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그 말인즉 평생 고등학생인 채로 머무를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차우현은 세움고를 졸업했고 차 회장의 뜻대로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명문대의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차 회장은 CH그룹에 자부심이 엄청난 인간이었다. 회사의 가장 높은 자리를 우성 알파로만 채우려는 것은 모두 그러한 심리에서 기인했다. 우성 알파처럼 타고난 피 자체가 우수해야만 완벽하게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란 신념. 하지만 차우현은 그가 가진 어긋난 신념에 아주 완벽히 벗어나는 존재였다. 형질이 우성 알파라는 것 빼고는.
차 회장이 그런 우현을 회사의 중역에 앉힐 리가 없었다. 차 회장이 우현을 경영학과에 보낸 건 어디까지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처사였다. 물론 회사로 불러들인 뒤 직함만 주고 허수아비처럼 자리에 세워 둘 순 있었다. 젠더체인지로 인해 베타로 발현한 후 사장이란 직함 빼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차태민처럼. 우현 말고도 우성 알파 손주가 셋이나 더 있는 마당에 차 회장이 굳이 그런 귀찮은 일을 할까 싶긴 했지만.
어쨌거나 대학생이 된 차우현은 당연히 고결과 매일 만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적어도 연락만큼은 꼬박꼬박 주고받았다. 평일에 한두 번씩은 아예 학교 앞으로 찾아가 고결과 함께 저녁을 먹고 나서 헤어지기도 했다.
밥을 사 주는 건 항상 차우현의 몫이었다. 고결은 그걸 굉장히 미안해하고 또 부담스러워했지만 차우현이 부를 때마다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잠자코 나왔다. 이런 게 아니면 우현과 만날 수 없다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현은 그런 고결이 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날 역시 그랬다. 여름 방학이지만 고결은 매일같이 학교에 나가 훈련을 했다. 저녁 식사 후 바로 복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었기에 차우현은 평소처럼 학교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식당에서 고결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고결을 다시 학교로 데려다줬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형 감사합니다. 잘 먹었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인사를 한 뒤에 교문으로 들어가야 할 고결이 이상하게 쭈뼛거렸다. 그러다 결심이 선 얼굴로 뭔가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얀 봉투였다. 설마 지금껏 자기가 먹은 밥값이라면서 돈이라도 모아서 주는 걸까. 고결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차우현은 고결이 내민 봉투를 받지 않고 그게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돈이라면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게 뭐야?”
“저 이번에 대회 나간다고 했잖아요. 형 혹시 괜찮으시면… 보러 와 주실래요?”
여름 방학이니까 시간 되실까 싶어서요. 이런 부탁이 염치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고결은 차우현의 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돈에 비하면야 이건 훨씬 좋은 선물이었다. 차우현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봉투를 건네받았다.
“그럼. 당연하지. 불러 줘서 고마워, 결아.”
열어 본 봉투 안에는 코팅된 티켓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용신대학교 총장기 남여 중고등학교 유도대회 초대권’. 티켓 위에 인쇄된 대학교 이름이 친숙했다.
용신대는 전국에서 체대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고결은 총 나흘간 진행되는 대회 중 둘째 날에 열리는 남자 개인 고등부 73kg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마지막 날 단체전도 출전하긴 하는데 저 개인전 할 때만 와 주시면 돼요. 어딘가 민망해하는 듯한 말이 슬쩍 덧붙여졌다. 그에 차우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둘 다 갈게.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부상으로 인해 고결이 단체전 경기에 불참하게 되면서.
“결아. 1등 한 거 축하해. 너 오늘 진짜 멋있더라.”
“감사해요, 형. 멀리까지 경기 보러 와 주시고 또 이렇게 맛있는 것도 사 주셔서…. 매번 얻어먹기만 해서 죄송해요.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 같은 날은 제가 사 드려야 하는데.”
“무슨 말이 그래. 너 1등 했는데 당연히 내가 맛있는 걸 사 줘야지. 경기 마지막 날에는 단체 회식 한다고 했지?”
“네. 그날 한우 사 주신대요. 학교에서 지원비가 많이 나왔다고 하시더라고요.”
두 번째 날에 열린 남자 개인 고등부 경기에서 고결은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고결이 경기하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결의 경기를 지켜보는 내내 차우현은 뭐라 형용하기 힘든 감상에 젖어 있었다.
노란색의 매트 위에 서자 동그란 눈이 제법 매섭고 날카롭게 변했다. 희고 단정하던 얼굴이 불시에 단단해졌다. 무슨 수를 써도 절대 깨지지 않을 것처럼. 기술을 걸기 위한 날카로운 신경전이 지속됐다. 상대 선수가 힘을 줘 고결의 깃을 붙잡았다. 고결은 거기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새하얀 도복이 벌어지며 오밀조밀하게 근육이 짜인 상체가 훤히 다 드러났다. 원래는 하얀 피부가 열에 들떠 조금은 붉은 빛을 띠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호흡은 거칠어지고 그에 따라 판판한 가슴 역시 크게 들썩거렸다. 어느새 맺힌 투명한 땀방울이 턱과 목덜미를 타고 아래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 모든 순간과 장면을 차우현은 마치 눈동자로 핥듯이 하나하나 음미했다. 집요한 시선은 오직 고결만을 향해 고정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기가 끝나고 잠시 동안 고결이 다음 시합을 준비하고 있을 때조차도.
차우현은 고결이 경기를 하는 내내 자신을 감싸고 있던 묘한 감상이 무엇인지 겨우 알아챘다. 위기감. 단상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서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사진을 찍는 고결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불안하게 역동하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위로 환한 조명이 부서지듯 쏟아져 내렸다. 진짜로 국가대표가 되겠구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결이 앞으로 맞이할 미래의 한 페이지를 미리 엿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유쾌하지 않았다. 불쾌했다.
고결이 국가대표를 꿈꾼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이후의 일에 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고결이 경기하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확실해지고 또 뚜렷해졌다. 저 애는 어렵지 않게 국가대표가 될 거고 올림픽이니 아시안게임이니 온갖 대회에 출전하며 온 국민의 지지와 응원을 받게 될 것이었다. 사랑받는 스포츠 스타. 머지않은 미래에 고결의 이름 앞에 붙게 될 타이틀이었다.
저 애의 그 반짝이는 미래에. 그때에도 여전히 내가 함께할 수 있을까. 국가대표가 된 고결의 모습은 생생히 잘 그려졌다. 그러나 그 옆에 나란히 있을 자신의 모습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그저 흐릿하기만 했다.
“우현이 형!”
차우현이 기분 나쁜 상념에서 빠져나온 건 고결의 부름 덕분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좌석 쪽으로 다가온 고결이 환하게 웃으며 손에 쥔 꽃다발을 크게 흔들었다. 차우현은 그런 고결을 향해 똑같이 손을 흔들어 줬다. 손바닥에서 홧홧한 통증이 몰려왔다. 방금까지 손바닥의 살이 파일 정도로 있는 힘껏 주먹을 말아 쥐고 있던 탓이었다. 금방이라도 욕이 입 밖으로 흘러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차우현은 욕을 내뱉는 대신 언제나처럼 두 눈을 휘며 흐드러지게 웃었다. 결아. 축하해. 잘했어. 진심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축하 인사를 전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오늘 결이 너 경기하는 거 보니까 조만간 TV에서 볼 수 있겠다 싶더라.”
“네? TV요?”
“응. 올림픽 같은 데 나가면 TV로 다 중계해 주니까.”
차우현의 말에 고결이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국가대표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밤공기와 닮은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 잔잔함이 왜 제 마음에는 이토록 큰 파동을 일으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운동하는 거 힘들지 않아? 그만두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이런 걸 묻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데. 속으로만 조소를 흘리는데 옆에서 다시 한번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힘들기야 하죠. 예전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 했던 거 같은데 아버지 아프신 뒤로는 그런 생각 안 해 봤어요. 그냥 무조건 국가대표가 되어서 엄마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시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저한테는 이 길밖에 없으니까요.”
“…….”
“유도가 제 전부니까.”
아무렇지 않게 전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얼굴이 아까 경기장에서 봤던 것처럼 단단했다. 차우현은 순간적으로 속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강압적인 욕심이 움텄다. 이 애의 전부를 빼앗아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 텅 빈 자리를 오직 자신으로만 가득 채워두고 싶었다. 자신이 없는, 자신이 함께하지 못할 환한 미래 따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맞이하게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애한테서 유도를 뺏고 전부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미래를 일그러트리고 그곳에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시끄러운 고성이 들려왔다. 고결이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둘 다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시선만 교환하고 있는데 이번엔 험악한 욕설이 울려 퍼졌다.
“야, 이 시발 새끼야!”
평소 같으면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지나쳤을 일이었다. 하지만 차우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꾸며 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거 싸우는 소리 아니야?”
“네. 그런 것 같아요.”
“어디에서 나는 거지?”
“저쪽 골목길에서 나는 거 같은데.”
말을 마친 고결이 빠르게 골목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우현은 그런 고결을 말리거나 제지하지 않고 얌전히 그 뒤를 쫓았다. 어쩐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