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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44화 (44/71)

44화

그걸 막은 사람은 사람이 고결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차우현은 제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결이 제 손목을 붙잡기 전까지는 그랬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주변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주지 마시라고요, 돈.”

한참 눈을 맞추다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는 얼굴은 희고, 단정하고, 깨끗했다. 정갈한 느낌마저 주는 바른 생김새였다. 생긴 대로 노네. 자신을 도와주려는 상대한테 그런 삐딱한 생각을 했다. 귀찮게 남의 일에 끼어들어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게 단번에 이해가 가는 그런 얼굴이었다.

전혀 고맙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그때의 차우현한테는 도움이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었다. 돈을 달라는 양아치들이나 돈을 주지 말라며 자신을 말리는 정의의 사도나 그저 똑같은 방해꾼일 뿐이었다. 짜증 나게 알짱거리지 말고 당장에 꺼져 줬으면 하는. 그 정의의 사도가 축제 때 연극을 잘 봤다며 이상하게 자신은 조금 슬픈 느낌도 들었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어디가, 왜 슬퍼 보였는데?”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은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이것도 억제제의 부작용 중 하나일 거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도 차우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차우현이 연기한 <나르시시즘>은 극본을 담당하는 부원 중에서도 1학년 여자애가 주축이 되어 쓴 것이었다. 그 힘들다는 특별 전형을 뚫고 세움고에 들어온 여자애였다. 고작 열일곱밖에 되지 않았는데 축제 무대에 올릴 극을 혼자서 통으로 쓸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좋았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극본팀 애들의 수정을 거치긴 해야 했지만.

“선배님. 제가 언젠가 꼭 한번 쓰고 싶던 소재가 있는데요. 이게 선배님이 아니면 절대 사용하질 못할 것 같아서…. 선배님만 괜찮다고 해 주시면 나르시시즘을 주제로 잡고 좀 재미있는 극을 써 보고 싶은데요. 아무래도 축제니까 너무 무겁거나 진중한 극은 반응이 별로일 것 같아서요. 그렇게 해도 될까요?”

그 여자애가 자신의 뮤즈로 삼은 것은 차우현이었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여자애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차우현은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정을 거쳐 완성된 대본을 받고 나서는 후회했다. 단순히 극이 가볍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웃기고 재미있는 극을 쓸 거라는 얘기는 이미 전해 들었기에 상관없었다. 그것보다는 이 극이 나르시시즘을 풀어내고 있는 방식 자체가 거슬렸다.

모두 재미있다고 했지만 차우현한테 있어 <나르시시즘>은 슬픈 연극이었다. <나르시시즘>의 주된 내용은 이랬다. 극심한 안면 인식 장애를 앓고 있는 남자 주인공 ‘지우’는 갈수록 심해지는 증세로 인해 친구와 가족 등 아주 가까운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그는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 남겨졌다는 착각에 빠져 외로워하다 결국엔 스스로의 얼굴조차 잊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뒤로 품속에 늘 거울을 품고 다니며 행복하게 지낸다. 이게 연극의 전체적인 스토리였다.

교훈이나 감동이 아닌 오로지 재미에만 초점을 둔 연극이었다. 연극은 ‘지우’가 자신의 아름다운 미모를 과도하게 찬양하고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난감함을 겪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보여 주는 데 집중됐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객석에서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대 옆에 서 있는 스태프 애들마저 키득키득 남몰래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정작 차우현은 대본을 받은 순간부터 무대에 오른 날까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웃지 못한 것이었다.

<나르시시즘>의 ‘지우’는 아마 스스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허상의 존재만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었다. 그것도 죽을 때까지. 차우현은 그런 ‘지우’가 꼭 자신처럼 느껴졌다. ‘지우’가 보고 있는 것은 가짜였다. 덕분에 외로움을 덜어내게 됐어도, 행복하게 웃게 됐어도 ‘지우’의 세상엔 진짜가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니고 살아 계신 할아버지가 진짜 할아버지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때부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긴 채 전혀 다른 사람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 차우현처럼. ‘지우’ 역시 스스로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이 전부 다 거짓이었다.

“네. 그것도 그렇고 이제 지우한테는 자기 자신마저도 완벽한 타인이 되어 버린 거잖아요. 아무리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게 됐어도 제가 지우라면 조금 슬플 것 같아요. 지우는 결국엔 나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 거니까.”

나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 거니까. 그 말이 묵직하게 명치에 내려앉았다. 쓴 사람조차 오직 웃음과 재미만을 노리고 쓴 가벼운 극이었다. 처음이었다. 그 연극을 보고 이렇게 말해 준 사람은. 더불어 차우현이 연기한 ‘지우’의 기분을 이토록 정확하게 알아채준 사람도. 차우현한테 있어 이건 무척이나 특별한 경험이었다.

“글쎄.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가끔? 아무래도 이 교복이 돈줄로 보이나 봐, 다들.”

그래서 태연한 얼굴로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냥 좀 궁금했다. 이 애가 그런 건 왜 묻는 건지.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할 건지.

설마하니 그 거짓말에 잘 알지도 못하는 후배가 자신의 가드 역할을 자처할 줄은 몰랐다. 자신이 말해 놓고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단정한 얼굴이 후회로 물든 땐 왠지 모르게 좀 유쾌하기까지 했다. 눈앞에 있는 이 인물한테 흥미가 동했다. 휴대폰 번호를 달라고 한 건 반쯤은 충동에서였다

본래 우현은 뭐든 머릿속으로 철저하게 계산한 후에 행동하는 편이었다. 이건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손이 먼저 나가는 걸 어쩌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쯤, 연극 배역에 지원하기 위해 손을 들었던 그때처럼.

“고결. 저는 고결이요. 1학년 2반이고 유도부원이에요.”

“그래. 반가워, 결아. 나는 2학년 3반 차우현이야. 연극부고.”

맞잡은 손은 운동하는 애답게 단단하고 조금은 거칠었다. 그런데 미소 짓는 얼굴은 그와 정반대였다. 슬쩍 입꼬리를 당겨 웃는 단정한 얼굴 위로 못 보던 것이 생겨났다. 보조개였다. 차우현은 그 자국에 가만히 시선을 고정했다. 웃으니까 이미지가 귀엽게 변하네. 보조개 때문인가. 같은 저와 어울리지 않는 제법 몽글한 생각을 하면서.

차우현은 보조개가 박힌 고결의 왼쪽 뺨에 꽤 오랫동안 시선을 고정하다 겨우 눈을 들었다. 동그란 두 눈이 기다렸다는 듯 올곧게 부딪혀 왔다. 그 투명하고 까만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지긋지긋하던 두통이 가시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머리가 맑아졌다. 러트 억제제의 부작용이 드디어 가시는 모양이었다.

***

그때까지만 해도 차우현이 고결한테 가진 건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다. 극을 쓴 사람조차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캐릭터를 해석한 자신. 배역에 스스로의 슬픔을 투영한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의 배역을 이해해 준, 슬픔을 알아보고 들여다봐 준 유일한 사람인 고결. 그런 존재한테 호기심을 갖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그때 그 골목길에서 나인 거 알고 일부러 도우러 온 거야?”

“아, 아니요. 그건 아니었어요. 원래도 도와주려고 했는데 보니까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더라고요. 근데 그거 보고 마음이 급해져서 더 빨리 뛰어가긴 했어요.”

“그냥 원래부터 도와주려고 그랬던 거야?”

“네.”

“왜? 너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잖아.”

“어….”

그런 물음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조금은 당황한 얼굴. 점점 늘어지는 말 사이의 공백. 잠깐 머뭇거리다 나온 고결의 대답에 차우현이 가진 호기심은 더욱더 커졌다.

“저랑 상관없는 사람이긴 해도…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한 건데….”

고결은 당연한 거라고 칭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을 위해 굳이 골목길로 뛰어 들어간 자신의 행동을. 차우현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타심이었다. 그건 아마 죽을 때까지 이해 불가능한 영역일 것이었다. 왜냐면 잉태의 과정부터 탄생까지, 차우현의 모든 순간에는 언제나 이기심이 함께했으므로.

차우현의 주변에는 이기적인 인간들만 넘쳐 났다. 그로 인해 한때는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마저 잃게 됐다. 물론 이제는 그 사실이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차우현이 그리워한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한도연이었다. 그녀를 계속 찾아갔던 건 놓지 못한 과거를 향한 미련 때문이었다. 사랑이나 애정 같은 거창한 감정이 아니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랬다.

실제로 그녀가 죽던 날, 차우현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앞으로 더 나쁜 꼴을 많이 보게 됐을 것이었다. 그녀도, 그리고 자신도. 차라리 빨리 죽어서 다행이었다.

“저는 여태까지 모놀로그가 독백이랑 같은 말인지 몰랐어요.”

“그럴 수 있지. 일반적으로 자주 쓰는 용어는 아니니까.”

“근데 방백이랑 독백은 뭐가 다른 거예요?”

“음. 쉽게 말해서 상대역이 있냐 없냐의 차이라고 보면 될 거 같은데. 독백은 상대역 없이 배우가 혼자 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거고, 방백은 다른 배우가 있지만 관객들한테만 들리는 것처럼 말하는 거거든.”

창고에서의 시간은 별거 없고 그래서 편안했다. 차우현과 고결은 두꺼운 매트 위에 나란히 앉아 딱딱한 벽에 등을 기댄 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고결은 꽤나 자주 연극에 관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노력하는 것이었다. 연기를 하는 자신과 어떻게든 공통된 화제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차우현은 그걸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고결은 투명했다. 모든 것을 다 비춰 낼 것 같은 맑은 눈동자만큼이나 투명한 사람이었다. 차우현은 고결의 감정이나 마음을 쉽게 읽어 냈다. 그때마다 고결은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면서. 아마 본인은 뭘 해도 잘 숨기고 티가 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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