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골목 안에서는 양복을 입은 남자와 볼캡을 푹 눌러쓴 남자가 서로의 멱살을 움켜쥔 채 싸우고 있었다. 둘 다 중년으로 보였고 어느 정도 술에 취한 상태인 것 같았다. 특히나 양복을 입은 남자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뭉개진 발음으로 돈 얘기가 오고 갔다. 아무래도 금전적인 문제로 얽힌 사이인 듯했다.
그 순간 볼캡을 쓴 남자가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퍽, 얼굴을 얻어맞은 남자가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때리고 나서도 분이 풀리질 않는 건지 볼캡을 쓴 남자가 씩씩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곧 고개가 한 곳에 고정됐다. 남자의 시선이 향한 곳은 폐기물 스티커가 붙어 있는 철제 의자였다. 남자가 망설임 없이 그 의자를 높이 치켜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를 내리치기라도 할 것처럼.
양복을 입은 남자가 쓰러졌을 때부터 움찔거리던 고결의 몸이 크게 앞으로 움직였다. 바로 옆에 있었다. 충분히 붙잡을 수 있었다. 고결의 손목을 붙잡아 튀어 나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다. 차우현한테는 그럴 만한 힘도, 반사 신경도 있었다. 하지만 차우현은 고결을 말리지 않았다. 이 골목으로 들어올 때도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손가락을 더 안으로 말아 쥐었다. 만약 결이가 저거에 맞으면, 그래서 몸 어디가 크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불순한 호기심이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그 후로 모든 장면은 마치 슬로 모션 효과를 걸어 두기라도 한 것처럼 느리게 망막에 찍혔다. 앞으로 튀어 나간 고결이 등을 돌리곤 몸을 살짝 낮춰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보호하듯 감쌌다. 제법 무게가 나가 보이는 철제 의자가 고결의 상체 위로 묵직하게 내리꽂혔다. 강제로 꺾인 나뭇가지처럼 고결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철제 의자를 든 남자는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듯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감당이 되지 않는 건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다 내팽개치듯 의자를 버려두고는 허겁지겁 도망쳤다.
고결이 몸을 둥글게 만 채로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오른손이 왼쪽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다른 곳보다도 어깨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가장 큰 모양이었다. 119에 신고부터 해야 했다. 얼른 고결의 곁으로 가 괜찮냐고 물어보고 상태를 살펴야 했다. 하지만 차우현은 도망친 남자를 뒤쫓았다. 아니, 뒤쫓는 척 골목을 나섰다.
골목 밖으로 나가자마자 차우현은 뜀박질의 속도를 늦추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쿵쿵쿵. 심장이 아까보다도 훨씬 더 큰 박동으로 요란스레 제 존재감을 나타냈다. 환희, 기쁨, 흥분. 뭐라 한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격렬한 감정들이 제 안 깊은 곳에서부터 용솟음쳤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던 고결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아른거렸다. 살짝 상기된 차우현의 얼굴 위로 차차 환한 웃음이 번져 갔다. 벅찬 기대감에 찌릿찌릿한 전율마저 흘렀다.
고통에 찬 신음은 골목 밖까지 흘러나오지 못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조용하고 좁은 골목길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방금 저 골목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저곳에 누가 쓰러져 있는지 아는 것은 오직 저 하나뿐이었다. 차우현은 꽤 오랫동안 그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
고결은 상완골과 쇄골이 모두 골절돼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덤덤히 수술 경과를 읊었다. 수술은 잘 됐지만 아마 운동을 계속하기는 힘들 거라고. 그러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이 부분은 나중에 철심 제거 수술을 받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고.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지 아니면 자신한테 닥친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건지 고결은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한 얼굴로 굳어 있기만 했다. 뒤늦게 병원에 도착한 고결의 어머니는 거의 실신 직전까지 우셨다. 오늘 대회에서 1등을 한 아들이었다. 실력 있고 미래도 보장된 아들이 하루아침에 운동을 잃게 됐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코치는 그 옆에서 줄곧 무거운 한숨만 내쉬다 일단 진정하시라며 고결의 어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내가 너무 당황해서…. 결이 너부터 생각해야 했는데 그 사람이 도망치니까 일단 그 남자부터 잡아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다 내 잘못이야.”
차우현은 왼쪽 어깨에 보조기를 찬 고결의 앞에서 죄인처럼 속죄했다. 아래로 툭 떨어진 고개는 좀처럼 위로 올라올 줄을 몰랐다. 절대로 덜어낼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게 왜 형 잘못이에요. 뛰어나간 건 전데.”
“내가 그 남자를 쫓지 않고 그 시간에 빨리 119를 불렀으면….”
“아니요. 형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어딘가 꽉 눌린 듯 답답한 목소리가 어색했다. 차우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멍하니 굳어 있던 고결의 얼굴이 지금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목 끝까지 올라온 감정을 애써 꾹꾹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결아.”
차우현이 나직하게 고결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고결의 미간이 구겨지더니 두 눈 가득 빼곡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고결은 눈물을 참기 위해 힘주어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래 봤자 이미 역치를 넘겨 버린 눈물을 멈추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래로 낙하하고 있는 링거액처럼 고결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드득. 툭.
“결아. 형이 미안해.”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듯 읊조린 차우현이 침대 옆으로 조금 더 붙어 섰다. 차우현의 두 팔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고결의 자그마한 머리가 천천히 가둬졌다. 고결이 기다렸다는 듯 차우현의 가슴에다 제 이마를 툭 기댔다. 흐윽. 흡. 윽. 끅. 곧이어 서러운 울음소리가 무방비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차우현은 제 품에서 울고 있는 안쓰러운 생명체를 연신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우리 같이 방법을 찾자. 다른 길이 있을 거야, 분명히. 이걸로 끝이 아니야.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어.”
내가 너의 새로운 시작이 될 거야. 그리고 너의 마지막도. 전부 다 내가 할 거야. 고개를 숙인 차우현이 고결의 정수리 위에다 얼굴을 살짝 기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입술을 간질였다.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차우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6. 계획-
본래 고결은 현관에서 모든 말을 쏟아 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고결은 신발을 벗고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제집 거실보다도 훨씬 더 익숙한 우현의 집 거실로 들어섰다.
“우리는 우리야.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조금 전 현관에서 우현이 한 말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처럼 자신의 허리를 꽉 끌어안던 우현과 풀어야 할 얘기들이 많았다.
“뭐라도 좀 마실래?”
고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차피 아무것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게 물이라고 해도. 그 고갯짓을 봤으면서도 차우현은 부엌으로 들어가 500mL 생수 한 병과 유리잔을 챙겼다. 차우현이 냉장고와 찬장을 번갈아 여는 동안 고결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부엌에서 나온 차우현이 자연스럽게 고결의 옆에 착석했다. 별거 아닌 거리감이었다. 하지만 고결은 괜히 어깨를 조금 굳혔다. 탁. 시원한 물이 담긴 유리잔이 거실 탁자 위로 올라왔다. 차우현은 그 유리잔을 고결의 앞으로 밀어 준 뒤 자신은 생수병째로 물을 들이켰다. 물을 삼킬 때마다 차우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고결은 물을 마시는 차우현을 바라보다 이내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차마 우현을 두 눈에 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가 전해졌다. 우현한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 어떤 경로로 알게 된 건지, 그걸 알면서 왜 여태까지 모른 척한 건지 등등. 하지만 그것보다는 우선 사과부터 꺼내 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맞는 일 같았다.
“어떤 게?”
툭 던지듯 가벼운 물음이 이어졌다. 고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우현이 무작정 제 사과를 받아 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다만 죄송하다는 말에 돌아오는 게 물음표일 줄은 몰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에 고결은 애꿎은 입안만 힘주어 꾹 씹었다.
“나한테 사실대로 말 안 한 거? 아니면 다른 소속으로 옮겨 가려고 한 거?”
그렇게 묻는 말에서는 비꼬려는 의도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말이라는 건, 우현의 나직한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게 되레 고결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명치가 뻐근하게 저려 오기 시작했다.
“…둘 다요.”
사실 Z의 매니저 자리로 옮겨 가려고 했던 것은 크게 미안하지 않았다. 우현이 자신 몰래 회사에다 내건 계약 조건이 아니었더라면 이미 로테이션을 돌아도 몇 번은 돌았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우현한테 거짓말을 하고 끝까지 진실을 털어놓지 않으려 결심한 건 미안했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차우현이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그 행동에 어쩐지 호흡하는 게 벅차져서 고결은 잠시 숨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