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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49화 (49/71)

49화

네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속이고 계속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있었잖아. 우현의 말이 고결의 귀에는 그렇게 바뀌어 들렸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도 그러려고 했다. 우현이 억제제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계속해서 지지부진하게 헤어짐을 유예했을 것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 가면서. 여태껏 그래 왔듯이.

“…그러기엔 형한테 너무 죄송해서요.”

유예라는 말 그대로 단지 미루고 있던 것뿐이었다. 언젠가는 우현의 옆에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결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병원에서 들은 얘기를 힘겹게 털어놓았다.

“형이… 억제제를 먹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병원에 갔을 때 물어봤어요. 우성 알파여도 열성 오메가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거냐고…. 그랬더니 각인도 하지 않은 상대랑 계속해서 붙어 있으면 우성 알파여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아차 싶었어요. 제가 형한테 정말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말하는 내내 입이 썼다. 고결은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함과 죄책감에 차마 우현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결아, 그건….”

“이대로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침 Z가 일본 프로모션 때문에 매니저가 더 필요하단 얘기를 들었고, 거기로 옮겨 가면 괜찮겠다 싶었어요. 형이 이미 제 상태를 알고 있는지도 모르고.”

우현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고결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Z로 담당 아티스트를 변경하는 게 아니라 아예 회사를 관두는 쪽으로.

애초 자신한테서 페로몬을 느끼고 병원에 보낸 거라는 우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페로몬이나 히트사이클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하지만 민호와 우현, 두 사람에게 오메가인 것을 들켰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어떤 경로로, 언제 그 사실을 들키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자신이 오메가임을 들키는 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건 그 이후였다. 민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이곳에 입사시켜 준 우현을 오해하는 일이 더 있을 수 있었다.

여태껏 구설수 같은 거 하나 없이 안팎으로 좋은 평가만 받으며 지내 온 우현이었다. 그런 우현의 삶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 오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때문에 생긴 거라면 스스로가 싫다 못해 끔찍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근데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어요. 회사에 사실대로 말하고 그만둘게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뭐?”

순간 차우현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고결이 눈을 내리깔고 있어 다행이었다. 차우현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고결은 잠깐 호흡을 고른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저 여기에 입사시켜 준 거 형이잖아요. 혹시라도 제가 오메가인 거 들켰다가는 형한테 피해가 갈 거예요. 특이 케이스라 나중에 발현한 거라고, 입사 전에는 베타였다고 말해도 분명히 안 믿는 사람들 있을 거예요.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서류 위조해서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다행인데… 형이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몰라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그만두….”

“결아. 형은 그거 반대야.”

차우현은 얼른 표정 관리에 나섰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차우현의 얼굴이 빠르게 걱정으로 물들었다.

“너 사실대로 말하고 회사 관두면 다음 직장은 어떻게 하게. 결이 너도 알잖아. 아무리 경력 있어도 이젠 이쪽 계열에서 절대로 일 못 한다는 거. 사실대로 말 안 하고 그만둬도 똑같아. 이직할 때 젠더 검사지도 같이 내야 하는데…. 결이 너 이제 열성 오메가잖아. 베타일 때하고는 달라. 일할 수 있는 곳이 엄청 한정적일 거야.”

그제야 고결이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었다. 참 우현답다고 생각했다. 이런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해 제 옆에 있으라고 말해 주는 모습이. 오히려 그래서 더 옆에 있을 수 없었다. 우현이 이렇게나 좋은 사람이라서 혹시 모를 문제의 싹도 남겨 두고 싶지가 않았다.

부디 이 사람만큼은 행복하고 안온하길 바랐다. 우현은 메마르고 퍼석한 제 삶에 유일한 숨구멍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살랑살랑 부는 기분 좋은 봄바람이었다. 그 덕분에 환절기 감기처럼 찾아오는 불행을 잠시 잊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행을 앓으러 가야 할 때였다. 이 이상 미뤘다가 우현한테까지 불행을 옮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네. 저도 알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예전하고 다르게 구할 수 있는 직업이 한정적으로 변한 거지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요. 어디든 보이는 족족 이력서 넣으면 설마 저 하나 받아 주는 곳 없겠어요?”

고결은 일부러 덤덤하게 굴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결아. 차우현이 나직하게 고결의 이름을 불렀다. 귓가로 흘러들어 오는 목소리가 꼭 물결 위에 떠 있는 햇빛 같았다. 따스하고 잔잔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데. 너 지금까지 괜찮았잖아. 아무 문제 없었잖아. 내 옆에 있어도 괜찮았고, 일하는 동안에도 괜찮았잖아.”

“지금까지 괜찮았다고 해서 그게 절대 안 들킨다는 의미는 아니잖아요. 사실 민호도 알고 있거든요. 저 오메가로 발현한 거.”

어차피 우현이 다 알고 있다면 굳이 민호의 얘기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별안간 거실 위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결이 네가 얘기한 거야?”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차우현이었다. 차우현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고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어쩌다가 들켰어요. 억제제를.”

“그 친구는 베타라고 하지 않았어? 다른 약이라고 둘러댔으면 몰랐을 텐데?”

조금은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고결은 거기에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민호랑 같은 그룹에 오메가 멤버가 한 명 있거든요. 그 애가 먹는 약이랑 똑같아서 알아봤대요. 그 애도 열성 오메가라서 저랑 약이 같은가 봐요.”

하필이면. 차우현은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저 말고도 고결이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그 애는 베타지만 그래도 신경 쓰였다. 결이를 많이 좋아하고 따르는 것 같았는데. 차우현은 저번에 회사에서 마주친 그 어린 남자애를 떠올렸다. 고결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처럼 구는 꼴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사실 팀 옮기는 거 민호가 먼저 제안한 거예요. 저 오메가로 발현한 거 형도 모른다고 했거든요. 얘기 안 했다고…. 그러니까 그럼 자기네 팀으로 오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오메가인 멤버 때문에 경호 차원에서 같이 다니는 매니저만 2~3인 데다가 혹시나 약 들켜도 그 멤버 거라고 둘러댈 수 있지 않겠냐고. 자기네 팀으로 오면 안전하고 편할 거라고.”

아. 근데 굳이 이런 말까지 다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하다 보니 괜히 쓸데없는 내용까지 주절주절 늘어놓고야 말았다. 고결이 제 옆에 앉은 차우현의 눈치를 은근히 살폈다. 우현은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었다. 우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결이 네 생각은 어떤데?”

잠깐의 침묵 후 뜬금없는 질문이 던져졌다. 고결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네 생각은 어떠냐니. 뭐가? 어떤 부분이? 우현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헤맸다. 그러자 차우현이 방금 자신이 꺼낸 질문에 조금 더 길게 살을 붙였다.

“그 민호라는 애 말을 듣고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 거기 가면 네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겠다 싶어서 옮기려고 했던 거야?”

안심이라. 솔직히 말해서 그렇지는 않았다. 민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결심을 굳힌 건 아니었다. 고결이 결심을 굳힌 건 어디까지나 우현 때문이었다. Z팀으로 옮기면 우현을 힘들게 하며 옆에 붙는다는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우현을 향한 낡고 오래된 이 마음을 저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얄팍한 기대감이 더해져 결정된 일이었다.

“네.”

그렇다고 이런 말을 솔직하게 다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럼 그건 고백이 될 테니까. 그래서 고결은 긍정했다. 고결의 대답을 들은 차우현은 말이 없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얼굴이 더없이 깊고 고요했다. 여전히 우현의 생각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게 고민에 가까운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껏 알아챌 수 있었다. 우현과 함께해 온 8년이라는 긴 시간이 그걸 가능하게끔 만들었다.

“결이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래, 소속을 거기로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한참 후에야 차우현이 정적을 깼다. 그것도 저렇게 믿을 수 없는 말로. 당황한 고결은 반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번엔 아까와 좀 다른 의미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우현은 놀란 얼굴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고결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태연히 뒷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그래. 회사 그만두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아.”

단호한 말투. 확신에 찬 얼굴. 그리고 흔들림 따위 찾아볼 수 없는 견고한 눈빛. 순간 머릿속으로 문장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지금 이 상황에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가 계란이라면 우현은 바위였다. 그것도 결코 깨트릴 수 없는 단단한 바위였다. 그걸 깨트릴 의지조차 갖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나는 내가 알파라. 오히려 그래서 결이 네가 내 옆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어. 사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거기는 매니저가 2~3명씩 된다니까 아무래도 결이 네가 할 일이 좀 줄어들겠지.”

“형. 지금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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