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안 앉으세요. 대표님?”
“…네? 아, 네. 아, 앉아야죠.”
주춤주춤 소파에 앉은 한 대표가 제 맞은편에 있는 차우현의 눈치를 티 나게 살폈다. 차우현은 그 시선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손을 뻗었다. 갑자기 몰려드는 갈증에 한 대표 역시 덩달아 커피 쪽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은 계속 차우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한 대표가 그러거나 말거나 차우현은 덤덤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목을 축였다. 한 대표는 지금 이 상황이 가시방석이었다. 잠깐 흐르는 침묵마저도 버거웠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시던 한 대표가 더는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저… 못 지낸다는 게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건지….”
“곧 있으면 Z라는 그룹이 일본 프로모션 가는 건 알고 계세요?”
“…아, Z요?”
이런 시발. 차우현의 입에서 Z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한 대표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그가 자신한테 무슨 얘기를 꺼내 놓으려고 하는지 대충 예상한 탓이었다. 한 대표는 차우현의 계약 조건에 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차우현이 내건 이상한 계약 조건을 군말 없이 받아들인 게 다름 아닌 본인이었으니까.
일반인 신분이지만 차우현은 고등학생 때부터 유명했다. 아마 엔터 업계에서 ‘세움고 차우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본래 캐스팅 매니저들은 될성부른 떡잎들을 찾기 위해 댄스 학원이나 연기 학원뿐만 아니라 각 학교도 돌았다. 그런 의미에서 알파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세움고’는 그들한테 있어 원석들이 모인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비록 그 원석들은 대체로 이미 장래가 정해져 있어 캐스팅 매니저들이 내미는 명함에 코웃음이나 쳤지만.
차우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코웃음을 치거나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한 시건방진 태도를 보이진 않았지만 철저하게 무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계속된 끈질긴 캐스팅 제의에도 무반응으로 대응하던 차우현이 어느 날 갑자기 대뜸 회사에 찾아왔다. 자신이 데려올 애를 제 매니저로 고용해 주면 이곳과 계약을, 심지어 재계약도 쭉 하겠다면서. 한 대표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갑자기 소속을 옮긴다길래 이상하다 했어.’
안 그래도 관련 얘기는 이미 남윤한테 보고받은 바였다. 그 과정에서 한 대표는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진짜야? 진짜로 차우현이 고결 소속 옮기는 걸 허락했대? 확실해? 남윤은 자신도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네. 혹시 몰라서 우현 씨랑 통화도 해 봤는데 그렇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잘 마무리된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낭패감이 몰려들었다.
“네. 그럼요. Z야 당연히 알고 있죠.”
당황스러웠지만 한 대표는 애써 침착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그 침착함은 차우현의 다음 질문에 빠르게 깨졌다.
“그럼 결이가. 아, 제 매니저가 누군지는 아시죠? 고결이요. 그 친구가 곧 있으면 Z라는 그룹 쪽으로 소속 옮기는 것도 알고 계세요?”
“아… 네. 그것도 알고 있, 근데 전 분명 우현 씨가 허락했다고 들었는….”
“긴말 안 드릴게요. 당분간 Z 제 눈에 띄지 않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차우현이 아무렇지 않게 한 대표의 말을 끊었다. 차분하고도 평이한 어조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핵폭탄과도 같은 발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네?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한 대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소리치듯 되묻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차우현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이 할 말은 그게 전부라는 듯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 대표가 손에 쥐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 위에다 다급하게 내려놓았다. 탁. 테이블과 플라스틱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대표실에 조금 크게 울려 퍼졌다. 당혹스러운 한 대표의 마음을 대변하는 소리였다. 차우현의 한쪽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원래는 이렇게 신사적인 방법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회적인 매장, 교통사고, 사지 불구까지. 앞서 떠올린 방법을 이용하면 민호란 애는 충분히 고통스러워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이 온전히 그 애 혼자만의 몫이 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고결은 어떻게든 민호라는 애의 고통을 제 몫으로 덜어 가 그 무게를 줄여 주려고 할 것이었다. 그 애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면 자신이 유일한 지지자가 되어 주고, 교통사고를 당해 일본 프로모션을 가지 못하게 되면 몸이 나을 때까지 간병해 주고, 사지가 망가진다면 자신이 대신 사지가 되어 주는 식으로. 차우현이 아는 고결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서도 기꺼이 철제 의자에 대신 맞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남은 방법이라곤 그 애가 고결이랑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도록 만드는 것뿐이었다. 남의 것을 함부로 탐낸 벌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것이 짜증스러웠으나 일단은 이렇게 만족하기로 했다.
“저기 우현 씨. 혹시 그 매니저 친구 소속 옮기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면 그 친구를 그냥 계속 우현 씨 매니저로 두….”
“제가 방금 결이 얘기를 했던가요?”
“네?”
“저는 분명 Z 얘기를 한 것 같은데요.”
“…….”
“당분간 제 눈에 띄지 않게 해 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방금.”
방금. 그 단어에 힘을 실은 차우연이 곧 부드럽게 싱긋 미소 지었다. 한 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명백히 종용의 탈을 쓴 강요였다. 말투나 표정은 더없이 온화했다. 하지만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드는 태도 자체는 무척이나 고압적이었다.
“…그, 눈에 띄지 않게 해 달라는 게 무슨 말인지 저는 잘….”
하아. 눈을 아래로 살짝 내리깐 차우현이 피곤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가에 매달려 있던 유려한 미소는 어느새 깨끗하게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 대신 전에 본 적 없는 서늘함과 냉랭함이 얼굴에 깃들었다. 차우현이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한 대표를 무감한 눈으로 응시했다.
“대표님. 저 대표님하고 한 약속 지키고 싶어요. 저 여기랑 재계약까지 쭉 하겠다고 했잖아요. 기억하시죠?”
차우현의 재계약 발언에 한 대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쯤 되니 당황스럽다 못해 억울했다. 자신이 억지로 그 매니저의 소속을 옮긴 것도 아니었다. 본인이 허락해 놓고서 왜 여기 와서 이러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대놓고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제가 결이랑 같이 여기서 일할 수 있을 때의 얘기죠.”
“…….”
“그게 안 되면 둘이서 같이 회사를 옮길 수도 있는 거잖아요?”
5년 전, 차우현이 내건 그 이상한 재계약 조건은 안타깝게도 계약서에 따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나라에서 정한 최대 전속 계약 기간이라는 것이 있어 재계약과 관련된 내용은 따로 추가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렇게 넘길 게 아니라 이 부분은 따로 서류를 만들어 공증이라도 받아 뒀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한 대표를 감쌌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 이건 강요도 아니었다. 그냥 협박이었다. 처음 보는 차우현의 모습에 한 대표는 멍하니 넋을 놨다. 항상 웃는 얼굴로 누구한테나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행동하던 차우현이었다. 그런 차우현이 자신한테 저런 얼굴을 하고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전혀 다른 사람 같은 차우현이 낯설면서도 동시에 좀 무서웠다.
역시 사람 좋은 알파라는 건 전부 허상에 불과한가? 그럼 이게 진짜 차우현의 본성이라고? 이걸 대체 여태 어떻게 숨긴 거지?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게 가능한 거야?
설마. 말도 안 돼. 한 대표는 부정했다. 이미지를 관리하는 연예인이야 많았다. 아예 회사 차원에서 콘셉트를 정해 주며 이런 이미지로 밀고 나가라고 정해 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인성 개차반 같은 인간도 대중 앞에서는 얼마든지 세상 무해한 존재로 자신을 꾸며 낼 수 있었다. 어차피 대중들이 볼 때만 그런 사람인 것처럼 연기하면 되니까. 그건 의외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대중들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까지 완벽하게 속인다는 건 얘기가 달랐다. 아무리 타고난 연기자라고 한들 24시간 내내 자신의 본성을 숨기고 주어진 이미지대로 연기를 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대중들한테는 좋은 이미지의 연예인이 관련 업계에서는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로 알려진 경우도 더러 있었다. 말이라는 건 쉽게 옮겨 가서 결국엔 어떻게든 다 소문이 나기 마련이었다. 알고 보니 누구는 성격이 어떻더라. 완전 사이코더라. 다혈질이더라. 입만 열면 욕이더라. 여자 되게 밝히더라. 이런 말이 언제 시작됐는지도 모르게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떠돌았다.
차우현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연히 방송용 이미지만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똑같다는, 오히려 대외적인 이미지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차우현과 같이 일한 스태프며 동료 배우들 모두 그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그게 차우현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이쯤 되면 이건 연기가 아니라 그냥 차우현 안에 다른 인격이 하나 더 존재한다고 봐야 하는 수준이었다.
“이제는 제 말이 좀 이해가 되세요? 아니면 다시 설명드려야 할까요?”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가 한 대표를 향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한 대표는 빠르게 정신을 되찾았다. 차우현의 실제 성격이 어떻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차우현이 이중인격자도 모자라 지금 연기하고 있는 ‘현재’라는 캐릭터처럼 다중인격자라 해도 상관없었다. 여태껏 그래 왔듯 사람들 앞에서 배우 차우현의 모습만 잘 보여 주면 됐다. 지금의 이미지대로. 잠시 머뭇거리던 한 대표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