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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42화 (42/71)

42화

한도연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러곤 파리하게 마른 손을 내뻗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리 내놔 봐.”

그녀가 대본에 반응을 보인다는 건 차우현한테 있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러길 바라고, 혹시나 하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채 온 거였으니까. 차우현은 군말 없이 얌전히 대본을 내밀었다. 한도연이 아래로 눈을 내리깔고서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대본을 읽는 옆얼굴이 전에 없이 진지하고 고요했다. 배우였을 때는 항상 저런 식으로 대본을 봤던 걸까. 차우현은 그 모습에서 과거 배우 한도연의 모습을 상상하고 겹쳐 봤다.

“…창작극이야?”

그게 대본을 끝까지 다 읽은 한도연의 첫 질문이었다. 차우현은 마른침을 삼킨 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재미있게 잘 썼네.”

가볍게 대꾸한 한도연이 대본을 돌려줬다. 차우현이 멀리 밀어 놨던 술병이 다시금 앞으로 당겨졌다. 대본이 떠나간 한도연의 손에는 자연스럽게 술병이 자리했다.

한도연이 빈 잔에다 양주를 따르는 동안 차우현은 애꿎은 입안을 몇 번이나 씹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좀처럼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한도연은 그런 차우현한테는 관심도 주지 않고 맹물을 마시듯이 꿀꺽꿀꺽 술만 들이켰다. 차우현은 있는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목 언저리에 걸린 말을 내뱉는 게 꼭 물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힘들게 느껴졌다.

“제가, 제가 주인공 역할이에요.”

처음에 차우현이 지원한 건 자그마한 단역이었다. 그런데 반 애들이 우현은 무조건 남자 주인공을 맡아야 한다고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래서 얼결에 주인공을 연기하게 되고야 말았다. 차우현의 말에 한도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차우현은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은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혹시 괜찮으시면 축제 때 저 연극 하는 거 보러 와 주실래요? 아직 2주나 남긴 했는데… 저 진짜 열심히 할 테니까 꼭 보러 와 주세요.”

거기까지가 쥐어짜 낸 용기의 끝이었다. 차우현은 가방을 챙겨 거의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축제 날이 될 때까지 별채 근처로는 걸음도 하지 않았다. 두려웠다. 한도연의 입에서 내가 거길 왜 가야 하는데? 같은 냉정한 거절의 말이 나올까 봐. 물론 소름 끼치니까 엄마라고 부르지 말란 모진 말도 들어 봤다. 하지만 대놓고 한도연한테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한도연이 그날 자신이 한 말을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미지수긴 했지만.

그로부터 2주 후, 차우현은 축제 연극 무대에 섰다. 그리고 똑똑히 보았다. 강당 맨 끝에 팔짱을 낀 채로 우뚝 서 있는 길고 가냘픈 인영을. 무대와 거리도 멀고 선글라스까지 껴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건 확실히 한도연이었다. 한도연이 맞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연기하는 내내 시선이 자꾸만 강당의 맨 뒤로 향했다. 한도연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제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강당을 떠난 건 반 애들이 전부 무대 위로 올라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였다. 차우현은 무대에서 내려가자마자 급하게 강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녀와 만나지는 못했다.

그날 차우현은 2주 만에 별채로 향했다. 한도연은 언제나처럼 부엌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엄마. 아까 오셨죠? 오늘 축제 때 오셨던 거 맞죠? 저 무대 하는 거 보러 와 주셨던 거죠? 그렇죠? 한도연을 보면 꺼내 놓으려고 했던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 설렘에 찬 질문들은 단 하나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기엔 술을 마시고 있는 한도연의 얼굴이 너무나도 어두운 탓이었다. 들떴던 기분이 점차 바닥으로 침울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난 도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차우현은 조소했다. 어차피 또 이렇게 바닥을 기게 될 거면서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잠깐이나마 들떴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비참함에 속이 쓰렸다.

“닮았더라.”

그때 갑자기 한도연이 입을 열었다. 그것도 모자라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차우현을 빤히 바라보기까지 했다.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한도연이 이렇게나 똑바로 자신을 눈에 담아 준 것은. 방금까지 스스로의 한심함을 욕하고 있었건만 그 시선에 다시금 기대감이 스멀스멀 움트려고 했다. 꼴사납게도.

“닮긴 닮았더라고. 나랑.”

한도연이 픽 헛웃음을 흘렸다. 처연하고 슬픈 얼굴 위로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걸렸다. 차우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도연과 올곧게 눈을 맞추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무대에서 연기하는 널 보는데 나랑 너무 닮아서 그 순간에는…. 그 순간만큼은 네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부정을 못 하겠더라.”

묻고 싶었다. 그러면 이제 저 다시 봐 주시는 거냐고. 엄마 아들로, 끔찍한 괴물 같은 게 아니라 엄마 자식으로 다시 인정해 주시는 거냐고. 하지만 차우현이 입을 여는 것보다 한도연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게 더 빨랐다. 큰 눈에 어린 물기가 굵은 눈물방울이 되어 눈가를 타고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차우현은 머뭇거리다 용기 내 손을 뻗었다. 부서질 것 같은 마른 어깨가 손바닥에 닿았다. 차우현은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살짝 토닥였다. 그러자 한도연이 아예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엉엉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제 어깨를 토닥이는 손을 매정하게 내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차우현은 충분히 행복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옛날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잠시 젖었을 만큼.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주가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저주는 계속됐다. 한도연이 죽었다. 그 일이 있고 고작 나흘 뒤에. 사인은 급성 알코올 중독이었다. 차 회장이 원하던 대로 그녀는 결국 술에 잡아먹혀 죽었다. 하지만 대중한테 알려진 그녀의 사인은 췌장암이었다. 신문과 뉴스 등 언론 매체는 연일 그녀의 사망 소식을 다뤘다. 그동안 남몰래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해 온 故한도연 씨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CH그룹은 췌장암 환우회에 10억을 기부했다. 그리고 CH병원 암센터에도 10억을 내놓았다. 한도연과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금액은 모두 한도연의 이름으로 기증되었다. 그녀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정작 은퇴 후 온갖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그녀의 처절한 삶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때부터였다. 차우현은 무대에 서는 꿈을 자주 꿨다. 그러나 축제 때와는 그림이 사뭇 달랐다. 꿈에서 한도연은 차우현이 커튼콜을 할 때까지 무대 맨 앞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주며 다정하게 껴안아 주기까지 했다. 역시 내 아들이야. 뿌듯함이 묻어나는 밝은 목소리가 좋았다. 차우현은 두 눈을 접어 가며 환하게 웃었다. 비록 꿈에서 깨고 나면 감당하기 힘든 허무함과 허탈함이 찾아와 배로 힘들었지만.

고등학생이 된 차우현은 연극부에 들어갔다. 알고 있었다. 연기를 해 봤자 그때처럼 그녀가 자신을 봐 주지 않는다는 거. 아니. 그럴 수 없다는 거. 그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닮긴 닮았더라고. 나랑.’

‘그 순간만큼은 네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부정을 못 하겠더라.’

하지만 그녀가 자신한테 고해성사를 하듯 슬프게 내뱉은 말들이 도무지 잊히질 않아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자식!”

차 회장은 그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차 회장은 차우현을 서재로 불러들인 뒤 대뜸 뺨부터 올려붙이고 봤다. 연달아 양 뺨을 얻어맞은 차우현은 고개를 숙인 채 혀로 볼 안을 문질렀다. 살점이 잘못 잘린 종이처럼 너덜거렸다. 준비할 새도 없이 얻어맞은 탓에 볼을 씹고야 말았다. 곧이어 입안으로 비릿한 피 맛이 번져 갔다. 저 나이 먹고도 아직 이만한 힘을 쓸 수 있다니. 기력이 대단하네. 차우현은 피 섞인 타액을 삼키며 태연히 그런 생각이나 했다.

“이제 네까짓 것한테 거는 기대는 추호도 없다. 네놈을 대신할 우성 알파가 셋이나 있으니까.”

이제 차 씨 집안에 우성 알파 손주는 차우현을 포함해 총 넷이었다. 차민정의 둘째 아들, 차재민의 첫째 아들과 둘째 딸이 모두 우성 알파로 발현했기 때문이었다. 차우현은 그 앞에서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초조한 척 계속해서 손끝을 매만졌다. 어깨까지 한껏 움츠린 채로. 이건 차 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 중에 하나였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게 눈에 보이는, 자신의 나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자세라서.

“네 몸속에 그 천한 오메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네 어미를 따라 굳이 연기를 해야겠다면, 그래 좋다. 내 말리지는 않으마. 다만 우리 집안에 먹칠할 짓은 하고 돌아다니지 말거라.”

후. 차 회장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 숨과 함께 격양된 감정이 그나마 조금은 가라앉았다.

“네가 실제로는 덜떨어진 놈이어도 학교생활이나 성적 등 남의 눈에 평가될 것만큼은 흠 하나 없는, 아주 완벽한 결과물로 만들어 내야 할 거다. 내가 버러지만도 못한 네놈 자식을 그나마 우성 알파라고 봐주는 건 딱 여기까지다. 네가 그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순간, 숨 쉬는 것마저도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지게 만들어 주마.”

내 말 알아들었냐? 맨 마지막 말은 이를 악물고 거의 씹듯이 내뱉었다. 차 회장의 말이 차우현의 귀에는 꼭 그렇게 들렸다. 너도 네 엄마처럼 만들어 주겠다는 소리로. 인생을 망치고 결국엔 목숨마저도 잃게 만든 게 한도연 하나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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