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36화 (36/71)

36화

황급히 뒤를 돈 고결이 도어락 위로 손을 올렸다. 집 밖으로 나가려면 도어락을 풀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5년간 본가보다 이 집에 더 자주 들락거렸다. 그런데 우습게도 어떤 버튼을 눌러야 도어락이 풀리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말 단 하나도.

빨리. 빨리 좀. 제발. 고결은 이를 악문 채 눈에 보이는 버튼을 마구잡이로 눌러 댔다. 그런데 그 순간, 익숙한 체취와 온기가 등을 훅 덮쳐 왔다. 그와 동시에 단단한 팔뚝이 감싸듯 허리를 휘감았다.

“결아.”

뒤에서 고결을 끌어안은 차우현이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견고한 차우현의 상체와 조금 마른 고결의 등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예고도 없이 우현의 품 안에 갇히게 된 고결은 그저 어깨만 잔뜩 움츠렸다. 몸이 굳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몽롱하게 취한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고개를 숙인 차우현이 고결의 어깨 위에다 자신의 이마를 툭, 힘없이 가져다 댔다. 그 작은 무게감에도 고결은 크게 움찔거렸다. 돌아가는 상황은 비현실적인데, 우현과 맞닿은 곳에서 전해지는 감각만큼은 필요 이상으로 현실적이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 버릴 거야? 결이 네가 오메가로 발현해서?”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팔에 은근히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까매졌다 다시 환하게 돌아왔다. 물에 푼 휴지처럼 흐물흐물해졌던 정신이 돌아온 건, 그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형, 왜…. 대체 왜 그렇게 말해요. 울고 싶었다. 나 버릴 거야? 라니. 그건 우현이 할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우현한테 해야 할 말이었다. 오메가인 내가 형 옆에 있어도 되는 거냐고. 그런 날 옆에 둬 줄 수 있냐고. 날 버리지 않을 거냐고. 자신이 매달려야 했다. 이렇게 우현이 매달리듯 간절하게 말하면.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알파고 결이 네가 오메가여도 우리 사이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넌 여전히 너고, 나는 나야.”

“…형.”

“우리는 우리야.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까득. 고결은 힘주어 어금니를 물었다. 애써 돌아온 정신은 우습게도 우현의 입에서 나온 영원이라는 단어 하나에 다시 아득해져 갔다. 이런 건 반칙이었다. 우현이 이러면 믿고 싶어졌다. 영원이라는, 지켜질 수 없을 걸 알아서 더 달콤한 그 단어를 그냥 덥석 믿어 버리고만 싶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고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차우현의 팔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러자 차우현이 기다렸다는 듯 고결의 어깨에다 더욱더 깊게 이마를 묻었다. 전해져 오는 온기와 체취와 무게와 숨결이 빠르게 이성을 녹여 갔다. 알파니, 오메가이니 하는 단어들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 고결한테 남은 건, 우현의 말 하나뿐이었다. 우리는 우리라는 그 말.

-5. 거짓-

어린 시절의 차우현은 책 읽기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밤이 되면 꼭 놀이방으로 가 책장에서 동화책을 꺼내 읽었다. 자기 전 으레 하는 혼자만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책을 읽고 있노라면 누군가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차우현은 그 방문객이 누구인지 알았다. 이 시간에, 이 방에 찾아올 사람이라곤 한도연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녀가 방문했다는 건,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 한단 뜻이었다.

“우현아, 이제 자러 가야지.”

한도연의 부름에 차우현은 망설임 없이 보고 있던 동화책을 원래 자리에다 꽂아 넣었다. 좀처럼 떼쓰는 법이 없는 의젓한 아들이었다. 한도연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차우현은 그 희고 가느다란 손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발맞춰 나란히 우현의 방으로 걸어갔다. 단정한 걸음걸이 덕분에 슬리퍼 천과 바닥이 스치는 작은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아들, 그럼 불 끌게.”

차우현이 침대 위에 눕는 걸 보고 나서야 한도연이 벽면의 스위치로 손을 뻗었다. 달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방 안 가득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미 방 구조에 익숙한 한도연한테 어둠 같은 건 이렇다 할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도연은 익숙하게 침대로 다가갔다.

차우현의 옆에 모로 누운 한도연이 팔을 굽혀 제 머리 아래에 끼워 넣었다. 자신이 낳은 생명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서는 깊고도 짙은 애정이 묻어났다. 우현은 한도연을 따라 옆으로 돌아누웠다.

차우현은 제게 쏟아지는 애정 어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건 사랑받는 법을 알고 또 사랑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당시의 차우현은 그런 것에 익숙했다. 그런 걸 익숙하게 여길 수 있는 삶을 살았다.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슬금슬금 해사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지어진 웃음이었다. 시원스레 쏙 말려 올라간 입꼬리와 사랑스럽게 휘는 곡선의 눈매가 신기하리만큼 똑같았다.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는 스탠드 불빛. 그보다 몇 배는 더 환하게 빛나는 한도연의 따스한 눈동자. 포근하고 푹신한 이불과 베개까지. 우현을 감싼 주변의 모든 것들은 더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우며 아늑했다. 여느 아름다운 동화 속 삽화의 한 장면으로 들어가도 무리가 없을 만큼 완벽한 그림이었다.

“우리 아들. 오늘은 뭐 듣고 싶어?”

한도연이 차우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맞닿은 손길은 다정하고 귀에 닿는 목소리는 나긋했다.

“그거요. 그거 불러 주세요. 토끼랑 작은 집 나오는 동요요.”

우현은 숨도 쉬지 않고 단번에 대답했다. 우현의 두 눈이 기대감으로 인해 초롱초롱 빛났다.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투명한 유리창과도 같은 눈이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한도연이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또 그거야?”

한도연의 말끝에서 미처 지우지 못한 웃음기가 옅게 묻어났다. 차우현은 대답 대신 고개만 위아래로 힘차게 끄덕거렸다. 그 고갯짓을 본 한도연이 살짝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곤 이내 잔잔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러 나갔다.

“숲속 작은 집 창가에 작은 아이가 섰는데.”

이제는 너무나 오래된. 아니. 오래되다 못해 낡고 바랜 기억이었다. 그래서 차우현은 그녀가 제게 불러 준 동요를 정확하게 다 기억하지는 못했다. 다만 노래를 불러 주던 목소리가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는 것. 그리고 노래를 부르다 말고 별안간 실감 나게 연기를 해 주던 모습이 몹시 신기하고 재미있었다는 것. 이 두 가지만큼은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날 좀 살려 주세요. 날 좀 살려 주세요.”

차분하게 노래를 불러 나가던 한도연이 갑자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 칭송받던 사람이었다. 19살에 로맨스 영화로 데뷔한 한도연은 ‘국민 첫사랑’이란 별명을 얻으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바야흐로 한도연 신드롬의 시작이자 대한민국 연예계의 큰 반향이었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한도연이 스크린에 잡힐 때마다 극장 안에는 감탄사 비슷한 것이 흘렀다. 그게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한도연은 연기까지 잘했다. 이십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여배우로서 선뜻 도전하기 힘든 다양한 배역에 도전하며 대중들에게 자신의 능력치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녀는 매해 어떤 시상식에서든 트로피를 하나 이상씩 꼭 거머쥐었다. 거의 맡겨 놓은 상을 찾으러 가는 수준이었다. 대체 불가능한 여배우의 탄생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돌연 은퇴 선언을 했다. 자신이 쌓아 온 모든 커리어를 포기하며. 사람이 이토록 극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그에 걸맞은 큰 계기가 필요했다. 그녀한테 있어 그 계기는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다 놓아도 괜찮을 만큼. 그게 CH그룹의 차남 차태민이었다.

차태민과는 CH그룹에서 후원하는 한 자선 단체의 기부 행사에서 만났다. 그 누구보다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거기다 우성 알파. 막연히 무섭고, 오만하고, 딱딱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연예계 생활을 하며 봐 온 알파들은 대개 그랬으니까. 그런데 실제 차태민은 한도연의 예상과 달랐다.

차태민은 매너 좋고 다정한 남자였다. 대화도 잘 통했다. 대화 중간중간 조용히 웃는 얼굴이 꼭 초승달 같았다. 안으로 움푹 들어간 그 얇고 환한 곡선에 기대 눕고 싶단 생각을 했다. 달이 기울듯 마음도 기울었다. 사랑은 그렇게 순식간에 시작됐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검사부터 받고 오거라.”

결혼 허락을 받으러 차태민의 집을 찾았을 때 가장 처음 들은 말이었다. CH그룹의 제5대 회장이자 차태민의 아버지인 차성진은 DNA에 새겨진, 타고난 형질의 우수함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CH E&C란 건설 회사를 CH그룹이란 기업으로 만든 제1대 故차현석 회장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구한 정신이기도 했다.

‘본사에는 알파만을 들일 것.’

‘거기서도 가장 높은 자리는 가능한 우성 알파들로만 채울 것.’

故차현석 회장이 세운 회사 운영 방침 두 가지였다. 이는 CH 오너 일가가 오랜 시간 동안 은밀하게 계승해 왔다. 사실 ‘은밀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무색하게 본사 핵심 인물들이 모두 우성 알파인 것만 봐도 대강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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