흘리며 희롱하는 알파 놈들은 꽤나 봐 왔다. 베타라서 페로몬을 느낄 수 없는 강서형은 그 사실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들의 붉어진 얼굴이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곤 대피를 시키듯 서둘러 다른 곳으로 데려가곤 했다. 발정 난 더러운 새끼들, 같은 말을 잇새로 작게 중얼거리면서. 그런 정신 나간 알파들조차도 제 페로몬을 쓰면 썼지 몰래 약을 타서 먹이려는 추잡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아니,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그딴 무식한 방법을 쓰는 것들이 있단 말이야? 그거 그냥 범죄잖아. 무섭지도 않나?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우현을 그딴 식으로 건들려고 해?”

    그 녀석들은 목숨이 두 개냐며 강서형이 쯧쯧 혀를 찼다.

    “눈 뜨면 뭐 어디 영화에서처럼 드럼통 안에 꾸깃꾸깃 몸 접혀서 들어가 있고, 머리 위로는 시멘트 떨어지는 거 아니야?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CH그룹에서 그딴 식으로 자기 아들 옆자리 꿰차도록 가만히 놔두겠냐고.”

    “…그런 뒷일도 생각 안 하게 될 만큼 간절한 사람들도 있나 보더라고요. 우현이 형한테 그런 짓을 하고 나서 자기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보다는 지금 당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더 걱정인 사람들이요.”

    고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심지어 그런 사람이 지금 우현의 바로 옆에 있었다.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를 함께 찍고 있는 주영재였다.

    -너 진짜 미쳤니? 정신 차려, 주영재. 그거 엄연히 범죄야.

    -그래서? 범죄인 게 뭐? 그게 뭐가 어쨌는데? 그럼 그 더러운 새끼들이 배역 하나로 사람 목줄 쥐고 약 먹여 가면서 역겨운 짓 하는 건 합법이야? 누나는 내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 아무리 누나라도 화나니까.

    -…영재야.

    -누나. 나는 진짜 치가 떨려. 앞으로도 계속 이 짓거리 하면서 이 바닥에 붙어 있어야 될 거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고, 눈앞이 캄캄하고…. 왜, 대체 왜 하필이면 열성 오메가 같은 걸로 발현해서 이 개고생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싶어.

    -그래서 진짜로 동영상을 찍겠다고? 너 그러다가 역풍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거기서 네 제안 받아들이지 않고 이거 그대로 공론화할 수도 있어. 그러면 너 그냥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야. 차우현 건들고서 재기가 가능할 거 같아?

    -아니, 그럴 일 절대 없을 거야. 한그루 엔터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우현 영상이 퍼지게 그냥 둘 리가 없잖아. 자기들한테 제일 큰 돈줄인데.

    -하… 그래, 일단 알았어. 그럼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근데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너 여태까지 차우현한테 계속 작업 걸었는데 하나도 안 먹혔잖아. 그 사람 웃는 얼굴로 계속 철벽 쳤잖아. 그리고 너 이제 촬영도 거의 다 끝났어. 상황이 이런데 무슨 수로 그 사람이랑 그런 동영상을 찍겠다는 거야.

    -물론 나랑 섹스하는 동영상 찍는 게 가장 좋기야 하지. 근데 굳이 진짜로 하지 않아도 돼. 그냥 하는 척만, 그런 분위기만 잡아도 돼. 어차피 차우현한테는 그것도 타격이 클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하는 척이라니?

    -…그 새끼들이 나한테 쓰는 약. 그거 먹으면 차우현도 별수 없을 거야. 나는 약발 돌아서 헐떡이는 차우현 몸 좀 쓰다듬으면서 영상이나 찍으면 돼. 그러고서 뭐든 최대한 크게 한몫 챙기고 은퇴할 거야. 나 더 이상 이렇게는 안 살 거야.

    저번 촬영 때 주영재의 스타일리스트를 맡고 있는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에 녹음된 음성 파일을 들려줬다. 주영재가 우현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 이미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의했고 또 경계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악독한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거기다 고결한테 녹음을 들려주고 있는 사람은 이 통화 내용의 당사자이기도 했다. 이 여자가 자신한테 이걸 들려주는 저의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영재 아이돌로 데뷔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 친해요. 서로 이런 얘기도 터놓고 할 수 있을 만큼요.”

    녹음 파일의 재생이 끝나자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작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잔뜩 묻어났다.

    “녹음 기능을 늦게 켜서 앞부분은 잘렸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들으셨으면 충분히 상황 이해되셨을 거라 생각해요. 아, 그리고 이 파일은 절대 못 드려요. 드릴 생각 없어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자가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삭제 버튼을 눌렀다. 주영재가 얼마나 무섭고 또 형편없는 인간인지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증거품이 증발해 버렸다. 고결이 말리거나 제지할 새도 없이. 눈앞에서 허무하게.

    “이걸 저한테 왜 들려주시는 건데요?”

    “…혹시라도 영재가 정말 저런 사고를 칠까 봐 불안해서예요. 저 날 술을 좀 많이 마셔서 감정이 격해진 상황이긴 했는데….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거 없으니까요. 차우현 씨 좀 옆에서 잘 지켜봐 주세요.”

    “잘 지켜봐야 하는 건 우현이 형이 아니라 주영재 씨 아닌가요? 지금 주영재 씨가 잠재적 가해자인 거잖아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다. 애꿎은 사람한테 화내고 싶지는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말이 좋게 나가질 않았다. 날 선 고결의 대꾸에 여자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알아요, 저도. 지금 제 말이 엄청나게 이기적이라는 거. 그런데 제가 영재를 계속 지켜볼 수가 없어요. 영재 전담으로 일하고 있는 게 아니라 촬영장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올 때도 많거든요. 그러니까… 영재 촬영 다 끝날 때까지만 부탁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여자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여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고결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다. 현실감도 없고 믿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부정해 봤자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우현을 지켜야 했다.

    “저 안 그래도 이거 관련해서 형한테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주영재 씨 있잖아요. 우현이 형이랑 붙는 신 다 끝날 때까지 좀 주의 깊게 살펴봐 주세요.”

    “주영재? 걔는 왜? 아. 오메가라서?”

    덤덤한 물음이 이어졌다. 오메가라서? 강서형의 그 악의 없는 물음이 어쩐지 씁쓸하게 들리는 건 괜한 제 자격지심 때문일 거라고 여겼다.

    “아니요. 단순히 오메가여서 그런 건 아니고 제가 주영재 씨 쪽 스태프 중 한 명한테 좀 충격적인 얘기를 전해 들어서요. 둘이 술 마시면서 나눈 대화를 녹음해서 들려줬는데….”

    “왜? 설마 걔도 우현 씨한테 뭐 약 같은 거 먹이겠대?”

    강서형의 입장에서는 반 장난식으로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고결한테는 장난이 아니었다. 고결은 대답 대신 고개만 작게 주억거렸다. 강서형의 미간이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확 구겨졌다.

    “뭐? 진짜? 진짜로 그런 말을 했다고?”

    강서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에 찬 얼굴로 되물었다. 고결은 여자가 자신한테 들려준 음성 파일의 내용을 최대한 축약해서 설명했다. 강서형이 핵심만 이해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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