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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39화 (39/71)

39화

“그냥 차라리 도망치자고 하지 그랬어. 나한테 사실대로 다 털어놓고 같이 도망치자고 하지. 그렇게라도 말해 보지.”

“…….”

“나는 당신만 있으면… 그러면 됐는데.”

한도연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곧이어 짐승의 소리와도 같은 처절한 울부짖음이 방 안을 메웠다. 그 앞에서 차태민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초승달처럼 웃는 남자를 사랑했다. 안으로 움푹 들어간 얇고 환한 그 곡선에 기대 눕고 싶단 생각을 했다. 알고 보니 그 얇고 환한 곡선은 칼날이었다. 거기에 기대 누운 그녀의 몸이 댕강 잘려 나가는 건 예견된 불행이나 다름없었다. 달 같은 남자한테 마음이 기운 죄로 그녀의 인생이 기울어졌다. 그것도 나쁜, 최악의 방향으로.

한도연은 이혼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쉽게 풀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이혼 변호사를 구했다. 하지만 그 역시 번번이 실패했다. 차 회장이 미리 손을 써 둔 탓이었다. 한도연은 서서히 미쳐 갔다. 정신을 잡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놓고 사는 것이 덜 불행한 삶이었다. 그나마. 아주 조금이라도.

한도연이 무슨 수를 써도 할 수 없는 이혼 대신에 선택한 건 술이었다. 독한 알코올은 그 도수에 비례해 그녀의 몸을 아주 착실히, 빠르게 잡아먹었다. 그러는 동안 차태민은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차라리 같이 도망가자고 하지 그랬냐고. 나는 당신만 있으면 됐단 차도연의 말이 연신 가슴을 푹푹 찔렀다. 독한 술에 몸도 정신도 잠식되어 가고 있는 그녀를 더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희귀한 병명을 밝히고 이름뿐인 CH그룹 사장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려 했다. 어차피 이름만 사장일 뿐. 그에 걸맞은 힘을 행사하지 못한지는 한참 됐다. 베타로 다시 발현하게 되면서부터 그는 모든 권력을 빼앗겼다. 물론 이런다고 해서 한도연이 자신을 용서해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정말 진심을 다해서.

하지만 그 진심 어린 사과는 세상 밖으로 꺼내지기 전 누군가에 의해 묻혔다. 그 누군가는 차 회장이었다. 차 회장은 알고 있었다. 차태민이 스스로 베타라는 사실을 밝히고 사임하려 한다는 걸.

차태민은 집채만 한 덤프트럭에 치여 죽었다. 운전자가 술을 마셨다. 교통사고였다. 그가 타고 있던 차체는 알아볼 수도 없게 우그러졌다. 대기업 사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수행비서와 기사도 없이 혼자서 그 새벽길을 달렸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부러진 그의 갈비뼈가 폐를 제대로 찔렀으며 과다 출혈 및 호흡 곤란으로 인해 죽었다는 건 알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세상에 남은 건 음주운전을 한 덤프트럭 운전자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모자로 얼굴을 꽁꽁 가린 신원 미상의 남자가 기자들 앞에서 짧게 사과했다. 그 장면은 뉴스를 통해 전국으로 흩뿌려졌다. 어쩜 재수가 없기도 하지. 돈 많아도 타고난 팔자는 어쩔 수 없는 거야. 사람들은 끌끌 혀를 찼다. 그건 어디까지나 불우한 사고일 뿐이었다. 세간에서는.

이 모든 게 차우현이 일곱 살이 될 무렵에 일어난 일이었다.

***

한도연은 이제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주다. 살아 있는 불행이며 검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아귀다. 차 씨 집안과 차 회장의 비틀린 탐욕으로 태어난.

그녀는 변했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화장품과 섬유유연제 등이 섞여 좋은 냄새가 나던 부드러운 몸에서는 이제 지독한 술 냄새만이 풍겼다. 애정 가득한 눈 역시 더는 없었다. 차우현을 바라보는 형형한 두 눈에 담긴 것은 오직 살의와 분노뿐이었다.

벌겋게 핏발이 선 그 섬뜩한 눈과 마주할 때마다 차우현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위협감을 느꼈다. 한도연이 당장에라도 파리하게 마른 손을 뻗어 제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비틀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적나라한 날것의 적의였다. 어린 차우현도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한도연은 매일 술에 절어 지냈다. 오직 집 안에만 틀어박혀 와인,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등 술이라면 뭐든지 닥치는 대로 들이부었다. 그리고 취한 상태로 비척비척 집 안을 돌아다니다 아무 데서나 픽 쓰러져서 기절하듯 잠이 들곤 했다. 잠든 그녀가 발견되는 곳은 대개 부엌, 간이 와인바, 술 서랍장 앞, 침실로 가는 길목. 이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업거나 질질 끌어다 침대에 눕혀 놓는 건 고용인들의 몫이었다.

집 안 곳곳에서 역겨운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고용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청소해도 그 냄새는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차우현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냄새를 맡는 건 오직 차우현뿐이었다. 심지어 차우현은 제 방에 혼자 있을 때도 종종 지독한 술 냄새를 느끼곤 했다.

불행은 옮는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던 그녀가 불행해지면서부터 차우현도 덩달아 불행해진 것처럼. 어쩌면 미치는 것도 그럴지 몰랐다. 불행처럼 자연스레 옮아갈 수도 있었다. 차우현은 자신이 한도연을 따라 미쳐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실에 딱히 속상하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며칠 전, 그녀한테서 들은 말이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사실보다 몇 배는 더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엄마. 이러지 말고 방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차우현이 13살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모든 초등학교에서는 국가 보건법상 매년 12월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6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젠더 검사를 시행했다. 만 12세가 되면 젠더 검사의 정확도가 조금이나마 더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간혹가다 생일이 12월 말인 아이들은 부모님이 따로 병원에 데려가 젠더 검사를 받게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오메가로 발현된 애가 재검사로 알파 판정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성 알파의 가치가 보다 절대적인 CH 일가의 경우 13살 생일이 되면 곧장 병원을 찾아 젠더 검사를 받게 했다. 차우현 역시 차 회장의 지시에 따라 생일날에 딱 맞춰 젠더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당연히 우성 알파였다. 차 회장이 그토록 염원하던. 차우현의 검사 결과에 차 회장은 티 나게 기뻐했고, 한도연은 평소보다 더 많은 술을 마시고 취했다.

언제나 그래 왔듯 외롭고 쓸쓸한 생일이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밥상과 평소보다 훨씬 두툼한 용돈 봉투를 받아도 마음은 휑하기만 한.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그리고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주던 사람과 마주 앉아서 함께 밥을 먹지 못하게 된 이후로 차우현의 생일은 언제나 그래 왔다.

차 회장의 눈치를 보느라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던 저녁밥이 결국 얹힌 모양이었다. 새벽 내내 속이 불편했다. 차우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조용히 1층 부엌으로 내려갔다. 비상약이 들어 있는 찬장에 소화제 하나쯤은 들어 있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부엌에 도착한 차우현이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약이 아니라 한도연이었다. 그녀는 차디찬 식탁 위에 널브러지듯 엎드려 있었다.

“엄마.”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차우현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제 입에서 발음되는 두 음절이 어색했다.

“잠깐만 일어나 보세요.”

이대로 두면 고용인이 어련히 알아서 발견하고 방에다 데려다줄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를 깨우고 싶었다. 왜 그런지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생일이 지난 지 몇 시간 안 된 사람의 변덕인가 보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 일어….”

“…그놈의 엄마 소리 좀 그만해. 소름 끼치니까.”

수분기 하나 없는 사막의 모래알을 연상케 하는 메마른 목소리. 분노가 어린 스산한 말투. 아. 이건 위험하다. 머릿속에서 적색 신호가 깜빡였다. 차우현은 본능적으로 한도연한테서 멀어졌다. 아니. 더 정확히는 멀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녀가 차우현의 손목을 움켜쥐는 속도가 더 빨랐다.

꽉 붙잡힌 손목이 그대로 쥐어짜지는 것만 같았다. 제대로 영양 섭취를 하지 못해 빼빼 마른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예 떨쳐 내지 못할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나이는 어려도 어쨌거나 차우현은 우성 알파였다. 거기다 남자아이였다. 힘을 준다면 이 정도쯤은 어렵지 않게 떨쳐 낼 수 있었다. 힘이 세 봤자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매일같이 술을 퍼마신 뒤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는.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

하지만 차우현은 그 손을 떨쳐 내지 않았다. 한도연한테 자신의 손목을 내어 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차우현이 기억하는 한 7살 여름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렇게나 한도연과 가까이 붙어 있는 건. 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던 한도연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해 준 것도. 그래서 엄마라 부르지 말란 모진 얘기를 들어도, 대놓고 소름 끼친다는 소리를 들어도, 차우현한테는 지금 이 순간이 특별하고 소중했다.

“우성 알파라 좋니? 네가 그 더럽고, 이기적이고, 추잡한 차 씨 집안 핏줄인 거 인정받아서 행복해?”

스르륵, 한도연의 상체가 힘겹게 위로 올라왔다. 빗발 선 붉은 눈이 차우현한테로 향했다. 원망스럽다는 듯이 노려보는 형형한 눈. 차우현은 그저 침묵했다. 한도연이 자신한테 이러한 폭언을 쏟아 내는 이유가 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해 줄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차우현의 침묵에 한도연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야차처럼 변하는 그 얼굴에서 차우현은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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