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차우현의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훤히 보였다. 차우현은 고결의 마음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고결이 자신을 단순히 아는 선배 그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거. 비록 당사자인 고결은 그게 단순한 호감 이상의 마음이라는 걸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별 상관 없었다. 어차피 그건 고결의 마음이지 차우현의 마음은 아니었으니까.
고결에 대한 차우현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호기심이었다. 절대로 고결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좀 신기한 건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이토록 편안한 것은 이 애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타고난 고결의 성정 때문일 거라고 여겼다. 고결은 충직한 데다 조용하고 얌전한, 집 잘 지키는 강아지 같았다. 물론 생긴 건 강아지보다 토끼에 훨씬 더 가까웠지만.
차우현이 제 마음을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치부한 건 강력한 자기 믿음이 더해진 결과였다.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랑은 그걸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라고.
아주 어릴 때, 누군가한테 사랑을 받은 기억이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걸 온전한 사랑이라고 볼 순 없을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받은 애정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커다란 크기의 미움과 증오를 받아 내야 했으니까. 애정은 그 숨 막히는 감정에 뒤덮이듯 절여져 퇴색된 지 오래였다. 그런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차우현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믿음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던 건 차우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인인 고결의 마음은 진즉에 알아챘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감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보처럼.
“형. 이거요.”
차우현의 그 굳건한 믿음이 깨진 건, 3학년 1학기. 더 정확히는 창고 안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조금씩 강해지기 시작하던 초여름 날의 일이었다. 고결이 차우현의 눈치를 살피며 손에 쥔 쇼핑백을 내밀었다. 그것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슬그머니.
“이게 다 뭐야?”
차우현은 그 쇼핑백을 얌전히 건네받았다. 입구를 벌려 안을 살펴보니 생각지도 못한 초콜릿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판형 초콜릿과 견과류가 들어간 바, 밀크 초콜릿, 다크 초콜릿, 화이트 초콜릿 등등. 종류와 맛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냥… 단 거 먹으면 형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질까 해서요.”
“기분? 내 기분이 왜?”
고결의 얼굴 위로 난감함이 어렸다. 딱히 고결이 당황하는 걸 보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차우현은 정말 진심으로 궁금했다. 늘 투명하기만 하던 고결의 마음이 지금만큼은 잘 읽히지가 않았다. 아닌 척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렇게 행동하는 건지 그 이유는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 오늘 기일이잖아요.”
기일.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고결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아. 차우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과도 같은 소리가 나직하게 새어 나왔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도연의 죽음을 다 알았다. 온 매체에서 몇 날 며칠을 시끄럽게 떠들어 댔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부러 찾아보는 게 아닌 이상은.
사실 차우현한테 있어 한도연의 기일은 그다지 큰 의미가 있지 않았다. 어차피 챙기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 CH그룹 선영(先塋)에 묘를 두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한도연의 묘는 철저히 외면받고 방치당했다. 이승에 남겨진 차우현의 존재와 똑같이.
“…이건 언제 샀어?”
불필요한 오지랖에 불과했다. 평소의 차우현이라면 주제넘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고결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사다 준 게 별로 짜증스럽거나 싫지가 않았다.
“아침에 편의점에서요.”
“편의점에서 이걸 다 팔아?”
“아… 아니요. 제가 한 곳만 간 게 아니라 몇 군데 돌아서 그래요. 이것저것 사고 싶어서.”
말을 마친 고결이 제 뒷덜미를 쓱 문질렀다. 자신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영 머쓱해 보였다. 차우현은 고결이 한 말을 자신이 이해한 대로 다시 풀어냈다. 그리고 되새기듯 꼭꼭 곱씹었다. 나를 위해서, 내가 우울할까 봐 아침부터 편의점 몇 곳을 들러 일부러 사 온 초콜릿 수십 개. 그러자 불현듯 처음 만난 날, 고결이 자신한테 불쑥 내밀었던 초코우유가 생각났다. 차우현의 얼굴 위로 연한 미소가 잔잔하게 걸렸다.
“이거 받으니까 결이 너랑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난다. 너 그때도 나한테 초코우유 줬잖아. 단 거 먹으면 기분 좋아질 거라면서.”
“…그거 효과 있었어요?”
조심스러운 물음. 은근히 기대하는 듯한 눈초리.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은 차우현이 위아래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유독 이 애의 앞에 처음이란 단어가 많이 붙었다. 그날 고결이 준 초코우유는 차우현이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본, 그 어떠한 의도도 없는 최초의 순수한 호의였다. 한도연의 기일을 챙겨 준 것 역시 이 애가 처음이었다. 고결이 준 게 초콜릿이라서 더 좋았다. 죽은 그녀를 위한 국화꽃 같은 게 아니라 이 지독한 현실에 홀로 남겨진 저를 위한 초콜릿이라는 점이. 좋았다. 그래, 짜증이 나거나 싫은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 이 감정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가 없었다.
“결아.”
“네?”
“나 졸린데 잠깐 다리 좀 빌려줄래? 눕고 싶어서.”
상당히 뜬금없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고결은 군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두 다리를 앞으로 쭉 폈다. 고결은 슬픔에 잠긴 차우현이 자신한테 어리광 비슷한 걸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차우현한테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었다. 아침에만 해도 그녀의 기일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지만 방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을 만큼. 그토록 평범한 날 중에 하나였다.
“불편하지 않아요?”
차우현이 기다렸다는 듯 허벅지를 베고 눕자 고결이 걱정스레 물었다. 운동하는 애라서 딱딱하고 단단할 줄 알았다. 그런데 힘을 주지 않아서 그런가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딱 기분 좋게 적당히 푹신했다.
“응. 전혀. 엄청 편해. 이런 베개 팔았으면 좋겠다. 결아, 너 베개 만드는 사업 해 볼 생각 없어? 딱 이 정도 쿠션감이면 엄청 잘 팔릴 거 같은데.”
차우현의 엉뚱한 말에 고결이 조금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바로 아래서 고결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던 차우현이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고결의 오른쪽 볼에도 분명 보조개가 있었다.
“결아. 너 오른쪽에도 보조개 들어가?”
어딘가 멍한 질문이 던져졌다. 고결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있긴 한데 왼쪽이랑 다르게 오른쪽은 흐려서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마 이쯤? 여기 어디쯤 있을 텐데….”
일부러 힘주어 입꼬리를 당긴 고결이 손끝으로 제 오른쪽 볼을 찔렀다. 차우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천천히 손을 올렸다. 차우현의 손끝이 고결의 얼굴에 톡 닿았다. 정확히 보조개가 들어가는 위치에. 마치 안착하듯이.
“거기가 아니라 여기…. 조금 더 옆이야.”
“아. 거기예요?”
별안간 속이 울렁거리고 하늘과 땅이 뒤바뀐 듯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정작 고결 자신은 어디에 있는지 위치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보조개였다. 그런데 그 옅은 볼우물에 무언가가 풍덩 빠져 버린 것 같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 보조개가 평생 가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깊이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아득했다. 고결의 얼굴에서 손도, 눈도 그 어느 것 하나 뗄 수가 없었다.
“형?”
의아한 부름이 이어졌다. 하지만 차우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 상태로 멍하니 굳어 있기만 했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 고결이 빙그레 웃곤 여전히 제 얼굴에 머물러 있는 차우현의 손을 붙잡아 아래로 쓱 끌어내렸다.
“졸리다면서요. 얼른 자요. 지금 자면 그래도 10분은 잘 수 있어요.”
차우현의 손을 붙잡고 있는 따듯한 손만큼이나 다정한 말투였다. 고결이 반대편 손을 들어 차우현의 눈 위로 자연스럽게 차양을 만들었다. 다른 손은 여전히 손가락 끝이 얽히듯 서로 맞물려 있는 상태였다.
고결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비로소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지금껏 자신이 숨을 참고 있는 줄도 몰랐던 차우현은 힘주어 입안을 씹었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자꾸만 울컥울컥 치솟아 올랐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러트 때와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강력함은 그와 맞먹었다. 아니. 러트 때보다도 훨씬 더 강한 것 같았다.
차우현은 애써 두 눈을 감았다. 어째서인지 눈을 감아도 고결의 얼굴은 되레 더 선명해졌다. 보조개를 짚었던 검지 끝이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홧홧했다. 심지어 그 열기가 온몸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가기까지 했다.
그날 그렇게 갑자기 피어난 불꽃은 차우현이 무슨 수를 써도 절대 꺼지지 않았다. 잔잔한 불씨로 남아 계속해서 차우현을 괴롭혀 댔다. 그때부터 결을 생각하거나 결과 만나면 당연하다는 듯 불씨가 커지며 몸 안에서 슬금슬금 열이 피어올랐다. 마치 반사작용처럼.
차우현은 그때야 겨우 알았다. 자신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 누군가가 고결이라는 사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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