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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34화 (34/71)
  • 34화

    하지만 같은 층을 쓰고 있는 홍보 마케팅 본부는 그렇지 않았다. 언론 보도와 영상 제작, 광고 등 하는 일이 많다 보니 그만큼 사람도 많았다. 거기다 그 많은 사람이 전부 자기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남윤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앉은 최은주 과장이 안 그런 척, 이쪽을 힐끔거렸다. 방금 전, 남윤의 말을 토대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게 틀림없었다. 회사란 워낙에 소문이 빠르게 도는 곳이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알게 될 소식이지만 그래도 미리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확정이 된 후 소문이 나는 것과 그 전에 소문부터 떠도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네. 회의실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따라 들어와.”

    남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회의실로 걸어갔다. 고결은 남윤의 뒤를 따르다 말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미어캣처럼 파티션 위로 고개를 쭉 내밀고 있던 최은주와 눈이 마주쳐서 그랬다.

    당황한 최은주가 티 나게 눈동자를 굴렸다. 고결은 살짝 웃으며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건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던 최은주가 작게나마 손을 흔들곤 이내 파티션 아래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 행동이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그냥 좀 귀엽게 느껴졌다.

    “여기 앉아.”

    회의실로 들어간 남윤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고결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고 앉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회사까지 온 거야? 설마 그만둔단 얘기하려는 건 아닐 거고.”

    남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반은 농담, 반은 혹시나 싶어 떠보는 행동이었다. 나름 사회생활 경력이 있는지라 그 정도는 요령껏 알아챌 수 있었다.

    “이번에 Z 일본 프로모션 때문에 사람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어어. 맞아. 왜? 혹시 결이 씨 주변에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도 있어? 안 그래도 지금 딱히 내부에 노는 인력이 없어서 사이트에다 공고 올릴까 했는….”

    “그거 제가 가겠습니다.”

    “…응?”

    “저 보내 주세요. 실장님.”

    남윤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작게 헛웃음을 흘린 남윤이 에이, 하며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마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하냐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결이 씨가 일본을 어떻게 가. 동윤 씨처럼 담당 아티스트가 작품 끝내고 휴식기에 들어간 거면 또 몰라. 우현 씨는 내년까지 스케줄 꽉 차 있잖아. 그런데 매니저가 자리를 비우면 되겠어? 그러려면 아예 소속을 옮겨야지.”

    “네. 그래서 옮기려고요.”

    “뭐어?”

    고결의 즉답에 남윤이 황망하게 되물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믿지 못하겠단 태도였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케어할 대상을 우현에서 Z로 바꾸겠다고 말한 것뿐이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었다. 다른 매니저들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저만 지금까지 로테이션 한 번도 안 돌았잖아요. 이번 기회에 소속 옮겨 보려고요. 저 Z랑 같이 일해 보고 싶습니다.”

    고결은 차분한 어투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남윤이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 잠깐만. 내가 지금 좀 너무 놀라서…. 결이 씨, 지금 이거 우현 씨랑 협의된 사항이야? 우현 씨가 그렇게 하래? 그래도 된대? 난 우현 씨한테 아무 얘기도 못 들었는데?”

    뭔가 이상한 말이었다. 매니저가 바뀔 때 해당 연예인한테 언질이야 줄 수 있었다. 그건 기본 매너였다. 하지만 해당 연예인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매니저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매니저와 관련된 권한은 엄연히 매니지먼트 본부에 있었다. 따지고 보면 연예인도 회사에 소속된 직원일 뿐이었다. 아무리 우현이라고 해도 회사의 대표이사는 아닌데, 그런 결정권까지 손에 쥐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게… 우현이 형의 허락이 먼저 필요한 일인 건가요?”

    고결이 의아함을 담아 묻자 남윤이 대번 큰 소리로 답했다.

    “당연하지! 그게 우현 씨 계약 조건….”

    기세 좋게 입을 열 땐 언제고 남윤이 티 나게 말끝을 흐렸다. 그것도 모자라 고결의 눈치를 살살 살피기까지 했다. 난감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누가 봐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 반응이었다.

    “조건이라뇨?”

    “…아이고. 내가 너무 흥분해 가지고 그만 말실수를 해 버렸네.”

    남윤이 고결의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볼을 긁적거렸다. 더 캐묻지 말고 이대로 그냥 넘어가 주길 바라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고결은 그렇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들은 걸 듣지 않은 거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쉽게 물러서지 않을 거란 의지가 드러났다. 그에 남윤이 일 났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했네. 망했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저런 말을 웅얼거리기도 했다.

    “…저기, 이거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말고 꼭 결이 씨 혼자서만 알고 있어야 해? 응? 알겠지?”

    안 그러면 자기 진짜 큰일 난다며 남윤이 재차 부탁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며 표정이 간절했다. 그래서 고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으면 절대로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하. 그러니까 그게….”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남윤이 갑자기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회의실에는 단둘뿐인데 누가 엿들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건지 목소리도 잔뜩 낮췄다.

    “나야 그때는 이 회사에 없었으니까 전해 들은 얘기지만 처음에 우현 씨가 우리랑 계약할 때 내건 조건이 그거였대. 자기가 원하는 매니저 데려오게 해 달라고. 그 사람이랑 쭉 일할 수 있으면 이 회사랑 계속 계약하겠다고.”

    처음 듣는 얘기였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갔다. 고결은 테이블 아래로 애꿎은 주먹만 세게 말아 쥐었다. 매번 자신만 로테이션을 돌지 않기에 우현이 무슨 얘기를 했을 거라는 건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자신과 일하는 게 편하니까 매니저는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마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설마하니 회사랑 계약을 할 때부터, 그것도 모자라 재계약 조건으로까지 자신을 내걸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튼 나는 입사할 때부터 부사장님한테 그 얘기 듣고 결이 씨 로테이션 안 돌린 거거든? 그러니까 소속 옮기고 싶으면 나 말고 우현 씨한테 가서 직접 말해. 우현 씨만 오케이하면 그땐 바로 옮겨 줄게. 나야 결이 씨가 일본 같이 가 주고 그 뒤에도 계속 Z 맡아 준다고 하면 완전 땡큐지. 민호가 결이 씨 엄청 잘 따르잖아.”

    매니지먼트 본부의 실장이 아닌 우현의 허락을 받아야 소속을 옮길 수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남윤의 앞에서 계속 소속을 옮겨 달라고 고집부릴 순 없는 일이었다. 남윤의 말대로라면 이건 제삼자는 끼어들 수 없는 문제였다. 우현과 직접 해결을 봐야만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우현이 형이랑 얘기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장님.”

    “감사는 뭘. 나는 딱히 해 준 것도 없는데. 아무튼 조금 전에 내가 한 얘기는 입 밖으로 절대 내면 안 된다? 어? 이거 대표님이랑 부사장님, 전무님, 나. 이렇게 넷밖에 모르는 내용이야. 아, 우현 씨까지 다섯이구나.”

    남윤은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입단속에 나섰다. 고결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단 말로 남윤을 안심시킨 뒤 회의실에서 나왔다. 이 얘기가 밖으로 돌아다니면 딱히 좋을 게 없는 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

    모든 스케줄을 끝마치고 헬스장에 들렀다 우현을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 오늘 고결은 우현의 집에서 자지 않고 본가로 갈 예정이었다. 원래 이런 경우에는 우현의 집까지 굳이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우현을 빌라 앞에다 내려 준 다음 내일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고결은 지하주차장에다 밴을 세운 뒤 우현을 따라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우현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랬다. 하기 힘들지만 더 늦기 전에 반드시 입 밖으로 꺼내 놓아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말이.

    종일 우현한테 어떻게 이 말을 꺼내놓으면 좋을지만 고민했다. 근데 딱히 이게 제일 좋겠다, 하는 묘안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이게 낫다, 정도는 있어도. 아마 우현과 헤어지는 일에 ‘좋은’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고결이 무거운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이 빌라의 최고층인 18층을 향해 올라갔다. 곧이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목적지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하지만 고결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남 실장한테 다녀온 뒤로 줄곧 이런 상태였다. 자신도 모르게 툭하면 정신을 놓았다. 꼭 결이 씨만 알고 있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며 비밀스럽게 털어놓던 남 실장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아서 그랬다.

    “결아.”

    “…….”

    “…결아?”

    차우현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고결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 시선을 느끼고 곧바로 눈을 맞춰 왔을 결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멍한 눈이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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