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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32화 (32/71)

32화

고결이 강민호의 말을 끊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민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런 거 진짜 아니야.”

고결은 티 나지 않게 조용히 숨을 골랐다. 나 오메가로 발현한 지 얼마 안 됐어. 곧이어 차분한 말이 흘러나왔다. 당황스러움에 강민호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제2의 성은 13살을 기점으로 발현하는 게 기본이었다. 그런데 오메가로 발현한 지가 얼마 안 됐다니. 강민호의 입장에서는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는 말이었다.

“이, 일단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얘기해요.”

멍하게 넋을 놓고 있던 강민호가 주위를 돌아보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발현 시기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이런 얘기를 나누기에 사방이 뻥 뚫린 회사 복도는 썩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강민호는 고결을 끌고서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고결은 강민호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몸을 움직였다.

“방금 전에 그 얘기… 그거 무슨 말이에요?”

강민호는 회의실 문을 닫는 것만으로는 불안했는지 문을 아예 걸어 잠갔다. 그러고도 조금 부산스럽게 사주 경계를 하던 강민호가 고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표정이며 어투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물으면 안 될 걸 묻는 사람처럼.

“아까 한 말 그대로야. 석 달쯤 전에 계속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어. 증상을 얘기했더니 갑자기 피 검사를 해 보자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나보고 열성 오메가로 발현됐다고 하더라.”

강민호의 눈과 입이 서서히 크게 벌어졌다. 고결의 얼굴 위로 약간의 씁쓸함이 번져 나갔다.

“13살 때 젠더 검사 받았다고, 여태까지 분명 베타로 살아왔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었는데 내가 남들보다 발현이 늦게 된 케이스래.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사례도 아니라고 하더라고.”

강민호가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분홍색 머리가 아래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죄송해요. 동그란 정수리에서 슬픈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형이 늦게 그랬을 거란 생각은 못 하고… 당연히….”

젠더 검사지 위조. 강민호는 차마 그 부정한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그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런 강민호의 어깨를 고결이 한 번 슬쩍 쥐었다가 놓았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뒤늦게 발현했어도 어쨌거나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긴 채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건 맞았다. 자신은 죄송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민호가 사과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애초에 제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속이고 이곳에 들어왔을 거라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늦게 발현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닌 건 확실했다. 자신 역시 반대의 상황에 놓였다면 아마 그렇게 지레짐작했을 것이었다.

“민호야.”

강민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고결이 진지하게 이름을 불렀다. 민호가 뭔가 상상했음을 알아채는 건 쉬웠다. 그러나 그게 어디까지 다다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막연히 젠더 검사지를 위조했을 거라 생각했을 수도.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명의를 사서 남의 인생을 뺏어 살고 있는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거 우현이 형은 모르는 일이야.”

그저 우현에 대해 오해만 하지 않으면 됐다. 우현이 제가 오메가로 발현한 사실을 숨기는 데 동조해 주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길 바랐다. 우현을 속여 가며 뻔뻔하게 옆에 붙어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우현이 그런 오해까지 받게 둘 수는 없었다. 우습지만 그게 마지막 남은 제 양심이었다.

“…모르신다고요?”

그제야 고개를 든 강민호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역시나 그 부분도 오해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응. 나 발현한 거 형한테도 얘기 안 했어.”

“…형. 그래도 괜찮…, 괜찮은 거예요?”

차우현과 고결의 사이가 무척이나 각별하다는 건, 강민호도 알고 있었다. 고결이 몇 번이나 제 입으로 직접 얘기했다. 유도를 잃은 자신한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사람이 우현이라고. 지금처럼 사람 구실 하며 살 수 있는 건 전부 다 우현 덕분이라고. 물론 우현을 향한 제 감정이 단순한 고마움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두 분은 같이 있는 시간도 긴데…. 나중에 혹시나 우현 선배님한테 들키게 되면….”

강민호가 고결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고결은 이번에도 민호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아까 민호의 생각을 쉽게 알아챈 것처럼. 많이 실망하실 텐데요. 그 말을 애써 삼켜 낸 걸 것이었다.

오메가로 발현한 사실을 스스로 직접 밝히는 게 아니라 우현한테 들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고결이라고 해서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실망만 하면 다행이지 큰 배신감을 느끼고 다시는 저 같은 인간과 상종하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건 은혜를 원수로 갚은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었으니까.

사실은 화장실에서 자위를 한 날, 이대로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현한테 솔직히 말하고 그만둬야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다. 스스로가 심지에 불이 붙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폭탄처럼 느껴졌다. 혼자만 터지고 죽으면 그나마 괜찮은데 그 피해가 함께 있는 우현한테 고스란히 갈 것 같아 겁났다. 우현을 향해 바짝 타들어 가고 있는 제 몸과 마음의 불을 꺼야만 했다.

그런데 비참하게도 그 결심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와르르 부서졌다. 휴대폰에 뜬 은행 앱 알림을 보고 나서였다. 하필이면 대출 상환금이 빠져나가는 날이었다. 아직도 집에 남은 빚이 많았다. 어머니가 일하기 힘든 몸이 되시고 거의 결 혼자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레 빚 갚는 속도 역시 느려졌다. 제1금융권에서 빌린 게 아니다 보니 이율도 높았다. 빚 갚는 속도가 빚이 불어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차갑고 높은 현실의 벽 앞에 고결은 언제나처럼 순응했다. 먹고살아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다. 이 세상에 남겨진, 저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저… 결이 형.”

잠시 동안 이어지고 있던 침묵을 깬 건 강민호였다.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던 강민호가 조심스럽게 고결을 불렀다. 그 덕분에 고결은 제 발목을 붙잡고 아득한 진창으로 끌고 들어가던 깊은 상념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럼 저희 팀으로 옮겨 오시는 건 어때요?”

이게 대체 무슨…. 고결은 아무런 대답도,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분명히 민호의 말을 제대로 듣긴 들었다. 그런데 해석이 안 됐다. 머리가 민호의 말을 해석하길 거부했다.

“저희 평상시에 같이 다니는 매니저 형들만 기본 3~4명이에요. 인기가 많아져서 그런 것도 있는데 아무래도 희율이가 오메가다 보니까 보안 강화 차원에서요. 그러니까 형도 우리 팀으로 오면 안전할 거예요. 또 오늘처럼 어쩌다 억제제를 흘리거나 해도 다들 당연히 희율이 약이라고 생각할 거고요. 저희 이번에 일본 프로모션 가는 것 때문에 인원 더 보충한다고 하셨는데…. 그거 형이 오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오늘 전체 회의에서도 전해 들은 내용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일본이라고 해도 어쨌든 해외였다. 거기다가 프로모션 일정이 빡빡해서 필요한 스태프가 좀 많다고 했다. 일단 최대한 안에 있는 인력으로 꾸려보되 정 안 되면 새로운 사람을 뽑아야겠다는 얘기가 오고 갔다.

“같이 있지 않으면 그만큼 들킬 확률도 줄어들잖아요.”

확률. 그 말에 순간적으로 숨이 얹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고결은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안으로 살짝 말아 쥐었다.

“형한테 우현 선배님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아요. 그래서 형 마음 더 불편하실 것도 알고요.”

“…….”

“저희 팀으로 옮겨 오시면 그나마 마음이 좀 덜 불편하지 않을까요?”

강민호가 침착하게 쐐기를 박았다. 틀린 거 하나 없는 말이었다. 우현을 속이고 있다는 불편함. 그리고 우현한테 형질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Z의 담당으로 넘어가면 이 두 가지에서 다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도 일은 일대로 계속하면서.

분명 나쁠 거 없는 조건이었다. 아니. 나쁘지 않다 못해 이건 거의 하늘이 준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선뜻 긍정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고결의 입술은 좀처럼 열릴 줄을 몰랐다. 그에 강민호는 눈치껏 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저 아까 한 말 진심이에요. 저는 오늘 형 못 본 거고, 형이랑 얘기한 적도 없어요. 이 비밀은 진짜 죽을 때까지 꼭 지킬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 저희 팀으로 옮기는 거 잘 생각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전 형이랑 같이 일할 수 있으면 너무 좋을 거 같아요.”

말을 마친 강민호가 배시시 웃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기 위한 제 나름의 노력이었다. 평소였다면 그런 민호를 따라 똑같이 입꼬리를 당겨 웃어 줬을 것이었다. 기특하고 고맙고 미안해서라도. 하지만 고결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고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거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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