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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52화 (52/71)

52화

고결이 어깨를 다쳐서 병원에 잠시 입원했을 때 우현은 매일 그곳을 찾아와 줬다. 그러다 하루는 가방에서 패드를 꺼냈다. 네가 심심할 것 같아서 영화를 받아 왔다면서. 그날 두 사람은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산책로 겸 작은 공원으로 나가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자와 보호자가 수도 없이 들락거리고 취침 시간대 빼고는 TV 소리가 끊이질 않는 6인실은 영화를 감상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다.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우현은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조곤조곤 설명을 해 줬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영화는 아니지만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국내외의 몇몇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영화라든가. 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 예전에 말한 그 영화에도 나오는 사람이라든가. 이 영화감독은 CG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이런 장면도 세트를 만들어 실제로 찍는다든가 하는 내용을. 고결의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인 채, 마치 밀어를 속삭이듯이.

고결은 예나 지금이나 작품성이니, 예술성이니 하는 단어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 저와는 먼 단어였다. 하지만 고결은 우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패드에 가만히 시선을 고정했다. 사실 그 와중에도 온 신경은 우현한테 쏠려 있었다. 작품성과 예술성 모두 인정받은 훌륭한 영화보다도 제 옆에 있는 우현이 훨씬 더 좋았다. 대사를 읊는 배우들의 목소리보다도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우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더 듣기 좋았다.

딱딱한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우현과 함께 패드로 영화를 보던 그 순간을 고결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나비 무덤>은 고결한테 있어 그날로 되돌아가는 타임머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날의 바람과 하늘의 색, 구름의 모양,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던 햇살의 따스함과 조금 젖은 흙의 냄새까지 생생하게 피부로 와닿았다. 그래서 장면과 대사를 다 외울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영화를 감상했다.

“잘 자, 결아.”

“네. 형도요.”

영화가 끝난 뒤 두 사람은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차우현은 자신의 침실로, 고결은 언제나처럼 거실 소파에 누웠다.

그동안 무겁게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짐을 하나 덜어내서 그런가, 사라졌던 잠은 소파에 눕기 무섭게 찾아왔다. 이젠 제 방 침대보다도 우현의 집 소파가 더 몸에 익고 편안했다. 거실 위에 내려앉은 적당한 어둠과 고요함은 고결의 정신을 금방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가게끔 만들었다. 고결은 약간의 뒤척거림도 없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뒤로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닫혀 있던 차우현의 방문이 소리 없이 스르륵 열렸다. 방 밖으로 나온 차우현의 얼굴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멀끔했다. 미세한 잠기운조차 묻어나지 않았다. 한숨도 자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차우현은 소파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결아.”

차우현의 입에서 차갑게 굳어 있는 얼굴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고결한테 고정된 두 눈만큼은 뜨거움을 품은 채 일렁거렸다.

“내가 바보 같았어.”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들어오는 거실 위로 자조의 말이 낮게 흩뿌려졌다. 고결이 설마하니 다른 팀으로 옮겨 갈 생각 같은 걸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치가 떨릴 정도의 깊은 배신감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날카로운 통증을 동반했다. 살갗이 얇게 저며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고결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마음 자체를 의심하진 않았다. 다만 사랑이라는 허황된 감정을 믿지 않을 뿐이었다.

사랑 그딴 걸 어떻게 믿어. 그게 뭐라고. 기껏해야 사랑 따위를. 사랑은 영원하지 않은데.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유동적인 건데. 그래, 사랑은 변한다. 이건 차우현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몸소 체득한 진리다. 따스한 애정이 질척한 애증으로 변하고, 그 애증이 지독한 증오로 변해 버리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는 것보다도 훨씬 더 쉽고 빠르며 간단했다.

이러한 이유로 차우현한테 있어 사랑이란 무슨 수를 써도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었다. 역설적이지만 그게 차우현한테는 더없이 완벽하고 온전한 형태의 ‘사랑’이었다. 자신의 세상이자 전부였던 사람한테 버림받은 후부터. 제 주변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그래서 자신마저 거짓이 되기로 결심한 후부터 차우현의 안에서 사랑의 정의는 그래 왔다. 그래야 다시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제게 향한 고결의 사랑 역시 믿지 않았다. 그 여자가 저를 밀어낸 뒤 처음으로 믿고 싶어진 사람이라. 정말 간절하게 믿고 싶은 사람이라. 그런 고결이 너무도 절실해서 더 처절하게 믿지 않으려 들었다. 그런데 8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아서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인가 고결을 믿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돌아온 결과물이 오늘 이거고.

좋은 꿈을 꾸고 있다 억지로 깨어나 시궁창 같은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지독한 현실감이 제 목을 감싸다 못해 있는 힘껏 옥죄어 왔다. 역시나 사람도, 그 마음도 전부 믿을 게 못됐다.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하마터면 또 속아 넘어갈 뻔했다. 고결과 함께하는 일상이 너무 당연해져서 어느새 안주하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너도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는 사람인데.’

손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숙인 차우현이 물끄러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목줄을 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 보니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애초에 목줄 따위 쥔 적조차 없을지도 몰랐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편 차우현이 잠든 고결의 목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대로 움켜쥐듯 목 전체를 기다란 손가락으로 감쌌다. 힘은 싣지 않은 채로. 깊이 잠든 고결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손바닥 아래로 두근거리는 정맥의 박동이 느껴졌다. 아직 고결은 제 손안에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무방비한 모습으로.

“사실 팀 옮기는 거 민호가 먼저 제안한 거예요.”

민호. 차우현은 고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새기듯 곱씹었다. 그 어린 게 그런 되바라진 제안을 했구나. 겁도 없이. 조금 전 소속을 변경하라고 하긴 했지만 단지 말뿐이었다. 무조건 안 된다고, 제 옆에 있으라고 잡아 두면 되레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고결이 진짜로 제 옆을 떠나게 놔둘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일단 회사부터 들러야겠네.”

고결의 목에서 손을 뗀 차우현이 이번엔 얼굴을 가까이 했다. 머리카락 위에다 살짝 입을 맞추자 자신과 똑같은 샴푸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당연히 몸에서도 똑같은 바디워시 향이 날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고결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고결은 그 충동을 참아 냈다. 조만간 얻게 될 더 큰 것을 위하여. 저 매끈한 목에 박아 넣어야 할 건 고작 코 같은 게 아니었다. 더 단단하고 뾰족한 것이었다.

***

모처럼 스케줄이 일찍 마무리된 날, 차우현은 미리 대표한테 연락을 한 뒤 회사를 찾아갔다. 물론 고결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회사에 같이 가겠다고 할 것이 뻔해서.

요 며칠간 차우현은 꽤나 고심했다. 고결을 가질 방법도 방법이지만 그것보다는 거슬리는 눈엣가시를 치우는 일에 더 골몰했다. 일단 그것부터 제 앞에서, 그리고 고결의 옆에서 치워놔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기 전 땅을 닦고 다지는 밑 작업이랑 비슷한 개념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서 다신 연예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할까? 아니면 교통사고 같은 거로 팔이나 다리를 분질러서 프로모션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 버릴까? 그냥 아예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하는 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차우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렇게 창의적인 생각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전적이기에 그만큼 효과가 더 상당할 방법들이었다.

똑똑.

대표실의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서 차우현을 기다리고 있던 한 대표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앞에는 조각 케이크와 쿠키, 아이스 아메리카노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온단 말에 회사 앞 카페에서 급하게 사 온 것 같았다. 컵홀더에 그려진 카페 로고가 친숙했다.

“우현 씨. 어서 와요. 갑자기 온다고 연락을 줘서 준비도 뭐 제대로 못 해가지고 이거….”

웃는 낯으로 차우현을 반긴 한 대표가 민망함에 말끝을 흐렸다. 차우현은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가볍게 미소 지은 뒤 한 대표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 대표가 내민 오른손을 차우현이 자연스럽게 맞잡았다.

“오랜만에 뵙네요. 대표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하하. 저야 우현 씨 덕분에 늘 잘 지내죠.”

자신보다 족히 20살은 더 어린 소속 연예인을 대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였다. 사실은 공손하다 못해 저자세에 더 가까웠다. 이 회사가 이만큼이나 큰 건 9할은 차우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한 대표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 대표한테 있어 차우현은 극진히 모셔야 할 VVIP나 마찬가지였다.

“우현 씨는 어때요?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한 대표는 소파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어서 앉으라는 뜻을 전했다. 그제야 자리에 앉은 차우현이 여상한 얼굴로 산뜻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잘 못 지내고 있어요.”

한 대표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짙은 당혹감이 어렸다. 더빙이 어그러진 외국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이질감이 한 대표를 덮쳤다. 예상치 못한 차우현의 대답에 한 대표는 앉은 것도, 그렇다고 선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차우현이 그런 한 대표를 올려다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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