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38화 (38/71)
  • 38화

    6년 전, 그날의 진실이 꾸물꾸물 기어 나와 한도연을 끌어내렸다. 어둑한 심연 속으로.

    노팅이 되지 않아 병원을 찾은 날. 사실 차태민은 결혼 이후로 이상해진 제 몸 상태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도연의 페로몬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 달콤하면서도 짙은 꽃 내음을 맡을 수가 없었다. 검사 결과, 차태민은 이제 우성 알파가 아니었다. 베타였다.

    갑자기 형질이 바뀐 건 ‘젠더체인지’ 때문이라고 했다. 젠더체인지는 오메가와 알파 중 약 0.1%에서만 나타나는 아주 희귀한 케이스로 제2의 성이 발현됐는데도 이후 제3의 성이 한 번 더 나타나는. 그러니까 일종의 변이였다. 워낙에 그 비율이 낮긴 하지만 지금껏 학계에 보고된 결과를 살펴보면 오메가보단 알파가, 10~20대 청년층보단 30대부터 60대 중장년층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하필이면 차태민이 딱 그 경우였고.

    박 원장은 그 소식을 곧바로 차 회장한테 전달했다. 차 회장이 차태민을 서재로 호출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긴장감으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차 회장의 뒤에 있는 커다란 책장이 그대로 쓰러져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차태민은 감히 차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지은 사람처럼. 사실 죄지은 사람이 맞았다. 이 집안에서 알파가 아닌 건 죄였다. 그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

    “네 처도 아냐?”

    한심한 새끼. 나가 죽어. 너는 오늘부터 우리 집안사람이 아니다.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에 그제야 차태민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대답. 차 회장이 짧게 재촉했다. 차태민이 얼른 입을 열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요. 모릅니다. 차 회장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인공수정 하자고 해. 그리고 너는 묶어라. 어차피 알파도 낳지 못하는 씨 같은 건 필요 없으니. 수술 날짜 이미 잡아 놨다.”

    갑자기 하게 된 정관수술 같은 건 중요치 않았다. 인공수정. 인공수정이라니? 나랑은 인공수정을 해 봤자 알파 아이는 낳을 수 없을 텐데. 그럼 대체 무슨 인공수정을.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갔을 때였다. 순간 말도 안 되지만.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라면 능히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떠올랐다. 차 회장의 날카로운 눈이 묘하게 빛을 띠며 번들거렸다.

    “박 원장한테 내 피로 검사해 보라고 시켰다. 무려 90%라는구나. 태어날 아이가 우성 알파로 발현할 확률이.”

    “…아버지.”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전 못해요. 도연이한테 그런 짓 할 수 없어요. 떠오른 말은 그저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차태민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목에 붉은 자국이 있는 남자가 그런 차태민을 무감하게 내려다보았다. 차태민은 고개를 들어 이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그 남자와 꽤 오랫동안 눈을 맞췄다. 남자의 이름은 차연민. 이 미친 집안에서 알파로 발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죽은. 아니, 죽음으로 내몰린 진짜 장남이었다.

    차태민은 이 집안의 차남이었다. 단지 제 위에 있던 형이 죽으며 장남이란 이름을 물려받게 된 것뿐이었다. 차연민은 베타였다. 알파로 발현할 확률이 60% 이상이었지만 결국엔 발현하지 못했다.

    제 첫째 아들이 베타란 사실에 차 회장은 분노했다. 그 아래에 있는 차태민과 차민정, 차재민이 차례로 알파 판정을 받으면서 그 분노는 오히려 거세졌다. 알파 집안에 생긴 베타 장남. 유일한 옥에 티. 차 회장한테 있어 차연민은 더러운 오점이자 얼룩이었다. 가능하다면 제 인생에서 지워 내고 싶은.

    12살. 젠더 검사에서 베타로 판정받은 뒤 차연민의 존재는 집안에서 지워졌다. 차 회장은 차연민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공기 중의 부유물보다도 못하게 취급했다. 그런 차연민을 유일하게 아는 체하고 형으로 대한 게 차태민이었다. 물론 차 회장이 무서워서 그 앞에서는 똑같이 차연민을 무시하고 모르는 척했지만.

    차태민은 다정한 제 형이 좋았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얘기하면 아버지와는 다르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큰 손이. 부드럽게 지어 주는 미소가. 태민아. 정답게 불러 주는 이름이 듣기 좋았다. 하지만 도를 넘은 폭언과 때때로 행해지는 잔인한 폭행 속에서 차연민은 점차 바스러져 갔다. 마른 낙엽처럼. 생명력을 잃고서.

    그는 결국 스물을 목전에 두고 자살했다. 차태민이 16살, 차민정이 14살, 차재민이 13살 때의 일이다. 차 회장의 생일날, 모두가 잠든 캄캄한 밤. 그는 그동안 저를 갉아먹어 온 악마의 서재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유서도 뭐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버지의 생신에 그의 서재에서 목 매달아 죽은 아들. 제 목숨을 팔아 아버지에게 내린 단죄였다.

    그러나 차연민은 차 회장이 그런 것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인간, 아니,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는 걸 기억해야 했다. 차 회장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약간의 미안함이나 죄책감. 그 정도를 바라는 것조차 베타인 차연민에게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차 회장은 웃었다. 그것도 속이 후련하다는 듯 환하게.

    “네놈이 태어나 가장 쓸모 있는 일을 했구나.”

    저게 혀를 길게 내빼고 말라비틀어진 장남의 시체를 앞에 두고 차 회장이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차연민의 자살은 수능을 앞두고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어느 대기업 후계자의 슬픈 죽음으로 포장되었다.

    차연민의 필체로 유서가 꾸며졌다. 저는 무능하고 부족한 제가 너무 밉고 싫어요. 저는 패배자예요. 저는 너무나도 나약해요. 이런 저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고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너무 한심해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CH 오너 일가에 관한 내용은 단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모든 비난과 분노와 미움은 오직 차연민 스스로에게만 향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죽음에 큰 의아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차연민을 측은해했다. 그래. 그럴 만하지. 형제 중에 혼자만 베타였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아무래도 부담감이 컸겠지. 베타라는 이유만으로 차연민의 자살에는 정당성이 생겼다. 얼굴을 제외한 온몸에 교묘하게 새겨진 오랜 상처와 멍들은 발견되지 못하고 그대로 묻혔다. CH 일가의 선영(先塋) 한구석에.

    그때부터 차태민한테 있어 차 회장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감히 맞서 싸울 수 없는 괴물이었다. 제 아들이 자살한 서재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인간일 리가 없었다. 끔찍함과 두려움에 서재 앞도 제대로 지나다니지 못하는 자신과는 다른 종의 생명체였다.

    차태민은 꽤 자주 차연민의 꿈을 꿨다. 때때로 집 안에서 차연민의 환시를 보기도 했다. 붉은 자국이 목에 남은 남자가 제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태민아. 너도 언제든지 나처럼 될 수 있어. 그때마다 차태민은 제 방으로 달려가 두 눈을 꾹 감고 귀도 막은 채 도리질 쳤다. 아니야. 형. 싫어. 나는 싫어. 나는 형처럼 되고 싶지 않아. 난 살고 싶어. 진실로 차태민은 살고 싶었다. 불쌍한 형처럼 되지 않고 어떻게든 이 집안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차 회장의 기대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왔다. 평생을.

    “한도연하고 같이 병원 다녀와.”

    다정했던 형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간 그 공간에서 괴물이 말했다. 탐욕스러운 눈이 차태민을 압박했다. 형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서는 차태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예. 아버지.”

    그 순간 차연민이 뚝 아래로 떨어졌다. 차태민은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도 주먹을 꽉 쥔 탓에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어 갔다. 자신은 여전히 괴물을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날 속였다고? 고작 그 이유 때문에? 당신 형이 그러고 죽어서? 그런 당신의 행동이 날 죽인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도연아. 고작 그런 이유가 아니야. 아버지는 달라.”

    차태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광신도의 맹목적인 믿음과도 같은 것이 묻어났다. 절대적인 공포에 의해 학습된 두려움. 그게 그가 가진 믿음의 밑바탕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깨지지 않을 견고한 주춧돌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역겹고 불쾌해서 한도연은 주저앉은 상태에서 뒤로 몸을 물렀다. 차태민이 손을 뻗어 그런 한도연의 손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우리가 살려면 어쩔 수 없었어. 아버지 뜻을 거슬렀다간 나도 너도 어떻게 될지 너무 뻔하니까. 우성 알파로 발현할 확률이 90%라는데 아버지가 포기하셨을 리 없어. 나는 우리를 지키려고 그런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최선? 당신 지금 최선이라고 그랬어?”

    한도연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차태민이 엄지로 한도연의 손등을 위로하듯 문질렀다. 토기가 치솟아서, 한도연은 그 손을 매섭게 쳐냈다.

    “네가 감히 어떻게 최선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

    “도연아.”

    “당신이 말한 최선이 나를 당신 아버지의 부인으로 만드는 거였어?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니? 정말로 그래?”

    차태민이 무릎걸음으로 조금 가까이 다가왔다. 여보. 그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왔다. 한도연이 시린 눈으로 차태민을 노려봤다.

    “내가 왜 당신 여보야. 엄마면 또 모를까.”

    안 그래? 잔뜩 일그러진 얼굴 위로 이죽거리는 비웃음이 지어졌다. 도연아. 제발 그러지 마.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죽일 놈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차태민의 뺨이 눅눅하게 젖어 갔다. 울음 섞인 사과가 6년 만에야 전해졌다. 하지만 그 사과는 갈 곳을 잃었다. 한도연은 이 남자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니 차태민의 사과는 어디까지나 혼잣말에 불과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