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건 타고난 피로 계급 나누기를 좋아하는 알파들의 세계에서조차 보기 힘든, 무척이나 특이한 구조였다. 아무리 회사의 주요 임원이라고 해도 CH그룹처럼 열성 알파 하나 없이 전부 우성 알파로만 구성된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토록 견고하게 유지된 정신을, 한도연이라고 피해 갈 리 없었다. 차성진의 말에 따라 한도연은 차태민과 함께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았다. 2세의 발현 확률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서 발현될 수 있는 형질을 높은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이랬다. 열성 알파, 열성 오메가, 우성 오메가, 우성 알파.
검사지에는 각각의 형질마다 최대치를 100으로 환산했을 때 아이의 발현 가능성이 수치화되어 표시되어 있었다. 대개 열성 알파로 발현하게 될 확률은 80%가 넘어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우성 알파의 경우는 단 60%도 넘기기가 힘들었다. 최대치가 70%라고 보면 됐다. 심지어 최대치를 찍어도 남은 30~40%의 선을 넘지 못하고 우성 알파가 아닌 열성 알파로 발현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성 알파의 수가 적은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이 받은 검사지에는 66%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최대치인 70%에 가까운, 적지 않은 확률이었다. 그걸 본 차성진은 둘의 결혼을 허락했다. CH그룹의 장남 차태민과 ‘국민 첫사랑’ 한도연의 결혼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이슈였다. 두 사람은 세간의 축하를 받으며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것이었다. 그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태민 쪽에서 일이 벌어졌다. 어째서인지 노팅이 되지를 않았다. 임신에 노팅이 필수적인 건 아니라지만 임신 확률을 높여 주는 건 맞았다. 거기다가 알파가 노팅이 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병원에서는 차태민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며 아무래도 자연 임신은 힘들 것 같단 얘기를 했다.
그 무엇보다도 핏줄이 중요한 CH그룹이었다. 아이를 낳지 않고 살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차태민은 한도연한테 인공수정을 권했고 그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아이가 우현이었다. 수정 과정부터 탄생까지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만큼 더 애틋하고 귀하고 예뻤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고생하며 만들어 낸 더없이 소중한 결실이었다. 어째서인지 차태민은 그 결실을 눈에 띄게 어색해하고 데면데면해했지만.
“날 살려 주지 않으면 포수가 빵! 쏜대요.”
한도연의 저 한마디에 스탠드 불빛이 내려앉은 방 안은 단번에 숲속의 작은 초막집으로 변했다. 차우현은 어느새 사냥꾼한테 쫓기는 가여운 토끼를 숨겨 주는 작은 초막집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한도연이 다급하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평화롭던 공기가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금방이라도 무서운 사냥꾼이 들이닥쳐 도망치는 토끼를 보지 못했냐며 초막집의 나무 문을 힘차게 두드릴 것만 같았다. 그 전에 어서 숨어야만 했다. 차우현은 얼른 한도연을 따라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 살짝 들뜬 이불 틈으로 조금씩 스탠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숨을 뱉을 때마다 이불 안으로 후텁지근한 공기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꼭 작고 좁은 토끼 굴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답답하고 불편한데 오히려 그래서 더 안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하. 아하하하.”
차우현이 한도연을 쳐다보며 밝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도연이 그런 차우현을 향해 은근히 눈짓했다. 이젠 네 차례라는 뜻이었다. 그 행동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차우현이 조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시작은 한도연이 해도 동요를 끝마치는 건 언제나 차우현의 몫이었다.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차우현은 조곤조곤 동요의 마지막 소절을 불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속삭이는 것에 더 가까운,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하아암.”
곧이어 차우현의 입에서 긴 하품이 새어 나왔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자기 졸음이 몰려들었다. 버거우리만큼 무거워진 눈꺼풀 앞에서 어린아이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차우현은 손등으로 몇 번 눈가를 비비다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스르륵 두 눈을 감았다. 한도연은 그제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슬쩍 걷어 냈다.
“잘 자, 아들. 좋은 꿈 꿔.”
한도연은 매끈한 차우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굿나잇 인사를 건넸다. 피부로 전해지는 숨결이 간지러울 법도 하건만 우현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은 한도연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천천히 방을 빠져나갔다.
***
“역시 내 씨는 달라.”
한도연의 불행은. 더 나아가 차우현의 불행은 모두 저 말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차우현이 여섯 살쯤 되던 무렵의 일이었다. 차 회장은 또래에 비해 월등히 영특한 우현을 꽤나 예뻐했다. 아니. 예뻐한다기보다는 마음에 들어 했다. 그게 차 회장한테 있어서는 제법 대단한 일이었다. 아직 발현도 하지 않은 어린 생명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게.
차 회장이 흡족한 얼굴로 그 말을 했을 때, 한도연은 등줄기로 삐죽 소름이 돋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그건 본능이 외치는 경고 같은 것이었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런데 차 회장의 그 말이, 처음엔 그저 작은 눈송이 같았던 게 하루가 다를수록 커다란 눈덩이로 불어났다. 불안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서.
의심하면서도 이건 미친 짓이라 생각했다. 내가 돌았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가설을 세울 순 없는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힐난했다. 하지만 노팅이 되지 않던 차태민. 자연 임신이 힘들 거라는 말. 권하던 인공수정. 그 힘든 과정을 통해 낳은 아이한테 좀처럼 정을 붙이지 못하던 제 남편과 내 씨는 다르다는 차 회장의 말까지.
이 모든 게 한도연을 충동질했다. 의심의 심지에 불을 붙여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도연은 차태민을 몰아세웠다. 표정을 굳히고 애써 화를 억누르는 사람의 모습을 연기하는 건 쉬웠다. 가정을 꾸리며 그만뒀지만 그녀에게 연기는 숨 쉬는 것과도 같았다.
“당신. 솔직하게 말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오늘 박 원장 만나고 왔어. 그 사람한테 얘기 다 들었어. 6년 전 그 일에 관해서.”
박 원장은 CH병원의 의사로 CH 일가의 주치의였다. 그리고 한도연의 인공수정 전반을 지휘한 사람이기도 했다. 한도연의 입에서 나온 박 원장이라는 단어에 차태민이 멈칫했다. 눈에 띌 정도로.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제발. 한도연은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가느다란 희망 한 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 희망은 다음에 이어진 차태민의 말에 의해 한도연의 손을 떠났다. 텅 빈 손바닥을 펼쳤다. 희망이 있던 곳에 남은 건 이제 시커먼 절망뿐이었다.
“…도연아. 네가 무슨 얘기를 어떻게 들었는진 모르겠는데 일단 내 말도 좀 들어 봐. 응? 나한테도 말할 기회를 좀 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연기 따위는 필요 없었다. 한도연은 온몸으로 분노하고, 좌절하고, 화냈다. 핏기 없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투명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도연아. 그게 우리를 위한 선택이었….”
“닥쳐!”
마르고 흰 손이 허공을 갈랐다. 한도연의 손바닥과 차태민의 뺨이 마찰했다. 꽤 큰 타격음과 함께 차태민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충격에 빠진 몸은 스스로 만들어 낸 타격에도 버티질 못했다. 아이를 낳았어도 여전히 여리기만 한 한도연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차태민이 얼른 손을 뻗어 그런 한도연의 허리를 붙잡았다.
“이거 놔아!”
새된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한도연은 악다구니를 쓰며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네가 지금 감히 누굴 잡아. 그 더러운 손 치워. 당장 치우지 못해? 이거 놓으란 말이야! 한차례 몸싸움 같은 것이 지속됐다. 발버둥 치는 한도연과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는 차태민의 사이에서. 온몸에 힘이 빠진 한도연이 곧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차태민은 한도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것도 양쪽 무릎을.
“미안해. 도연아. 너한테 할 말 없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사람인 거 알아. 그거 다 아는데…. 근데 그게 정말 우리를 위한 선택이었어. 아버지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 내가… 내가 하필이면 젠더체인지 같은 걸 겪는 바람에…. 미안해. 너한테 못 할 짓 해서 너무 미안해.”
“그게 뭔데?”
“…어?”
“젠더체인지. 당신이 방금 말한 그거. 그게 뭐냐고.”
넋이 나간 듯 멍하고 퀭한 물음들이 이어졌다. 한도연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차태민은 당황했다. 당신 이미 박 원장한테 다 들은 거 아니야? 그 말에 한도연이 픽 헛웃음을 흘리며 실소했다. 물에 젖은 탁한 눈이 차태민을 멀거니 응시했다.
“내가 들은 건 당신 아버지, 그 노인네가 한 말밖에 없어.”
“….”
“당신 아버지가 그러더라.”
역시 내 씨는 달라. 씹어뱉듯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가 선득했다. 한도연의 눈가를 타고 다시 한번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아. 차태민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당신은 몰랐던 거구나. 아무것도 몰랐고 그저 아버지가 하는 소리를 들어서. 그것 때문에 뭔가를 눈치채고 일부러 내 앞에서 연기를 한 거였는데…. 근데 내가 바보처럼 내 입으로 술술 다 말한 거였구나.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알아챈 차태민이 푹 고개를 숙였다. 더는 속일 수 없었다. 무의미했다. 잠시 숨을 고른 차태민이 용기 내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