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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51화 (51/71)
  • 51화

    우현은 너무 착해서 탈이었다. 너무 착해서 아끼는 동생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이 하지도 않은 짓을 사실로 만들려고 했다. 그 거짓말로 인해 여태껏 자신이 쌓아 온 이미지와 커리어를 단박에 해칠 수 있다고 해도.

    “형은 정말…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나중에 제가 어떤 이유로 다른 사람한테 이 사실을 들키게 됐을 때… 형이 받을 피해나 따라올 헛소문들이 무섭지는 않아요?”

    우현의 마음은 이미 충분히 다 전해졌다. 그래도 끝에 끝까지 확인받고 싶었다. 고결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우현한테서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탈 없이 떨어져 나갈 기회를.

    질문을 던진 고결이 슬그머니 눈을 들었다. 자신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던 우현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오늘따라 유독 더 깊어 보이는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 그 눈과 마주하자마자 고결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러지 않으면 숨 쉬는 법을 잠시 잊게 될 것 같아서. 아차, 하는 순간 저 눈에 뛰어들게 될까 봐.

    “내가 무서운 건 결이 네가 힘든 거야. 그거 말고는 무서운 거 없어.”

    완패.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완패였다. 알겠어요. 형이 시키는 대로 할게요. 결국 고결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자신이 졌음을 알렸다. 그러자 차우현의 두 눈이 가늘어지며 예쁘게 휘어졌다. 사르륵 소리를 낼 것처럼 휘어진 눈매가 고결의 심장 박동을 빨라지게 만들었다.

    그 세찬 소리가 고결을 현실 세계로 불러들였다. 이제야 눈앞에 닥친 상황이 하나둘 인지되기 시작했다. 커다란 소파에 딱 붙어 앉아 있는, 스물이 훌쩍 넘은 성인 남자 둘. 거기에 원래부터 하나인 양 애틋하게 겹쳐져 있는 손까지. 뒤늦게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고결이 손가락을 살짝 꼼지락거렸다. 사실 놔 달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우현이 자연스럽게 손을 거둬들였다.

    “이것 좀 마셔, 결아.”

    차우현이 물이 든 유리잔을 들어 고결한테 건넸다. 고결은 고개를 살짝 꾸벅이는 것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극심한 긴장감에 목이 마른지도 몰랐는데 유리잔을 받고 나니 숨어 있던 갈증이 느껴졌다. 고결은 단숨에 물 한 잔을 다 비워 냈다.

    “근데 지금 당장 소속 옮기는 건 안 될 것 같아. 나한테도 어느 정도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어. 나도 여태까지 결이 너하고만 일해 봐서 새로운 사람이 오면 적응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너 대신 들어올 사람이랑 어느 정도 호흡 맞출 때까진 결이 네가 같이 있어 줬으면 해.”

    어려울까? 조심스러운 물음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따라붙었다. 바닥을 드러낸 유리잔을 탁자 위에다 올려놓은 고결이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우현과 함께 일해 온 시간만 무려 5년이었다.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새로운 매니저가 온다면 당연히 인수인계가 필요했다. 그 사람이 자신보다 매니저 경험이 더 많은 경력자라고 해도 그랬다. 가능한 한 세세히 다음 매니저한테 우현에 관한 것을 알려 줄 것이었다. 우현이 활동하는 데 있어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도록.

    “그럼요. 그건 걱정 마세요. 새로운 매니저 정해지면 저도 그분이랑 같이 다니면서 인수인계할게요. 형 불편할 일 없게.”

    아마 소속을 옮긴다고 말하면 남 실장 쪽에서 먼저 얼마간의 인수인계 기간을 제시할 것이었다. Z의 일본 프로모션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들 자신을 곧장 거기로 보낼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제아무리 Z가 잘나가고 있다고 해도 회사 차원에서는 일개 아이돌 그룹이 우현보다 더 큰 가치나 중요도를 가지지는 않았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지만 사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우현은 ‘한그루 엔터테인먼트’의 가장 주요한 돈줄이자 동시에 정체성이기도 했다. ‘한그루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연예인을 물었을 때 대중들이 당연하다는 듯 제일 먼저 떠올리는. 그러니 우현을 담당할 새로운 매니저를 고르는 작업부터 인수인계까지 심혈을 기울일 게 분명했다.

    “고마워, 결아. 이해해 줘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려니 겸연쩍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부정하는 것으로 모자라 손까지 내젓는 고결의 행동에 우현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그 친구들 일본은 언제 가는데?”

    고결은 그동안 민호가 자신한테 보내 준 메시지 내용을 머릿속으로 찬찬히 되짚었다. 투어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남짓이었다. 하지만 Z 멤버들과 절반가량의 스태프들은 그보다 일주일 먼저 출국할 예정이었다. 프로모션을 함께 진행하는 일본 현지 업체와 사전 만남을 갖는 등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결은 자신이 아는 내용을 차우현한테 빠짐없이 전달했다. Z의 일정을 상세히 꿰고 있는 고결의 모습에 차우현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8년 동안 차우현을 봐 온 고결도 알아채기 힘들 만큼,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차우현은 계속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웃는 낯으로 말했다.

    “내 생각보다 더 촉박하네. 그럼 2주. 딱 2주만 더 잡아 둘게. 그때까지 내 매니저 해 주다가 가, 결아.”

    “네. 그럴게요.”

    순순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2주면 인수인계를 하기에도 적당한 시간이었다. 물론 우현과 멀어질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는 무척이나 빠듯한. 아니.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어쩜 이리도 간사한지. 원래는 소속을 옮기다 못해 회사를 관둘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정작 우현의 매니저를 그만둘 날짜가 정해지고 나니까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허무하다거나 섭섭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뻥 뚫린 가슴 한가운데로 시린 바람이 드나드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고결은 그 스산하고도 허전한 감각을 떨쳐 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현한테 미안해서 그랬다. 자신을 위해 엄청난 위험 부담을 기꺼이 떠안아 준 우현한테 아직도 털어놓지 못한, 그리고 영영 털어놓지 못할 비밀의 무게감이 더욱 묵직해졌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어쨌거나 이걸로 우현한테 가진 미안함 하나는 덜어내게 된 셈이었으니까.

    마지막 남은 미안함은, 그러니까 우현을 향한 제 마음은 이제 차차 정리해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고결은 말이 가진 힘을 믿어 보기로 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과 시간이 약이라는 말. 그 두 가지 말이 부디 자신한테도 효과가 있기를 바랐다.

    어차피 칼로 댕강 자르듯 단번에 훅 내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런 거였다면 이미 진즉에 잘라 냈을 것이었다. 이건 그저 서서히 조금씩 삭아서 없어지도록 놔둬야 했다. 시간에 풍화되고 바스러지기를. 원래의 모양을 잃고 자연스럽게 낡고 해져서 땅에 묻히기를. 그래서 나중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럼 이제 집으로 갈 거야? 아니면 자고 갈래?”

    차우현의 물음에 겨우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고결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우현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제법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오늘 본가에 가려고 한 건 내일 우현의 스케줄이 오후에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소속을 옮기겠단 얘기를 한 뒤에 우현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굳이 본가로 가야 할 이유가 없긴 했다.

    “어….”

    고민을 담은 말끝이 자연스럽게 늘어졌다. 고결의 행동에서 망설임을 읽어 낸 차우현이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자고 가, 결아.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자지. 너 요새 너무 피곤해 보여.”

    우현의 말을 듣고 나자 눈꺼풀이 조금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요즘 좀 피곤한 상태이긴 했다. 일 때문에 체력적으로 피곤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정신적인 피로함이 훨씬 더 컸다.

    민호한테 오메가인 걸 들키고, 우현이 자신 몰래 억제제를 먹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래서 Z로 소속을 옮기려 남 실장을 찾아갔다가 우현이 단 한 번도 말해 준 적 없는, 지금껏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고…. 그렇게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피로함을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고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의 뜻을 내비쳤다. 서로의 형질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집에서 자고 말하는 우성 알파와 겁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열성 오메가라니. 일반적인 경우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우현 사이에는 그런 일이 가능했다. 내가 알파고 결이 네가 오메가여도 우리 사이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넌 여전히 너고, 나는 나고, 우리는 우리라고. 우현이 먼저 그렇게 말해 줬으니까.

    ***

    샤워를 하고 나왔다. 따뜻하게 씻고 나오면 바로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오히려 노곤하게 몰려들던 잠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사라지고야 말았다. 잠이 오지 않는 건 우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렇게 이른 시간도, 그렇다고 많이 늦은 시간도 아니라 두 사람은 집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나비 무덤>. 커다란 TV 화면 위로 하얀색 글자가 느리게 떠올랐다 곧 화면이 전환됐다. <나비 무덤>은 고등학교 시절, 우현이 결한테 추천해 준 영화 중 하나였다. 그 이후로 고결이 모든 장면과 대사를 거의 다 외울 만큼 자주 본 영화기도 했고. 고결한테 있어 이건 흔히들 말하는 인생 영화였다.

    특별실 창고에서 우현과 여러 영화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물론 더 정확하게는 우현의 얘기를 고결이 들은 거긴 하지만. 어쨌든 여러 영화 가운데서도 이 영화가 고결한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사실 참 단순했다. 이게 우현과 처음으로 같이 본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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