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31화 (31/71)
  • 31화

    어리광 섞인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고결은 그런 강민호를 밀어내지 않고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등허리를 토닥거려줬다. 연습생 강민호에서 아이돌 그룹 Z의 윈이 됐어도. 흑갈색에 가깝던 머리가 강렬한 분홍색이 되었어도 민호는 여전히 민호구나 싶었다. 그게 왠지 모르게 좀 반가웠다. 아마도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민호가 데뷔를 하고 나면 약간의 거리감 같은 게 생길지도 모른다고.

    “요즘도 계속 바쁘지?”

    “네. 지금 일본 프로모션 준비하느라 계속 연습실에서 연습 중이에요. 일본어 수업도 열심히 듣고 있고요.”

    고결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푼 강민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반응에 회사에서는 부랴부랴 Z의 일본 진출을 계획했다. 2주 정도 일본에 머무르면서 무대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하이터치회 및 촬영회 등도 함께 진행할 예정이었다. 데뷔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신인으로서는 나름 파격적인 플랜이었다.

    “힘들겠다. 활동 끝났는데 쉬지도 못하고.”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열아홉답지 않은 성숙한 대답이었다. 그게 예뻤다.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던 고결이 별안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민호의 팔뚝 부근을 주물럭거렸다.

    “근데 너 혹시 요즘도 닭가슴살만 먹어?”

    형. 저 식단 조절하느라 닭가슴살만 먹었더니 이제는 씹는 식감이 꼭 젖은 종이처럼 느껴져요. 쇼케이스 전, 우는 이모티콘과 함께 메시지로 하소연을 하던 강민호였다. 아까는 머리에 정신이 팔려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까 살이 빠져도 너무 많이 빠져 있었다. 카메라에 잘 나오려면 살집이 있는 것보다는 마른 편이 더 좋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몸으로 그 빡빡한 스케줄을 어떻게 감당하려나 싶었다. 이제 막 첫걸음을 뗀 거나 다름없는데 벌써부터 건강을 해치기라도 할까 봐 염려됐다.

    “아니요. 그때는 데뷔 얼마 안 남아서 타이트하게 관리했던 거고 요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너무 밤늦게 야식 먹는 것만 아니면 거의 다 먹게 해 주세요.”

    “그래? 그러면 다행인데….”

    고결이 말끝을 흐렸다. 제 대답을 듣고도 여전히 얼굴에 걱정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결을 강민호가 위아래로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흐음. 살짝 벌어진 강민호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는 형이야말로 밥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예요? 전보다 마른 것 같은데.”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고결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아까 우연히 만난 윤 전무와 홍보 마케팅 본부의 최은주 과장한테도 들은 얘기였다. 두 사람은 고결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면서. 그땐 별생각 없었는데 민호까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로 살이 빠지긴 빠진 모양이었다.

    마음고생하면 살이 빠진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고결은 애써 착잡함을 삼켰다. 병원에서 열성 오메가란 판정을 받은 지도 어느덧 벌써 석 달이 되어 갔다. 그 긴 시간 동안 우현을 속이고 그 옆에 붙어 있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우현을 생각하며 화장실에서 자위까지 했으니 더더욱. 하루하루가 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조심스러웠다.

    “나이 들면 얼굴 살이 빠진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아, 그게 뭐예요.”

    강민호가 소리 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형 방금 나이 되게 많아 보였어요. 뒤이어 나온 강민호의 말에 고결은 태연히 수긍했다.

    “나이 많아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많아.”

    “에이. 그래 봤자 아직 스물다섯밖에 안 됐으면서.”

    “스물다섯밖에라니. 너랑 나랑 여섯 살이나 차이 나.”

    “띠동갑도 아니고 여섯 살이면 얼마 안 되는 거죠.”

    “너 중학교 교복 막 입고 학교 들어갔을 때 난 스무 살이었는데?”

    그렇게 시답지 않은 내용으로 아옹다옹하며 웃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렸다. 제풀에 놀란 고결은 다급한 손길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부디 다른 곳에서 걸려온 전화이길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액정에 뜬 이름은 우현의 것이었다. 촬영이 벌써 끝난 모양이었다. 고결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과 난감함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네. 형. 다 끝나셨어요?”

    -응. 메시지 보냈는데 확인을 안 하길래 전화해 봤어. 결이 너도 지금쯤 회의 다 끝났을 거 같아서.

    인터뷰가 이렇게나 빨리 끝날 줄은 몰랐는데. 완전히 판단 미스였다. 내가 지금 민호랑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구나. 우현의 전화를 받고 나니 자연스레 마음이 조급해졌다.

    ‘미안. 나 먼저 갈게.’

    고결은 민호한테 입 모양으로만 인사를 전한 뒤 주저 없이 몸을 틀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 나가는 고결의 몸에서 작고 가벼운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형, 이거 떨어트….”

    그걸 냉큼 주워 든 강민호가 이내 말끝을 흐렸다. 그 상태로 잠시 멍하니 굳어 있던 강민호가 그새 제법 멀어진 고결의 뒷모습을 멀거니 눈으로 뒤쫓았다.

    “네. 저 회의 다 끝났어요. 죄송해요, 형.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죄송하긴. 난 괜찮으니까 천천히 와.

    다정한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고결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대충 욱여넣으며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실으려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세게 붙잡힌 어깨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제 어깨를 잡아끄는 강한 힘에 고결은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민호야? 너 왜 그래?”

    어깨를 붙잡은 사람은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민호였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얼굴이 핏기 없이 희게 질려 있었다. 어디 아픈 건가 싶어 고결은 강민호의 이마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 한번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 건 벨소리가 아니라 알람이었다. 억제제 먹을 시간을 맞춰 둔.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내린 고결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알람을 종료했다.

    “형…. 이거 뭐예요?”

    그리고 저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이는 민호를 보고 나서야 겨우 알아차렸다. 휴대폰이 있는 곳에 함께 들어 있어야 할 억제제 한 봉지가 사라졌다는 걸.

    “…이거 억제제 아니에요?”

    쿵. 강민호의 입에서 억제제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심장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발끝까지 떨어졌다. 말문이 막혀서 고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고 싶은데 목이 꽉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저희 팀에도 있어요. 오메가.”

    그런 고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강민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걔가 히트사이클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먹어서 알아요. 심지어 걔가 까먹고 약 숙소에다 두고 와서 제가 대신 가져다준 적도 있어요. 그래서… 그래서 잘 알아요.”

    자잘한 흰 알약 여러 개와 길쭉한 타원형의, 새파란 알약 하나. 그 인공적인 파란색이 독특해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도, 모를 수도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고결의 행동이 강민호한테는 되레 확신을 심어 줬다. 역시나 제 손에 들려 있는 이 약은 억제제가 맞았다.

    “형이 오메가 억제제를 왜 들고 다녀요?”

    “…민호야.”

    “형 베타잖아요.”

    “그게 그러니….”

    “형 나랑 같은 베타잖아요. 아니에요?”

    순간 강민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서럽게 변했다. 들은 적이 있었다. 오메가면 취업에 불이익을 받으니까 불법으로 젠더 검사지를 위조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 고결이 그렇게 검사지를 위조하고 이곳에 들어온 거라 한들 상관없었다. 오히려 강민호는 고마워해야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 한그루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해 준 고결한테. 그러지 않았다면 그날 그 비상구 계단에서 결을 만나지 못했을 거고, 그럼 Z의 리더 윈도 되지 못했을 테니까.

    “…형 나 못 믿어요? 나도 못 믿어서 지금까지 숨긴 거예요?”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했다. 이런 건 아무한테나 쉽게 말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는 거.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울컥 서운한 마음이 몰려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한테 결은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한테 자신은 ‘아무’의 범주에 들어가는 그저 그런 존재인 것만 같았다.

    형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냐고. 힘들지 않았냐고.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 비밀은 꼭 지키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결을 안심시켜 줘야 했다. 그래도 모자랄 판에 대뜸 나 못 믿냐는 소리부터 해 버리고야 말았다. 강민호는 곧장 제 행동을 후회했다. 지금 그 누구보다 놀라고 당황했을 결한테 투정이나 부린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어른스럽지 못한 대처였다. 결의 말대로 제가 어린애가 맞다는 것만 증명하게 됐다.

    “아니에요. 형. 죄송해요. 방금 제가 한 말은 다 잊어 주세요.”

    다급한 사과가 이어졌다. 고결의 손목을 붙잡은 강민호가 손바닥에다 억제제를 꼭 쥐여 줬다. 그런 강민호를 바라보는 고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전 오늘 아무것도 못 봤어요.”

    “민호야.”

    “저는 오늘 형 안 만난 거예요. 아셨죠? 저는 계속 연습실에서 애들이랑 연습한 거예요. 그러니까 형도 그렇게 알고 계세요. 저 이 얘기 진짜 아무한테도 안 할….”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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