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우현이 손목을 붙잡았다. 자신을 이끄는 우현의 행동에 고결은 군말 없이 얌전히 몸을 움직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우현이 그 상태로 무릎만 살짝 구부렸다. 어딘가 눈에 익다 했더니만 코치님한테 기합을 받을 때 자주 하던 기마자세와 비슷했다. 물론 기합을 받을 땐 벽에다 등을 기대는 호사 같은 건 절대 누릴 수 없었지만. 무릎도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이 구부려야 했고.
상체를 조금씩 움직이며 등을 곧게 세운 우현이 고결의 손을 자신의 배 위로 끌어당겼다. 얇은 셔츠 위로 단단하면서도 판판한 우현의 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쩐지 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고결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조금 굽혔다. 우현의 배 위에 올라가 있는 손바닥도. 우현한테 붙잡혀 있는 손도, 전부 다 신경 쓰였다. 분명 내 몸인데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배 안에 풍선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렇게 크게 숨을 들이쉬면 그 풍선이 커진다고 생각하면서 배 안으로 공기를 집어넣어.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뱉을 땐 그 공기를 도로 뺀다고 생각하면 돼.”
우현이 알겠냐는 듯 그 상태로 눈만 조금 올려 고결을 바라보았다. 고결은 어설프게 우현의 시선을 피하며 잠자코 고개만 끄덕거렸다. 옅게 미소 지은 우현이 자세를 바로 하곤 양손으로 고결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럼 결이 너도 한번 해 볼래? 내가 봐줄게.”
그러겠다고 말도 안 했는데 어느새 위치가 반대로 변해 있었다. 얼떨결에 벽에다 등을 붙이고 서게 된 고결이 엉거주춤하게 무릎을 굽혔다. 곧이어 도복 안으로 우현의 손이 쓱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그 행동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도복 안에 티셔츠를 받쳐 입긴 했으나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우현이 맨살을 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생소한 느낌이 드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천천히 숨 들이쉬어 봐, 결아.”
“이렇…게요?”
“응. 맞아. 잘했어. 그리고 내가 배를 눌러도 들어가지 않도록 그 상태로 힘을 줘.”
앞으로 몸을 조금 기운 우현이 고결을 똑바로 바라보며 지그시 배를 눌렀다. 우현이 몸을 숙여 배를 압박해 올 때마다 얼굴 사이의 간격 또한 당연히 가까워졌다. 그 탓에 호흡에 전혀 집중이 안 됐다. 길고 촘촘한 우현의 속눈썹이라든가 높으면서도 매끄러운 콧대, 연분홍빛이 도는 입술 같은 것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다. 결국 고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고결이 작게 헛기침을 터트리자 우현이 곧장 손을 떼고 사과했다.
“결아, 미안. 내가 너무 세게 눌렀나 보다. 괜찮아?”
우현의 목소리에서 미안함이 잔뜩 묻어났다. 고결은 차마 우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허둥지둥 대답했다.
“괜찮, 괜찮아요.”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우현이 누른 배가 아파서가 아니었다.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고 있는 게 문제였다. 쿵쿵거리는 그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명치 부근이 뻐근하게 아팠다. 이대로 입을 벌리면 아무렇지 않게 심장을 토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아. 너 진짜 괜찮아? 진짜로 괜찮은 거 맞아?”
심상치 않은 모습에 우현이 무릎까지 굽혀 가며 시선을 맞춰왔다. 걱정 어린 얼굴로 자신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는 우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결은 헛숨을 집어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뛰던 심장이 지금은 발끝으로 툭, 내려가 있었다. 어지럽게 위아래로 요동치는 롤러코스터보다도 더 극심한 변덕이었다.
“…결아?”
우현의 부름에 고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두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까득 씹었다. 하도 세게 깨문 탓에 피가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고통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고결이 느낄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을 바라보는 우현의 시선이 벅찰 정도로 좋다는 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우현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두 귀가 녹아 버릴 것 같다는 거. 딱 그 두 가지뿐이었다.
그제야 고결은 알게 되었다. 우현을 볼 때마다 느낀, 자신조차 설명 못 할 생소한 감정들의 이름을. 제각기 모습은 달라도 그것들의 이름은 똑같았다.
사랑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불시에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첫사랑.
-4. 발각-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매니지먼트 본부 전체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고결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혼자서 회사를 찾았다. 사실 전체 회의라고 해서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매니저들은 배우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여야 하니 각자 상황에 맞춰서 움직이면 됐다.
고결만 해도 원래는 우현의 스케줄 때문에 올 수 없었다. 현재 우현은 회사와 조금 떨어진 스튜디오에서 한 잡지사와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다. 평소의 고결이라면 우현을 두고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요 몇 달간 전체 회의에 얼굴을 비치지 못한 터라 일부러 짬을 내서 들렀다. 어차피 전체 회의라고 해 봤자 그렇게 오래 하지도 않았다.
엔터테인먼트는 하는 일이 조금 특수해서 그렇지 일반 회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똑같이 수직적인 조직 생활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하 관계라는 것이 존재했다.
한그루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은 보통의 회사원들이 그러하듯 과장이나 팀장 등 자신의 상사한테 그날 업무 보고를 해야 했다. 다만 대부분의 시간을 외부에서 보내는 매니저들의 경우 꼭 대면 보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일정상 회사에 올 수 없다면 전화나 메시지 혹은 이메일 등으로 보고를 하면 됐다.
이런 식으로 다들 하루에 한 번씩은 보고를 올리다 보니, 전체 회의라고 해서 뭘 더 특별히 해야 할게 있지는 않았다. 서로 전반적인 업무 내용을 공유하고, 누가 어느 팀으로 옮겨 갈지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회사 내에서 유일하게 로테이션을 돌지 않는 고결은 자연스럽게 그 대화에서 배제됐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우렁찬 인사를 끝으로 회의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던 고결은 일부러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후 다이어리와 볼펜을 챙겨 밖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손목이 확 붙들렸다. 깜짝 놀라서 얼른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시선을 맞춰 왔다.
“…어? 민호야.”
얼빠진 상태로 굳어 있던 고결이 느릿하게 이름을 불렀다. 여기서 이렇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상대다 보니 반응이 한 발짝 늦었다. 누가 봐도 당황한 게 분명한 반응이었다. 그에 강민호가 재미있다는 듯 조금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고결의 얼굴 위로도 놀라움 대신 반가운 웃음이 번져 나갔다.
“형. 지금 회의 끝난 거예요?”
“너 여긴 어쩐 일이야?”
“오늘 매니지먼트 본부 전체 회의 있대서 미리 대기타고 있었죠.”
“왜?”
“형 보고 싶어서요.”
강민호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한 태도였다. 망설임이라곤 없는 그 솔직한 대답에 고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밝은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었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얼굴만큼이나 환한 그 색이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 연예인이에요, 라고. 일반 사람들이 하면 어색하게 겉돌 것 같은 특이한 색이 민호한테는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분홍색이었다고 해도 흔쾌히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강민호는 무사히 데뷔했다. 사실은 무사히보다는 성공적으로 데뷔했다고 말해야 더 정확했다. 강민호가 속한 남자 아이돌 그룹 Z는 데뷔와 동시에 이슈를 끌어모았다. 사전 공개된 뮤직비디오가 해외에서 먼저 호응을 얻은 덕분이었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만든 뮤직비디오였다.
실제로 Z의 뮤직비디오는 웬만한 영화와 맞먹는 스케일로 제작됐다. 독특하고 화려한 미장센을 연출하기로 유명한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CG 팀도, 무대 소품 팀도 전부 다 최고로만 데려왔다. 한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 심혈을 기울여 이 갈고 낸 아이돌이니, 그 정도의 지원은 당연했다.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직후 대중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확실히 자본이 많은 회사는 다르다며 Z한테 ‘자본돌’이란 별명을 붙여 주기까지 했다. 해외 팬을 등에 업은 Z는 승승장구했다.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트리플 크라운까지 달성하며 대세의 행보를 밟았다. 아직 데뷔 연차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인 그룹이 받기에는 과분할 정도의 엄청난 사랑과 관심이었다.
“아 참. 축하해. 저번에 음악방송에서 1위 한 거.”
“에이,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그리고 그때 형 축하한다고 메시지도 보내 줬잖아요. 까먹었어요?”
“아니. 그래도 이렇게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건 또 다르니까. 얼굴 본 김에….”
강민호가 대뜸 고결을 끌어안았다. 그 덕분에 축하해 주려고 그러지, 란 뒷말은 미처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사람들이 이미 다 빠져나갔으니까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왜 회의실 앞에서 신파를 찍고 있냐며 놀림을 받았을 게 뻔했다. 개중에서도 짓궂은 몇몇은 놀릴 거리 생겼다며 휴대폰부터 들이밀고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그럼 이렇게 축하해 주세요. 축하의 포옹.”