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41화 (41/71)
  • 41화

    “미안. 내가 다른 약속이 있어서.”

    차우현은 제게 들러붙는 알파들과 거리를 뒀다. 그 대신에 베타들과 친하게 지낼, 아니. 친하게 보이게끔 지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성 알파인 차우현을 경계하고 어려워했다. 이래선 계획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차우현은 고심했다. 그저 착하거나 조용하기만 해서는 안 됐다. 빈틈을 보여야 했다. 나는 너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우성 알파가 사실 알고 보면 별거 없는 존재라는 걸 인식시켜야 했다. 그래야 심리적인 거리감과 거부감이 줄어들 테니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성적이나 체력 등 눈에 보이는 부분에서 부족함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건드려선 안 되는 분야였다. 우성 알파라는 타고난 유전적 성질이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부족한 척 연기를 했다간 차 회장이 눈치를 챌 수도 있었다. 성적과 체력을 제외하고, 눈에 잘 보일 만한 빈틈. 흔히들 인간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만한 거.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저기, 우현아. 너 음악실에다 교과서 두고 갔길래 내가 챙겨 왔는데….”

    “아, 진짜? 챙겨 줘서 고마워. 어쩐지 손이 허전하더라.”

    내가 원래 물건을 잘 두고 다녀서. 차우현은 교과서를 건네받으며 부끄럽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말을 걸 때만 해도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스르륵 풀어졌다. 그 순간에 차우현은 직감했다. 자신의 방법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때부터 차우현은 손에 구멍이라도 난 사람처럼 굴었다. 툭하면 두고 다니고, 흘리고 다니고, 잃어버리고. 미술과 가사실습 등에서도 엉성함을 드러냈다. 손을 쓰는 거라면 공부 외에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허술한 척. 나사 하나가 슬쩍, 아주 슬쩍 풀려 있어서 어딘가 헐거운 애인 척 행동했다. 반 애들은 그런 차우현을 신기해했다. 그리고 곧 편안해했다. 차우현은 큰 이질감 없이 베타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차우현의 연기는 집에서도 계속됐다. 집에서는 겁 많고 유약한 초식 동물 연기를 선보였다. 차 회장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봤다.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들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최 회장의 앞에서처럼 똑같이 굴었다. 남을 굴복시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는데. 몸 안에 흐르고 있는 피 자체가 그런데, 차우현은 철저히 그 반대로 행동했다. 답답하리만큼 소심하게 굴었다. 남 앞에서 기 한 번 펴지 못하고 납작 엎드리는 게 자신이 타고난 본능인 것처럼.

    차 회장은 그런 차우현을 몹시도 못마땅해했다. 우성 알파로 발현했고 그에 걸맞은 우수한 자질도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 조금도 활용하지 못하는 차우현의 모습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거기다 차우현은 엄밀히 말해 손주가 아니었다. 한 대를 걸러서가 아닌 자신의 진짜 피를 이어받은 친자식이었다. 차 회장의 입장에서 이건 실수를 만회하려다가 또 한 번 실패작을 만들어 버린 셈이었다. 앞선 실수는 차태민이고, 이번 실패작은 차우현이었다.

    차 씨 집안의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의 탄생에 관해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된 차우현이 일부러 실패작 연기를 하고 있으리라곤. 그 대단한 차 회장조차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였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차 씨 일가는 차우현을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다 못해 아예 노골적으로 멸시하기 시작했다.

    “저거 당장 별채로 치워. 내 눈에 띄는 일 없게 해.”

    차 회장은 우현한테서 모든 기대감을 거둬 냈다. 그 실망과 분노는 고스란히 한도연한테로 향했다. 차 회장의 명령으로 한도연은 본채에서 쫓겨나 별채에서 지내게 됐다. 고용인들이 지내는 장소였다. 그래도 차우현은 그 귀한 우성 알파라는 이유 하나로 한도연처럼 집에서 내쫓기지는 않았다. 물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서 살아도 사는 게 아니긴 했지만.

    “도련님 오셨어요? 마실 거라도 좀 내어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우현은 시간이 날 때마다 몰래 별채로 향했다. 차 회장이 알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하지만 고용인들은 차우현의 행동을 눈감아 줬다. 차우현이 집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으며 자랐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사람들이었다.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그들은 차우현을 안쓰럽게 여겼다. 아직 어린아이가 얼마나 사람이 그리우면 정신도 온전치 못한 엄마를 찾을까. 그런 마음에 기꺼이 차우현의 공범자가 되어 주었다.

    한도연은 별채로 쫓겨나서도 언제나 그랬듯 밤낮없이 술만 마셔 댔다. 차 회장이 명한 건 어디까지나 그녀를 자신의 눈앞에서 치우라는 것이었다. 그녀한테서 술을 빼앗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 회장은 술을 모자람 없이 채워 두고 한도연이 원할 때마다 내어 줄 것을 지시했다. 한도연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난동을 부려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래야만 그녀가 더 빨리 병들기 때문이었다. 차 회장은 한도연이 술에 잡아먹히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녀가 죽음에 이르게끔 유도하는 것이었다.

    차우현이 별채에 가 봤자 볼 수 있는 거라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한도연의 모습밖에 없었다. 그녀는 차우현을 알아보지도 못했지만 차우현은 꾸준히 별채를 찾았다. 한도연의 정신이 멀쩡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신이 멀쩡했다면 자신과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을 테니까.

    흔히들 ‘집’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차우현한테는 이 별채가 그랬다. 차 씨 집안사람들이 있는 본채보다는 차라리 여기가. 술에 취한 한도연이 있는 이곳이 그나마 집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고약한 술 냄새가 나도. 마주 보는 시선이나 오고 가는 대화 같은 것이 없어도. 여기에서는 멸시 대신 없는 사람 취급만 당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그렇게 차우현은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3년이라는 제법 긴 시간이 흘렀어도 바뀐 것은 딱히 없었다. 그 사이에 차민정의 첫째 딸이 열성 알파로 발현했다는 점 빼고는. 그래서 한동안 차 회장의 눈치를 살피느라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 봤자 차우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는 처지라.

    ‘어디 가셨지?’

    하교한 차우현은 자연스럽게 본채가 아닌 별채로 향했다. 고용인들은 새벽 일찍 본채로 출근을 하기 때문에 이 시간에 별채에 남아 있는 인원은 없었다. 일하지 않는 한도연 빼고는.

    그런데 웬일인지 한도연이 늘 앉아서 술을 마시는 부엌조차 텅 비어 있었다. 식탁 위에 나뒹굴고 있는 술병 몇 개와 삐뚜름하게 뒤로 빠져 있는 의자 한 개. 그것들이 한도연의 존재감을 대신하고 있었다.

    일하는 중간 잠깐 별채에 들른 고용인이 식탁에 엎어져 있는 한도연을 발견하고 방에다 데려다준 모양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었다. 차우현은 식탁 앞으로 다가가 아마도 한도연이 앉았을 자리에 대신 앉았다.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가 역해서 술병은 조금 멀리 밀어 두었다.

    ‘주무시고 계시나? 이거 보여 드려야 하는데.’

    차우현이 손에 든 대본을 감흥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세움 중학교와 같은 재단인 세움 고등학교의 축제는 가을에 열렸다. 하지만 차우현이 다니는 세움 중학교의 축제는 5월 말에 열렸다. 유명 인사의 2세들이 많이 다니다 보니 중학교 축제치고는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 학교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지원을 많이 해 줬다. 푸드 트럭도 오고, 유명 아이돌이 축하 공연을 서기도 했다. 그날만큼은 외부인도 들어올 수 있게끔 학교를 개방해서 거의 지역 축제 같은 분위기를 띠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반마다 축제 참여는 필수였다. 제법 열띤 회의 끝에 우현의 반은 연극을 하기로 했다. 연극을 왜 하냐. 그거 너무 귀찮다. 그냥 카페나 하자. 재미있을 거 같은데 왜 그러냐. 이미 정해진 거니까 토 달지 마라. 반 애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동안에 차우현은 한 가지 생각을 했다. 별채에 있을 한도연의 생각을.

    한도연이 결혼 전 유명한 배우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호기심에 그녀가 찍은 드라마와 영화를 직접 찾아보기도 했다. 그때의 그녀는 정말로 반짝였다. 지금과는 다르게.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냥 사람 자체에서 빛이 났다. 아, 저래서 연예인을 스타라고 부르는 거구나. 저런 사람을 스타라고 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 별은 지상으로 내려오느라 온몸이 다 타 버려 시커먼 재가 되고야 말았지만.

    내가 만약 이번 연극에서 배역을 맡게 된다면. 그래서 무대에 오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축제에 와 달라고 말하면… 부탁하면 와 줄까? 배역에 지원한 건 반쯤은 충동이었다. 그 어떠한 보장도 없었다. 한도연이라면 축제에 와 주긴커녕 제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럴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손을 들고 있었다.

    괜히 한다고 했나. 그런 후회를 하며 무심하게 대본을 넘길 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 곧 있으면 툭 끊어져 버릴 듯 가느다란 실 같은 목소리가.

    “비켜. 내 자리야.”

    차우현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인기척도 없이 언제 다가온 건지. 밑이 푹 꺼진 퀭한 눈으로 한도연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우현은 불에 덴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로 조금 물러섰다. 그러자 한도연이 기다렸다는 듯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고 있는 게 아니었나? 뭐지? 차우현의 시선이 한도연의 등 뒤로 향했다. 살짝 열린 화장실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차우현은 그제야 한도연의 얼굴을 살피듯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도연의 얼굴에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또 토했나 보네. 차우현은 어렵지 않게 그 물기의 출처를 알아냈다. 토를 하고 나서 입을 헹군 뒤 세수를 하고 나왔을 거다. 한도연은 이제 술을 마시는 족족 전부 다 게워 내 버리곤 했다. 몸이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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