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48화 (48/71)
  • 48화

    “솔직히 괜찮다고는 말 못 하겠어. 그런데 나도 결이 너 속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화는 안 낼게.”

    원망도, 타박도, 실망한 기색을 내보이지도 않는 말이었다. 고결은 그제야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눈을 슬그머니 들어 차우현에게로 옮겼다. 차우현은 제게 향한 고결의 눈을 피하지 않고 올곧게 마주 봤다. 이렇게 우현과 마주 보고 있으려니 양가적인 감정이 밀려들었다. 안도감과 지독한 자기 혐오감. 이러한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겠다는 우현의 말에 안심하고 있는 스스로가 최악의 인간처럼 여겨졌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고결은 잠시 뜸을 들이다 어렵게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답은 너무도 간단명료했다.

    “결이 너 병원에서 검사받고 온 날부터.”

    말도 안 돼. 고결의 얼굴이 빠르게 경악으로 물들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니. 대체 어떻게…. 아, 설마. 순간 불현듯 그 당시에 우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병원에 결이 네 이름으로 예약해 놨어.”

    그래. ‘우리 병원’. ‘CH그룹’ 산하의 ‘CH병원’. 그럼 일부러 거기로 보낸 거였나? 고결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다음에 이어진 차우현의 말에 의해 깔끔하게 해소되었다.

    “애초에 처음 병원 예약한 이유가 결이 너한테서 페로몬을 느껴서였어.”

    설마가 확신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찔한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결은 아무것도 없는 제 허벅지를 감싸듯 꽉 움켜쥐었다. 그냥 뭐라도 붙잡고 있어야 할 듯한 기분에. 그러지 않으면 밑도 끝도 없는 곳으로 영원히 추락하게 될 것만 같았다. 사실은 이미 떨어지는 중일지도 모르겠지만.

    “근데 병원 예약하면서도 설마 했어. 결이 네가 진짜 오메가로 발현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어. 그냥 혹시 모르니까. 그래서 검사받게 해 보자 그랬던 건데….”

    입안이 바짝 말라서 고결은 마른침을 삼켰다. 커다란 TV 아래, 새하얀 수납장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 중 가장 작은 서랍 안에는 억제제가 들어 있었다. 때때로 늘어나고 또 티 나게 줄어들던 러트 억제제가. 아, 제발. 어떡해. 허벅지를 움켜쥔 고결의 손등 위로 파란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럼 형 다 알고 먹은 거예요? 나 때문에… 내 페로몬 때문에 형 몸에 무리 가는 거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계속 모르는 척해 주면서 계속 약 먹고 있던 거예요?”

    “응.”

    흔들림 따위 없는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게 고결의 귀에는 꼭 사형선고 내지는 사망 선고처럼 들렸다. 삐이. 잠깐 이명이 스쳤다. 드라마에서나 듣던 소리였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던 사람이 죽을 때, 심장 박동을 그려 내던 그래프가 결국엔 일직선으로 멈출 때에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소리. 고결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형 대체 왜. 왜 그렇게까지 했어요.”

    그새 콱 잠긴 목소리가 형편없이 덜덜 떨렸다. 원망할 자격 따위 없었다. 모두 다 제가 잘못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우현을 탓하는 듯한 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고야 말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모르는 척해 줘서는 안 됐다. 심지어 자신 때문에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억제제를 몰래 먹어야 할 정도였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척 품어 주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 같이 방법을 찾기로 했잖아.”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 병실에서 들은 얘기가 또 한 번 반복됐다. 그때와 비슷한 목소리, 그때와 비슷한 어투로, 그때와 같은 감정을 담고서. 불이라도 집어삼킨 것처럼 속이 홧홧했다. 뒤늦게 발화된 죄책감이 장기라도 태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 지옥 불에 떨어져야 마땅한 죄인이 겪기에 딱 맞는 형벌이었다.

    “형이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그건 다 제가….”

    “어떻게 그래.”

    차우현이 고결의 말을 막았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차우현의 얼굴에서 고결은 눈을 떼지 못했다. 우현이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 밑은 건조했으나 슬픔에 젖은, 조금은 눅눅한 눈동자가 그런 느낌을 자아냈다.

    “결이 너한테 유도가 어떤 의미인지 내가 다 아는데…. 그날 그곳에 내가…. 네 꿈이며 미래가 무너지던 순간에 내가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래.”

    거기까지 말한 차우현이 조금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격양된 감정을 내리누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물론 전부 다 연기였다. 차우현은 자연스럽게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이런 류의 연기는 너무 과하지 않게 하는 편이 오히려 감정을 전달하는 데 더 용이했다. 어떻게 연기를 해야 보는 사람이 더 슬픈 느낌을 받는지 차우현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똑똑하게 행동했으면. 아니, 그게 아니라 애초에 결이 네가 골목길로 가는 걸 막아섰더라면. 그래, 그랬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잖아.”

    “…….”

    “결아. 너한테 말한 적은 없지만 난 아직도 가끔 그날 꿈을 꿔. 철제 의자에 맞은 네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꿈. 고통에 몸부림치는 꿈. 그러면 난 도망치는 남자를 뒤쫓지 않고 곧장 결이 너한테 가. 네 상태를 살피고 바로 119를 불러.”

    말을 마친 차우현이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듯 감쌌다. 그날이 미칠 듯이 후회돼. 그래서 나는 결이 너를 그냥 둘 수가 없어. 한숨과도 같은 말이 기다란 손가락 틈새로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혹시 죄책감도 옮는 걸까. 고결은 괴로워하는 차우현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이건 방향이 잘못됐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어쩌면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 찾아온 우현이 대뜸 엔터 회사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저한테 매니저 일을 부탁했을 때. 그게 우현의 책임감이 만들어 낸 속죄라는 걸 알면서도 일단은 살고 싶어서. 우현의 옆에 있고 싶어서 모르는 척 받아들인 걸지도 몰랐다. 가증스럽게.

    아, 내 바닥은 이렇구나. 이제 보니까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 맞았나 보다. 아찔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제 밑바닥이었다. 고결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밑바닥과 마주했다. 어둡고 더러우며 추악했다. 썩은 내가 푹푹 났다. 모르고 살았던, 영영 모르고 싶었던 제 안의 가장 낮은 밑바닥과 조우한다는 건 무척이나 힘들고 버거운 일이었다.

    “…혹시 나랑 있는 게 힘든 거야?”

    내가 유도를 잃게 된 건 절대로 형 잘못이 아니라고. 그건 형이 힘들어해야 할 부분이 아니라고. 그러니 마음의 짐은 좀 내려놓으라고.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온 차우현의 뜬금없는 물음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리고야 말았다. 지금 우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고결은 하려던 말을 꺼내 놓는 대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그 상태로 제 얼굴을 한 번 문지른 차우현이 천천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상처받은 게 역력한 얼굴이 고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순간 가슴 부근에서 익숙지 않은 통증이 몰려왔다. 꽉 옥죄면서 저릿한 기분. 이대로 심장이 멈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결이 네가 열성 오메가로 발현했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내가 하필이면 알파라… 그래서 불편하고 불안해?”

    “…….”

    “아니면 내가 무서워?”

    그제야 고결은 아까 우현이 자신에게 던진 뜻 모를 질문의 의중을 겨우 파악했다. 확실히 오메가에게 알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권력으로 따지자면 피지배층과 지배층, 먹이사슬로 따지자면 최하위와 최상위가 확실하게 나뉘어 있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알파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쉽게 오메가를 취할 수 있었다. 오메가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니에요. 형. 저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고결은 고개까지 저어 가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소속을 옮기겠다는 자신의 말에 우리는 우리라며 허리를 끌어안던 우현의 행동이 이제야 좀 이해가 됐다. 우현은 제가 오메가로 발현했단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지난 5년간 함께 일하다가 이제 와 갑자기 다른 팀으로 가겠다고 하니, 우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었다.

    “저 그런 생각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고결의 목소리에서는 단호함마저 묻어났다. 솔직히 말해 걱정하기야 했다. 하지만 고결이 걱정한 것은 오메가인 자신이 아니었다. 고결은 알파인 우현을 걱정했다.

    만약 억제제를 먹었는데도 히트사이클이 온다면. 내가 어쩌다 형의 페로몬을 느끼고 거기에 반응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래서 형한테 매달리게 된다면 우린 어떻게 될까. 그런 끔찍한 가정을 몇 번이고 해 봤다.

    우현은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니 매달리는 저를 어쩌지 못할 것이었다. 당황스러워하다가도 힘들어하는 제 모습에 결국 해 달라는 대로 해 줄 게 뻔했다. 그러한 참사를 막기 위해서 그동안 조금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억제제를 먹어 온 것이었다. 휴대폰으로 알람까지 맞춰 가며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그럼에도 결국엔 저도 모르게 우현한테 피해를 주고 있었지만.

    “그러면 왜 굳이 다른 소속으로 옮겨 가려고 하는 거야?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같이 지낼 수 있는 거잖아.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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