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차 회장을 할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된 지는 벌써 꽤 오래였다. 차우현은 일부러 목소리 끝을 살짝 떨었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으로 차 회장이 오해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차우현을 한심하단 눈으로 탐탁지 않게 쳐다보고 있던 차 회장이 날카롭게 명령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꺼져.”
차 회장의 말이 떨어짐과 거의 동시였다. 차우현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도망치듯 서둘러 서재를 벗어났다. 쯧. 문을 닫기 전 등 뒤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차우현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우스웠다. 남들과 다른 척. 특별한 척. 마치 하늘의 선택을 받은 더없이 귀하고 고결한 존재인 척 구는 꼴이. 그래 봤자 차우현의 눈엔 그저 한심한 멍청이일 뿐이었다.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도 구분해 내지 못하는 머저리. 그러니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렇게 감쪽같이 속고 있지. 의심 한 번 하지 않고.
“병신.”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건조했다. 차우현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을 향해 올라갔다.
***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뭔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차우현은 중학교 때와 똑같이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런 차우현을 둘러싼 주변의 반응 역시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알파들은 차우현을 형질 값 못하는 머저리 취급했다. 중학생 때도 그랬듯이. 베타들의 반응은 대략 6 대 4 정도로 나뉘었다. 6은 보통의 알파와는 다른 우현을 신기해하고 좋게 보는 쪽. 나머지 4는 저딴 게 무슨 우성 알파냐며 사실은 오메가 아니냐고 비웃고 조롱하는 쪽. 중학교 때는 7 대 3이었는데 머리가 커져서 그런가, 부정적인 인식의 비율이 살짝 높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우현은 철저히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럴수록 주변의 무시는 점차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건 차우현한테 있어 좋은 일이었다. 그래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는 차 회장의 속이 뒤집힐 테니까.
동아리 활동은 그저 그랬다. 연극부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차 회장한테 뺨까지 얻어맞았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연기를 할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처음엔 한도연 때문에, 그 이후로는 그저 차 회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서 탈퇴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연기에 큰 뜻이나 의지 같은 게 있는 상태가 아니란 뜻이었다.
차우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이 죽은 한도연의 뒤를 따라서 배우가 되리라곤. 그런 차우현이 배우가 된 건, 오로지 고결 때문이었다. 그날 그 골목길에서 고결을 만나게 되면서 차우현의 인생은 완전히 틀어졌다. 그것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방향으로.
“…씹.”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차우현이 얼굴을 구긴 채 제자리에 멈춰 섰다. 러트가 올 기미가 느껴졌다. 혼자 돌아가고 싶어서 일부러 기사도 부르지 않은 날이었다. 차우현은 과거의 제 행동을 욕하며 짜증스레 가방을 열었다. 지퍼를 열고 가방 안을 뒤적거리는 손길에서 다급함이 묻어났다. 차우현은 물도 없이 억제제를 그대로 씹어 삼켰다.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혹은 딱히 별다른 이유 없이 러트는 이렇게 불안정하게 찾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알파의 러트사이클은 오메가의 히트사이클과 다르게 그 주기가 짧지 않다는 것이었다. 정말 많아야 1년에 세네 번. 물론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그냥 넘어갈 때도 많았다.
반대로 그래서 존재하는 단점도 있었다. 히트사이클의 경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대체로 주기가 일정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러트사이클의 경우 주기 파악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그게 차우현이 가방 한편에 늘 억제제를 챙겨 다니는 이유였다. 발현한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러트가 오면 아래로 빠듯하게 열이 몰리면서 후각과 청각 등 온몸의 감각이 평소보다 훨씬 더 예민해졌다. 그건 알파의 피에 새겨진 본능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오메가를 찾기 위한 본능. 발달한 오감으로 근처에 있는 오메가를 알아채고 페로몬으로 억압한 뒤 성에 찰 때까지 마음껏 취하고, 유린하고, 싸지르라는. 정말이지 역겹고 더러운 본능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보통의 알파한테 있어 러트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만 행동하면 됐다. 아무 오메가나 붙잡고 페로몬을 풀어 알 수 없는 이 열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성욕을 풀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실제로 대다수의 알파가 그렇게 살았다. 그래도 뒤탈이 없을 만한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으니 할 수 있는 짓이었다. 하지만 차우현은 애써 그 본능을 억눌렀다. 싫었다. 아니, 싫다 못해 혐오스러웠다. 자신이 본능 하나 이기지 못하고 거기에 휘둘리는 알파라는 사실도.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할 차 회장의 모습도. 봐라, 너는 우성 알파다. 그것도 내가 만들어 낸. 차 회장이 제 귓가에다 대고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끔찍했다.
‘어디 잠깐 피할 데가….’
차우현은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씹으며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상태로 우연히 오메가와 마주치기라도 했다간 골치 아파졌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오메가를 피해서 도망치는, 러트가 온 알파. 코미디 영화도 이런 주제로는 만들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차우현한테 있어 이건 웃음 따위 전혀 나오지 않는 현실이었다. 약 기운이 완전하게 돌 때까지 혼자 있을 곳이 필요했다.
때마침 맞은편에 있는 골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차우현은 주저 없이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딱딱한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차우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더럽고 허름한 골목이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되레 지금의 차우현한테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아무도 이런 골목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약효가 빨리 돌아야 될 텐데. 차우현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심호흡을 했다.
“어? 뭐야? 야, 여기 누구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우현은 감고 있던 눈을 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 봐도 질이 안 좋아 보이는 남자 셋이 골목 안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담배와 라이터를 든 채였다.
차우현은 그제야 시선을 아래로 내려 바닥을 살펴보았다. 이제 보니 눈이 닿는 곳곳마다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었다. 아, 양아치들이 담배 피우는 장소였나. 혼자 있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잘못 골랐다.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을 감지한 차우현의 얼굴 위로 짜증이 어렸다.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그 얼굴을 본 양아치들의 표정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한쪽 귀에 피어싱을 덕지덕지 한 놈이 차우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야. 시발 너 지금 인상 썼냐?”
“…….”
“인상 썼냐고. 시발아.”
야. 씹냐? 사람 말 씹어? 피어싱이 빈정거리며 차우현의 어깨를 검지로 찔러 댔다. 제법 힘이 강하게 실린 손길이었지만 차우현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예리하게 날이 선 눈으로 제 어깨를 찌르는 피어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곱상하니 예쁘장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눈빛이었다. 피어싱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살짝 물러섰다. 그래도 친구들 앞이라 쪽팔리긴 싫어서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와. 이 새끼 봐라? 사람을 막 야리네?”
“야. 잠깐만. 근데 쟤 교복 그거 아니냐? 세움고?”
그때였다. 조금 떨어져서 그 모습을 관망하고 있던 갈색 머리가 갑자기 차우현의 교복을 물고 늘어진 건. 세움고라는 단어에 피어싱이 차우현을 위에서 아래로 쭉 훑었다. 피어싱이 환하게 웃으며 반색했다.
“어! 맞네! 간만에 돈 있는 애 걸렸네?”
로또다. 로또. 대목을 잡은 양아치 셋이 서로를 돌아보며 킬킬 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동안 차우현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갔다.
러트 시에 먹는 억제제는 몸에 많은 부담을 줬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는 히트사이클 억제제와 달리 러트사이클 억제제는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애초에 억제제를 먹어 가며 러트를 버티는 알파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수요가 없는데 공급이라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속이 기분 나쁘게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평소의 차우현을 연기하기에는 컨디션이 너무나도 별로였다. 같은 세움고 학생이면 또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니 굳이 저 무리 앞에서 연기를 할 필요도 없긴 했다.
아, 시발. 차우현은 이를 악물었다. 갈수록 두통이 더 심해졌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적립되기만 했다. 이러다간 머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터지거나 둘 중 하나는 할 것 같았다. 차우현의 고개가 아래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 행동을 겁먹은 것으로 오해한 피어싱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너 세움고 다니는 거면 돈도 많을 거 아니야. 아, 그거 있잖아. 왜 노블 뭐 어쩌고 하는 거. 아무튼 너도 우리한테 그거 했다고 생각해.”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단어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머저리들을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도 했고. 러트 억제제의 부작용은 짧게는 15분, 길게는 약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가능하면 혼자 조용히 이곳에 있고 싶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어차피 저 머저리들이 바라는 건 돈이었다. 몇 푼 쥐여 주고 얼른 보내는 게 나았다.
“주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