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결이야. 고결?”
몇 번 더 이름을 불렀으나 고결의 반응은 똑같았다. 바로 옆에 있는 우현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에 차우현의 한쪽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제 존재감을 지운 결이라니.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상당히 거슬렸다. 한 손으로 열림 버튼을 누른 차우현이 상체를 틀어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고결의 눈앞에다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별안간 시야가 우현의 얼굴로 가득 찼다. 깜짝 놀란 고결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본 차우현이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고결이 늘 봐 오던 수려하고도 화사한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문 열렸어. 이제 내리자.”
고결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대리석이 깔린 깔끔한 복도가 보였다. 그러나 고결은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그 상태로 느리게 눈만 깜빡거렸다. 별안간 가까이 다가온 우현의 얼굴에 원래도 없던 정신이 아예 통째로 날아가 버려서 그랬다.
“안 내릴 거야?”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가볍게 귓가를 두드렸다. 고결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우현의 손을 보고 나서야 무언가에 쫓기듯 허둥지둥 복도로 나갔다. 대체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지. 얼굴로 확 열이 몰렸다. 민망하고 창피해서 우현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형.”
“아니야. 죄송할 게 뭐 있어. 그럴 수도 있지.”
고결은 뒤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현을 향해 얼른 사과했다. 다정하게 대꾸한 차우현이 고결의 옆에 나란히 붙어 섰다. 고결은 의식하며 다리를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게 우현과 거리를 벌려 서게 될까 봐 신경이 쓰였다.
널찍한 복도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정숙했다. 들리는 거라고는 마치 한 사람이 걷는 것처럼 딱딱 들어맞는 발걸음 소리가 전부였다. 펜트하우스라 이 층을 사용하는 건 우현 혼자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결은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한숨을 꾸역꾸역 안으로 삼켜냈다. 오늘따라 복도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우현의 집까지 가는 길이 유독 멀게만 느껴졌다.
“근데 결이 너 요즘 무슨 고민 있어?”
“…네? 고민이요?”
“응. 요즘 들어서 좀 자주 그러는 것 같아서. 물건도 막 빠트리고 다니고. 원래 그런 건 내 전문인데.”
차우현이 조금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고결은 애써 입술을 당기며 웃는 얼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자신의 얼굴이 우현의 눈에는 평소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 건 아닌데… 나이가 들어서 자꾸 깜빡깜빡하나 봐요.”
고결이 던진 실없는 농담에 우현이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조용한 복도 위로 우현의 낮은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그럼 난 어떡해? 난 나이 먹기 전에도 계속 그랬는데. 이러다 서른 되면 집도 못 찾아오는 거 아니야? 하긴, 결이 네가 이렇게 매일 집까지 데려다주니까 그래도 별 상관은 없겠다.”
그렇지? 차우현이 고결한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더 이상 형과 같이 일하지 않을 거란 얘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집까지 따라온 날. 하필 그런 날 듣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물음이었다. 고결은 차마 빈말로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딱히 대답을 듣기 위해서 던진 질문은 아니었던 건지. 아니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우현은 거기에 대해 뭐라 더 말을 잇지 않고 현관문 앞에 섰다.
“내일 오후 스케줄이라 좀 여유롭지? 우리 뭐 할까? 결이 너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차우현이 도어락에다 카드키를 가져다 대며 물었다. 옆쪽으로 살짝 비켜 서 있던 고결은 그 물음에 입안의 여린 살만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래도 우현은 자신이 당연히 여기에서 자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오늘처럼 집까지 같이 올라온 날이면 늘 그래 왔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뇨. 저 집으로 가려고요.”
“그래? 그럼 아까 나 내려 주고 바로 가지. 피곤할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올라왔어. 같이 안 와 줘도 되는데.”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따라왔는지도 모르고 저런 식으로 배려해 주는 우현의 행동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고결은 나약해지려고 하는 자신의 마음을 힘겹게 다잡았다. 오늘은 반드시 말해야 했다. 어차피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 끝을 보는 게 두렵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 봤자 서로한테 좋을 것이 없었다.
띠릭. 전자음과 함께 도어락이 해제되고 현관문이 열렸다. 우현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우현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고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형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응? 할 말?”
차우현이 뒤를 돌았다. 고결은 우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티 나게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순식간에 차우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일 뿐이었다. 차우현이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두 눈을 접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얼른 들어와. 들어가서 얘기하자.”
신발을 벗으면 바로 갈아 신을 수 있도록 현관 앞에 나란히 놓여 있는, 사이즈만 다른 두 개의 실내용 슬리퍼. 당연히 큰 쪽은 우현의 것이었고, 작은 건 결의 것이었다. 먼저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우현이 옆으로 살짝 물러서 공간을 만들었다. 결이 너도 어서 갈아 신으라는 것처럼. 하지만 고결은 신발을 벗지 않았다.
우현의 얼굴을 오래 보고 있기가 불편했다. 마주 앉는 건 더더욱 그랬다. 비겁하지만 그냥 이렇게 현관에 서서 할 말을 쏟아 낸 뒤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기껏 생각해 낸 차선이라는 게 겨우 이거였다. 고결은 손끝이 저릴 정도로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손톱이 파고들며 홧홧한 열기와 함께 통증이 번져 나갔다.
진즉 이렇게 됐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우현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욕심으로, 그 이기심으로 여기까지 질질 끌고 왔다. 그러니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했다. 계약 조건뿐만 아니라 재계약 조건까지 자신과 함께 일하는 걸 1순위로 내건 사람한테 이 이상의 잘못을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비겁하게 유예하고 있던, 끝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 덮어 두고 있던 이 미련한 시간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을 때였다.
“형. 이번에 Z가 일본 프로모션 때문에 매니저가 더 필요하다는데 저 그거 따라가고 싶어요.”
“잠깐… 잠깐만. 결아, 나 지금 좀 당황스러워서….”
많이 놀라긴 한 건지 우현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의 무게를 버틸 수가 없었다. 고결의 고개가 또 한 번 아래로 떨어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저 깊은 수면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호흡이 가빴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를 않았다.
“…Z면 그 그룹이지? 결이 너랑 친한 민호라는 애 있는. 혹시 걔 때문에 그러는 거야? 걔랑 같이 일하고 싶어서?”
아무래도 우현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우현을 두고 소속 변경을 생각할 만큼 민호와 친하다고. 하긴. 요즘 들어 민호와 통화도 부쩍 자주 하고 수시로 메시지도 주고받았으니 그런 오해를 해도 이상할 게 없긴 했다.
“아뇨. 그건 아니고요. 저 벌써 연차는 5년이나 됐는데 실무 경험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요. 이번 기회에 아이돌 그룹도 좀 맡아 보고 싶어요.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그게 좋은 선택일 거 같아요.”
긍정하려면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속 변경의 이유로 내세우기에는 너무나도 가벼웠다. 고결은 고개를 내저은 뒤 미리 생각해 둔 그럴싸한 이유를 댔다.
“…그거 지금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일하겠다는 소리야?”
머리 바로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낮고 또 묵직했다. 차마 우현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고결은 고개를 숙인 상태로 힘겹게 긍정의 대답을 꺼1내 놓았다.
“네.”
“거짓말.”
두 개의 말이 거의 동시에 허공에서 부딪혔다. 거짓말? 깜짝 놀란 고결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퍼뜩 위로 올렸다. 우현이 쉽게 이해해 준다거나 갑자기 왜 그러냐며 당황하는 것까진 생각했다. 이런 반응은 정말 예상외였다.
고개를 든 고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우현의 얼굴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픔을 억누르는 것 같기도 한.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묘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고결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감히 되묻지도 못했다. 저런 얼굴을 한 우현은 처음이라 상당히 낯설었다.
“진짜 그 이유로 소속 옮기려는 거야? 다른 이유 있는 거 아니고?”
“다른… 이유라뇨?”
“결이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잖아.”
쿵.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심장이 발치로 떨어졌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설마 진짜로 알고서 하는 말인 건가? 언제부터? 알고 있는 거라면 대체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아니. 그전에 그걸 어떻게 알아 낸 건데. 뭐라도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우현이 어떤 대답을 할지 그걸 듣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혀, 형. 저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볼게요. 집 가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 어, 그럼 쉬세요.”
태어나서 처음 말해 보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형편없이 덜덜 떨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내뱉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봤다.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