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뇨. 제 선에서 잘 처리할게요. 우현 씨 눈에 띄지 않도록.”
방금까지만 해도 감정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던 시린 얼굴이 사르륵 녹았다. 꼭 겨우내 움츠린 꽃들을 깨우는 봄 햇살처럼 따스하고 환하게. 차우현이 두 눈을 가늘게 접어 가며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설명은 필요 없겠네요.”
“…….”
“바쁘실 텐데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대표님.”
다시 평소의 차우현이었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살짝 숙인 차우현이 미련 없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멍청한 얼굴로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던 한 대표가 황급히 차우현을 불렀다.
“저, 저기 우현 씨!”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세운 한 대표가 앞으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 팔은 차마 차우현을 붙잡지 못하고 그의 소매 부근만 어설프게 맴돌았다. 차우현이 시선을 내려 그런 한 대표를 바라보았다. 한 대표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어색하게나마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우리 서류를… 그러니까 우현 씨가 얘기한 그 재계약 부분에 대해서 따로 서류를 작성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가 그때 구두로만 진행했지 그 내용을 문서화해 두지는 않았잖아요.”
투명하다 못해 노골적이기까지 한 대표의 말에 차우현이 작게 실소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으나 한 대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긴장한 표정으로 얌전히 차우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식은땀이라도 난 건지 한 대표의 이마가 번들거렸다.
“이번에 일 처리 하시는 거 보고요. 마음에 들면 바로 사인할게요.”
다시 한번 고개를 까딱인 차우현이 그대로 등을 돌려 대표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한 대표는 소파에 푹 등을 기대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착잡한 한 대표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다 큰 호랑이가 저벅저벅 제 발로 들어온 것이었다. 가증스럽게 새끼 호랑이도 아닌 고양이의 탈을 쓰고서는. 세수를 하듯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벅벅 문지르던 한 대표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어, 남 실장. 10분 있다가 긴급회의 소집할 거거든?”
-…예? 긴급회의요?
“응. 자세한 내용은 그때 말해 줄 테니까 일단 각 팀 실장이랑 팀장급들 호출해서 대회의실로 와.”
그래. 호랑이가 원하는데 치워 드려야지. 안 치우고 버티다가 목덜미 물려서 죽기 전에. 전화를 끊은 한 대표의 입에서 또 한 번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7. 함정-
새로운 매니저의 현장 투입은 최소 사나흘, 길게는 일주일까지도 걸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차우현한테 아무 매니저나 덥석 붙여 줄 순 없으니, 내부에서도 이래저래 따지는 게 많아서 그랬다. 남윤은 꽤 자주 고결한테 전화를 걸어 의견을 구했다. 상담 비슷한 것이었다.
-나이가 어려야 우현 씨가 대하기 편할까 싶어서 찾아 봤는데, 아무래도 우현 씨보다 나이 어린 사람은 경력이 부족해가지고서…. 어떡하지? 그래도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을까? 하, 근데 나는 서형 씨가 딱 마음에 들거든. 나이만 빼면.
“아무래도 나이가 어리면 형이 대하기가 쉽기는 할 텐데…. 근데 서형이 형이면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형이 워낙에 친화력이 좋잖아요.”
매니지먼트 팀 사람들 가운데서 남윤이 가장 적합한 매니저 후보로 뽑은 건 강서형이라는 인물이었다. 강서형은 올해 서른 살로 매니저 경력은 6년 차지만 한그루 엔터테인먼트로 옮겨 온 지는 이제 1년이 조금 넘은 사람이었다.
매니지먼트 팀은 외부에서 활동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웬만큼 오래 다니지 않는 이상은 서로 친하기가 쉽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강서형은 아무렇지 않게 그걸 해냈다. 그만큼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시원시원한 성격이 더해져 처음 보는 사람도 금방 마음을 내려놓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회사를 더 자주 가지 못하는 고결조차도 강서형과는 상당히 금방 친해졌다.
강서형은 고결을 보자마자 대뜸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 유명한 고결 씨구나? 안 그래도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같은 말을 하면서. 그게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어쩐지 별로 싫지가 않았다. 정말로 반갑다는 듯 맞잡은 손을 연신 흔들며 호탕하게 웃는 얼굴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차우현과는 다른 의미로 사람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친근하면서도 다정한 느낌이 드는.
-그렇지? 역시 결이 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서형 씨 정도면 우현 씨랑도 금방 친해지겠지? 경력, 성격, 일 처리 다 따져 봤는데 서형 씨 말고는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없는 거야.
고결의 대답에 남윤은 마치 그 말만 기다린 것처럼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휴대폰 너머에서 숨길 수 없는 기쁨과 한시름 놨다는 안도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반응을 보아하니 부정적으로 대답했으면 큰일 났겠다 싶었다.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긴 했지만.
-그럼 서형 씨 지금 일정만 정리하고 얼른 보내 줄게. 다시 연락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고민하던 문제가 끝나서 후련한 건지 남윤은 한결 가벼워진 톤으로 전화를 끊었다. 고결은 잠시 멍해졌다. 기분이 좀 이상해서 그랬다. 섭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참 다행이다 싶다고 해야 하나. 우현의 매니저를 그만두는 게 섭섭하면서도 동시에 새로 올 사람이 서형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제넘게도 서형이라면 걱정 없이 우현을 부탁하고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봤을 땐 우현 씨도 우현 씨지만 결이 네가 훨씬 더 대단해.”
강서형은 그로부터 정확히 3일 후 현장에 투입됐다. 그리고 저게 차우현의 매니저로서 첫 출근을 한 강서형의 감상평이었다.
오늘 차우현의 스케줄은 빡빡했다. 오전에는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와 관련해 한 매거진과 인터뷰 및 화보 촬영을 진행했고, 지금은 화장품 CF를 찍는 중이었다. 이따 새벽에는 드라마 촬영을 하러 가야 했다.
차우현의 스케줄 표를 미리 받아 본 강서형은 그 자리에서 혀를 내둘렀다. 무슨 테트리스 게임 화면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차우현이 바쁜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빈틈없이 알차게 스케줄이 차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상상 이상이었다.
아, 괜히 옮긴다고 했나. 차우현 매니저라는 엄청난 경력과 남윤이 부른 연봉에 눈이 멀어 냅다 하겠다고는 했는데 막상 닥치니 좀 후회스러웠다. 역시 그만한 돈을 준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덕분에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만 다시 한번 체득했다.
“너 진짜 우현 씨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더라. 나는 무슨 그림자인 줄 알았어. 그렇게 일하면 안 피곤해?”
출근하기 전에는 차우현의 스케줄 표를 보고 혀를 내둘렀고, 출근하고 나서는 고결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서 혀를 내둘렀다. 차우현이 촬영하는 동안 고결은 먼발치서 그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무슨 차우현만을 위해 준비된 CCTV처럼.
어차피 촬영에 들어가고 나면 매니저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알아서 눈치껏 쉬는 편이었다. 세트장 밖으로 잠시 나간다거나 대기실 같은 곳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면서.
보통 촬영이라는 게 한두 시간 만에 간단히 끝나는 것이 아니니 그 정도는 요령껏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고결은 오전 화보 촬영 때도 그리고 지금도 전혀 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얘는 지치지도 않나. 결국 강서형은 고결의 팔을 붙잡고 우리 잠깐 숨 좀 돌리자며 밖으로 끌고 나갔다.
으으, 이상한 소리를 내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강서형이 커다란 동작으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고결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많이 힘드셨어요?”
“아니야. 힘들 게 뭐 있어. 오늘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결이 네 뒤만 졸졸 쫓아다녔는데.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좀 답답? 나는 이상하게 세트장 촬영은 아무리 넓고 트인 곳에서 해도 괜히 좀 답답하더라. 야외 촬영이 훨씬 나아. 결이 너도 그렇지 않아?”
그런가. 강서형의 물음에 고결은 그동안 우현과의 촬영을 생각했다. 우현한테 집중하느라 야외고 실내고 별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아, 아니구나. 하나 있긴 하구나. 야외에서 촬영을 하면 실내와는 다르게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낮에는 해. 밤에는 달. 지방에서 찍을 때면 별도 제법 볼 수 있어서 그 점만큼은 좋았다.
“얘기 듣고 보니까 그런 것도 같아요.”
누가 봐도 이전까지는 그런 거 하나도 상관없던 것이 분명한 대답이었다. 스트레칭을 멈춘 강서형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쩐지 그리 썩 유쾌하지 않은 옛 기억이 떠올라서 그랬다.
“결이 너 일하는 거 보니까 나 예전에 오메가 여배우 맡았을 때 생각난다.”
“오메가 여배우를 맡으신 적이 있어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래서 남 실장이 그렇게 강서형을 우현의 새 매니저로 두고 싶어 했던 걸까 했다. 물론 알파랑 오메가는 다르지만 어쨌든 베타만 맡은 경험이 있는 것보단 확실히 일하는 데 있어 도움 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